홍길복 목사의 잡기장

최고로 아름다운 것을 찾아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요? 나와 우리 인문학 친구들은 1년에 한두번은 NSW Art Gallery를 찾아가 새롭게 전시되는 작품들을 둘러보며 우리 인문학 친구이며 전문해설가인 조경화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공부한다. 요즘은 가끔 서양화가이신 미셀 유선생의 심도 깊은 작품 해설을 공유하고 가끔 천옥영선생을 비롯한 인문학 친구들의 개인 미술전에도 함께 함으로 미적 감각과 지식을 더하는 기쁨을 누리곤 한다. 시드니의 그 유명한 Opera House를 포함한 지역의 시립 연주회에서 활동하는 정경옥선생 등을 비롯하여 김신영선생께서 이끄는 <시드니여성 합창단>이나 성악가이신 천인욱선생 같은 분의 개인독창회에도 참석하여 축하와 함께 즐거움을 나누곤한다. 우리는 우리 모임의 대표인신 유여 최진선생이 지도하는 서예전에도 가끔 발길을 옮기는 행복이 있다. 최근 <목회자 인문학 모임>에선 손호현교수의 저서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를 읽으며 예술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심도있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한국의 젊은 영화감독 김미림박사가 와서 AI와 영화예술에 대해 특강을 하기도 했다. 인문학 여행 중에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미술작품이나 건축물들을 둘러보기 위해서 일정을 조정하기도 한다. 이 모두는 무엇을 위한 행동들인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발걸음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문학의 목적과 비전중 하나이다.
아주 옛날에는 신과 인간, 자연과 사회가 빚어주는 것을 모두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거려 이름하였고 우리는 그것들이 추구하는 목표를 진선미성 (眞善美聖)이라는 가치개념으로 명명했었다. 그러나 그후 차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리와 선함,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찾아가는 발걸음들은 제각기 독립된 영역을 만들어갔다. 사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온갖 순수학문과 응용과학들, 선하고 참된 인생을 지향하는 윤리학, 아름다움을 만들고 완성해 가려는 미학, 거룩함을 향해 가는 종교학과 신학의 세계들이 제각기 독립적 영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제 철학과 인문학은 자기 혼자서는 그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하나의 <연계학문, And Science>이 되고 말았다.
인간의 본성 중에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다. 인간은 아주 옛날부터 하늘과 땅을 비롯하여 해와 달, 별과 구름, 천둥과 비, 오로라와 빙하 같이 신이 빚어낸 신비한 것들을 최고로 아름다운 것으로 여겼었다. 그러다 후에는 그런 자연미에다가 인간들이 만든 소리와 그림, 춤과 시같은 조형미가 더해지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는 한없이 확장된 미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음식의 맛이나 의복의 멋이나 소리의 신비나 그림의 놀라움은 아주 초보적인 것들이고 이젠 AI가 만들어 주는 상상을 초월하는 미의 세계 속에서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해 혼란을 일으킬 정도가 되었다. 음악이나 미술이나 문학 만이 아니라 음식도, 옷도, 집도 예술이 된지가 오래 되었고 이제는 더 나아가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종교도 다 예술품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진정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란 무엇일가?> 미의 정의,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해 점점 의구심이 더해지는 세상이 되었다. 종래엔 영어로 Art라고 하면 흔히 <예술>이라고 번역했고 거기엔 시와 소설과 희곡들을 포함한 문학 작품들로 부터 시작하여 각종 음악과 미술, 사진과 공연예술들을 포함시켜 왔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대로 르네상스 이후부턴 예술과 과학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성당을 포함한 그 시대의 건축물들은 단순히 <건축 기술>이나 <건축공학>으로만 보지 않고 <건축예술>로 평가 받게 되어 예술도 과학이고, 과학도 예술이 되는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은 <Art, 예술>의 영역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다. Donald Trump가 <The Art of Deal, 거래의 기술>을 쓰고, Sun Tzu가 동양의 고전 중 하나인 <손자병법>을 <The Art of War>라고 번역 출판함으로 <Art>란 전통적인 Liberal Arts, Fine Arts, Performing Arts를 넘어서 Martial Art, 비데오 아트, 팝 아트, 디지탈 아트, 커뮤니케이션 아트, 상업과 전쟁의 영역 까지를 포함하여 다양한 기술과 기법, 방법과 책략으로 까지 확장되었다. 우리 시대는 예술 (Art)과기술 (Technic)이 뒤섞여 버리고 말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종래 예술가란 아주 배고픈 직업중 하나였다. 모자르트나 고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예술가들은 가장 잘 나가는 직업 중 하나가 되었고 그들이 만든 예술품들은 거대한 투기물이 되었다. 예전의 예술가들은 가난하고 무시당하고 고독했지만 오늘날 그들은 정치와 경제에 아주 민감해졌고 정치인들이나 기업가들과 손을 잡고 그들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히틀러나 김일성 치하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요즘의 예술가들은 정치권력에 따라 부자가 될 수도 있고 거지가 될 수도 있을 뿐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생사가 오락가락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평소 피타고라스가 그랬던 것 처럼 <균형과 조화>, 영어로 Harmony and Balance를 아름다움의 정형이라고 말해왔다. 전체와 부분을 포함하여 밝은 것과 어두운 것, 먼 것과 가까운 것, 큰 것과 작은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긴 것과 짧은 것, 움직이는 것과 정지된 것 같이 양극에 자리하고 있는 것들을 아주 적절하게 조절하고 균형있게 자리하도록 배치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나는 동양적 중용 (中庸)을 최고의 미 (美)라고 말해왔었다. 