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근 목사 칼럼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단연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 글쓰기라는 행위는 타인에게 읽히기 이전에, 철저히 내 내면을 향한 대화이자 스스로를 가다듬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의 주된 글쓰기 시간은 보통 이른 아침이다. 고요한 새벽 기도를 마치고, 아침 달리기를 하러 나서기 전의 그 틈새 시간이 바로 글을 쓰는 때다. 이 시간은 세상의 그 어떤 소음이나 환경에도 침해받지 않는,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청정구역과도 같다. 결국 이 고요한 아침에 방해 없이 글을 써 내려가는 행위 자체는 곧 나의 깊은 묵상의 시간과도 맞닿아 있다. 이 충만한 묵상 속에서 내가 펜을 드는 구체적인 동기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동기는 기도 중에 찾아온다. 고요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주제들이 있다. 그 귀한 깨달음들이 스쳐 지나가지 않게 붙잡고 깊이 묵상하기 위해 글을 쓴다. 글을 써 내려가다 보면, 내 안에 맴돌던 영적인 감동들이 자연스럽게 정돈되고 명확해진다.
두 번째 이유는 ‘백독이 불여일서 (百讀이 不如一書)’라는 옛말에 있다. 백 번 읽는 것보다 한 번 쓰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 머릿속에 흩어진 수많은 생각과 지식들은 글로 적어낼 때 비로소 온전한 내 것으로 체계화된다. 글쓰기는 지식을 꿰어내는 가장 훌륭한 바늘과 실이다.
세 번째는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쌓아온 ‘인풋 (Input)’에 대한 자연스러운 ‘아웃풋(Output)’이다. 참으로 많은 책을 읽으며 지식을 탐구해 왔고, 그 축적된 사유들이 이제 글이라는 형태를 빌려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나아가 이렇게 기록된 글들은 앞으로의 후반전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줄 귀중한 자산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내가 쓴 글들을 다시 읽어보고 지식을 재정리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삶을 윤택하게 하는 기쁨이다.
끝으로, 나는 글쓰기를 하나의 ‘기술(Skill)’이자 끊임없는 ‘훈련’으로 대한다. 어떤 탁월한 기술이든 결코 단숨에 얻어지는 법은 없다. 오랜 시간 땀 흘려 발전시키고 묵묵히 연마해야만 비로소 온전한 내 것이 된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그녀의 저서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글쓰기를 단순한 기술이 아닌 “마음을 수련하고 진정한 자신과 만나는 지독한 훈련의 과정”이라고 역설했다. 내면의 밑바닥에 있는 진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손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목회를 하던 시절부터 빠짐없이 목회 칼럼을 쓰며 펜을 놓지 않았던 이유도 이와 닿아 있다. 글은 자꾸 써보고 부딪혀봐야 길이 열리고 스스로의 스킬이 발전한다. 단숨에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매일의 꾸준한 쓰기를 통해 나의 기술을 연마하고 내면을 단련하는 것. 이것이 나의 조금은 색다르면서도 가장 진솔한 글쓰기 동기다.
결국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영성을 다듬고, 지식을 꿰어내며, 삶을 풍요롭게 하고,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가장 완벽한 ‘나를 위한’ 시간이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시편 119편 147절)
차는 시동이 걸려야 간다
겉모습은 흠잡을 데 없이 멀쩡하고 엔진도 거친 없는 듯 보이는 자동차라도,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얼마 전 아침, 내 차가 바로 그러했다. 어제까지 잘 달리던 차가 오늘 아침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시동이 걸리지 않는 순간, 그 차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이동 수단이 아니라 그저 공간만 차지하는 거대한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이는 우리네 인생도,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훌륭한 계획과 경건한 형식을 갖추었어도, 내면의 엔진에 불이 붙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결심’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시동’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를 돌이켜보면, 거대한 부흥의 물결은 항상 ‘한 사람의 시동’에서 시작되었다. 1906년,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의 작은 건물에서 윌리엄 시무어라는 한 사람의 간절한 기도와 성령의 불꽃이 임했을 때, 전 세계를 뒤흔든 오순절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1904년 웨일즈에서는 이반 로버츠라는 청년이 “주님, 저를 순종하게 하소서”라는 단 하나의 시동을 걸었을 때, 웨일즈 전역이 성령의 불길에 휩싸였다.