그런데 이런 나의 생각도 이젠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 사이에 <타협과 협상> <Negotiations and Deal>이 진짜 아름다움이라고 큰 소리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양보와 취득, 승리와 패배, 베품과 얻음을 위해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심지어는 종교와 학문까지 이해득실을 계산하며 줄 것은 주고 얻을 것은 얻자는 <타협과 협상>을 진정한 미 (美)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점증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아름다움이란 균형과 조화>를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진정한 미는 타협과 협상의 산물>이라고 설득하는 이들이 더 많아지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아름다움이란 단순하게 한 두 가지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아름다움에도 수 많은 종류가 있다. 자연미, 인공미, 인격미 같은 기본적인 것들로 부터 시작하여 외적 아름다움과 내적 아름다움으로 나누어 말하기도 한다. 아름다움의 의미와 기준, 미의 역사와 종류 등을 연구하는 미학에서는 숭고미, 비장미, 우아미, 고상미, 창조미 같은 것들을 거론하기도 하며 프랑스에서는 제 1 예술로 부터 제 10 예술에 이르기 까지 예술의 종류를 아주 세분화 하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외치며 표현하는 말이나 글들은 얼마나 많은가? Beautiful, Pretty, Wonderful, Marvelous, Gorgeous, Exquisite, Stunning, Dazzling, Majestic, Breathtaking, Handsome, Attractive, 아름답다, 예쁘다, 매력적이야, 입을 다물 수가 없어, 멋있어, 놀라워, 환상적이야, 화려해, 눈부셔, 찬란해…. 오늘날 포스트 모던이즘 사회에서는 말한다. <예술을 정의하는 데는 절대적 기준이란 없고 따라서 예술이란 정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모나리자만 뛰어난 것이 아니다. 팝과 록도 아름답고 피카소의 작품도 위대하다> 하면서 <미의 정의와 기준은 변한다>고 주장한다. 오늘 우리 시대는 창조자나 창작자가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것을 보고 듣고 읽고 즐기는 개개인들이 아름다움을 규정한다고 본다.
그렇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모든 것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나는 끊임없이 최고의 아름다운 것을 묻고 또 그 최고의 아름다운 것을 찾아가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 맞아! 틀린 말은 아니야! 그러나,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있을 거야!> 하는 미의 비교심리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역시 나는 늙어가는 구세대의 틀을 벗어나기가 쉽질 않다.
그럼 <모든 아름다운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최고로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나는 사람이라고 본다. 나는 이 세상에선 뭐니뭐니해도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고 믿는다. 꽃 보다 아름다운 것은 꽃을 만드신 분이고, 그림이나 음악, 시나 사진, 연극이나 드라마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그것들을 그렇게 아름답게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주어진 아름다움을 넘어서 이 세상에 현존하는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다 사람들이 빚어낸 것들이 아닌가? 그렇게 수도 없이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낸 인간들이야 말로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나도 그 반대의 세상과 뒤집어진 인간본성에 대해서 모르는 바가 아니다. 순자의 성악설이나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임을 인정한다. 세상에서 제일 추하고 더러운 것 역시 사람이란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이란 적어도 도덕적으로 선하기는 참 어려워도 심미적으로는 아름다운 존재라고 믿는다. 인간의 심성 근저엔 아름다움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인간의 마음 속에는 미움 보다는 사랑이, 차가움 보다는 따뜻함이, 싸움보다는 평화가, 분노 보다는 용서가, 이기심 보다는 나눔과 베품이, 교만 보다는 겸손이, 원망 보다는 감사가, 불신 보다는 믿음이, 절망 보다는 희망이 그리고 슬픔 보다는 기쁨이 더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나는 성악설 보다는 성선설을 지지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듯 크고 놀랍고 위대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당신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제일로 아름다운 존재라고 믿는다.
오늘도 나는 이 씁쓸하기 짝이 없는 세상을 살면서도 <당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굳이 마리아 칼라스나 파바로티의 노래와 비교할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당신의 그 친절하고 늘 고맙다고 말하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음성이 가장 아름답게 들린다. 당신의 고개 숙이는 모습, 당신의 져주는 자세, 당신의 그 느긋함과 느린 걸음, 당신의 철없는 순진성과 진솔함이 내게는 가장 아름다운 인격으로 비쳐진다.
당신은 참 인정이 많고 따뜻한 분입니다. / 당신은 늘 자신을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군요. / 당신은 늘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는군요. / 당신의 얼굴엔 언제나 웃음이 묻어 있습니다. / 당신은 양보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네요. / 당신은 늘 당신 자신과 인간의 한계를 받아드리시는군요. / 그래서인지 당신은 자주 두 손을 모으고 하느님께 기도를 받치시는군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당신> 아! 이런 당신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 홍길복 (2025. 8. 18)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