이 부흥의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한 프랭크 바틀레만은 그의 저서 『아주사 거리 (Azusa Street)』에서 부흥의 핵심 동력을 ‘철저한 자기 비움 (Self-Emptying)’으로 정의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시동을 거시기 위해 우리라는 그릇을 비우시는 과정을 강조하며, 인간의 자아가 죽고 성령께서 온전히 주인 되실 때 비로소 거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물 흐르듯 시작된다고 역설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왜 오늘날 교회는 무력해지고 성도들은 힘을 잃어가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수많은 프로그램과 현대적인 시스템으로 잘 갖추어진 교회 같지만, 정작 ‘시동’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의 능력 없이 열심만 내는 것은, 텅 빈 연료통을 안고 엑셀레이터를 밟으며 제자리에서 엔진만 과열시키는 꼴과 다름없다.
교회의 무너짐은 조직의 약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 심령 속에 성령의 불꽃이 꺼져가기 때문이다.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린 성도는 세상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은 인간의 지혜나 수단으로 감당할 수 없으며,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권능을 입을 때 비로소 시작되고 완성된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기도는 분명하다. “주여, 내 영혼의 엔진에 성령의 불꽃을 던져 주시옵소서. 내 안에 멈춰 선 시동을 다시 걸어 주시옵소서.”
성령의 시동이 걸리면 비로소 삶의 방향이 바뀐다. 하나님의 일은 내 힘으로 억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이끌려 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멈춰 선 차는 결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오늘, 다시 한번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점검받고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불이 임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다시 시동을 걸 시간이다. 성령의 강력한 불꽃이 임하여, 우리 모두가 멈춰 섰던 자리에서 다시금 힘차게 하나님 나라를 향해 달려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오늘도 우리 성시화 가족은 복음을 들고 사드니 도심지로 담대히 나가갑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신학과 과학의 관련성
우리는 지금 과학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일상을 뒤덮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제 휴머노이드 로봇과 AI가 지적·육체적 영역을 넘나들며 우리 삶의 풍경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과학은 인간에게 ‘어떻게 (How) 하면 더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살 것인가?’라는 해답을 제시합니다. 이는 전쟁터에서 승리를 위해 사용하는 치밀한 ‘전술’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우리 내면에는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솟구칩니다. 여기서 신학은 인류라는 존재가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전략 (Navigation)’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과학이 삶의 수단을 풍요롭게 한다면, 신학은 우리가 왜 존재하며 무엇을 위해 사는 진정한 삶의 의미와 목적지를 가리키는 나침판입니다.
이러한 ‘전략적 신학’과 ‘전술적 과학’의 조화는 현대의 석학들을 통해 더욱 선명해집니다. 양자물리학자이자 신학자인 존 폴킹혼 (John Polkinghone)은 과학과 신학을 각각 다른 도구를 사용하지만 ‘근본적 실재’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상호보완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과학이 현상의 작동 원리를 밝힌다면, 신학은 그 작동하는 세계에 담긴 지적인 목적을 규명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과학과 신학은 하나의 실재를 바라보는 두 개의 창 (Window) 입니다.
또한, 분자생물학 박사이자 신학자인 앨리스터 맥그래스 (Alister McGrath)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과학적 신학’을 통해 신학 역시 삶의 가장 적절한 모델을 찾아가는 정교한 과정임을 역설합니다. 맥그래스에 따르면 과학이 기술적 전술로 삶의 도구를 제공할 때, 신학은 그 도구를 활용하는 인간의 상상력과 목적성을 가다듬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제가 평소에 주장하는 APT (Awareness Practical Therapy)의 핵심, 즉 깨달음을 통해 삶을 실천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과 그 맥을 같이합니다.
우리가 AI 시대를 맞이하며 가져야 할 지혜는 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제공하는 강력한 전술적 도구들을 신학이라는 견고한 전략 위에 올리는 것입니다. 로봇이 노동을 대신하는 편리한 세상이 올수록, 우리는 오히려 ‘노동’을 넘어 ‘존재의 의미’를 고민하는 더 깊은 영적 여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결국 과학은 인간을 편리한 곳으로 인도할 수는 있지만, 그곳이 우리가 가야 할 ‘행복의 본향’, “천국”까지는 알려주지 못합니다. 편리함이라는 속도에 취해 우리가 왜 달리는지 잊지 마십시오. 오늘, 성경이라는 나침반을 통해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를 다시금 점검하십시오. 과학은 전술이고, 신앙은 전략입니다. 이 두 날개가 조화롭게 펼쳐질 때, 인류는 기술의 지배자가 아닌, 창조주의 섭리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둘을 사용해서 인간이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어싱 (Earthing)의 또 다른 선물
나는 군 복무 중에서 얻었던 무좀이 나를 지금까지 몹씨 힘들게 괴롭혀 왔습니다. 많은 무좀연고를 발라도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특히 달리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엄지 말가락이 무좀으로 들떠 있는 상태는 괭장히 치명적입니다. 엄지말가락이 밀어내는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어싱 (Earthing)을 한 결과로 족저 근막염도 치료가 되었지만 오늘 무좀까지 거의 완치가 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싱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선물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어싱 (맨발 걷기)과 무좀의 치료 사이에는 매우 긍정적이고 과학적인 연결 고리에 대하여 한번 알아 봅니다. 제가 무좀이 개선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맨발로 땅을 밟는 행위가 발의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구체적인 이유를 한번 알아 보겠습니다.
무좀의 원인인 백선균 (곰팡이균)은 덥고 습하며 밀폐된 환경을 가장 좋아합니다. 두꺼운 양말과 운동화 속은 땀이 차기 쉬워 균이 번식하기에 최적의 장소입니다. 하지만 맨발로 흙을 밟고 걷게 되면 발이 외부 공기에 온전히 노출되어 땀이 마르고 쾌적하게 건조한 상태가 유지됩니다. 곰팡이균이 살아갈 수 있는 습한 환경 자체가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것입니다.
흙이나 모래, 풀밭 위를 맨발로 걸을 때 발생하는 지면과의 자연스러운 마찰은 무좀균의 훌륭한 먹잇감이 되는 발의 묵은 각질을 효과적으로 떨어져 나가게 합니다. 또한, 야외에서 맨발을 드러내고 걸을 때 자연스럽게 쬐게 되는 햇빛의 자외선은 곰팡이균의 증식을 억제하고 살균하는 효과를 제공합니다.
발바닥 전체가 울퉁불퉁한 지면에 닿으면서 얻는 자연스러운 지압 효과는 발끝의 미세 혈관까지 혈액순환을 크게 촉진합니다. 혈류가 원활해지면 무좀으로 손상된 피부 조직에 영양분과 산소가 잘 공급되어 세포 재생이 빨라집니다. 더불어 국소적인 면역력이 높아져 균을 스스로 이겨내는 발의 자생력이 강해집니다. 어싱의 핵심 원리인 지구의 자유 전자 흡수가 체내 염증을 완화한다는 점 역시 발 피부의 회복에 간접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은 어떤 질병이던지 죽이려 하는 것보다는 기생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 합니다. 죽이려 하면 의사의 처방을 따라 약을 먹어야 하고, 약은 결국 다른 부작용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위한 나의 일상의 삶
신체 단련
매주 지난 20년간 30-40km를 달리며 다가오는 8월 시드니 국제 마라톤 풀코스 (42km)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계속되지 않은것은 의미가 없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달리기 전에 준비운동으로 오리걸음 40번, 달리기 후에도 몸을 풀기 위해 오리걸음 40번을 규칙적으로 합니다. 달리기 후에는 팔 굽혀 펴기도 50에서 100번을 합니다. 달리기를 쉬는 날에도 맨발 어싱으로 한 번에 2km씩 총 주에 3일 정도 걷고, 지난 13년간 헬스클럽에 가는 일은 잠시중단하고, 아침저녁으로 아령 운동을 각각 120개씩 소화하며 근력과 신체 밸런스를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슴둘레는 103cm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스트레스 관리
전 할 수 있는 일은 즉각적으로 실천에 옮깁니다. 반면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 온전히 기도로 맡기며 스트레스 자체를 삶에서 차단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철학은 지난해 아마존 킨들에 출간신작 『No Stress in My Dictionary』책에 잘 정리해 두었습니다.
40년을 이어온 깊은 새벽의 영성 시간
지난 40년간 한결같이 새벽 1~2시에 일어나 거실 소파에서 밤을 지새우며 기도의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때로는 졸기도 하지만 굳건히 성경 구절을 붙잡고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이 새벽의 시간은, 바쁜 일상을 흔들림 없이 지탱하는 저에게 가장 강력한 영적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30년의 철저한 루틴이 만든 균형 잡힌 식단
30년째 이어온 아침 식단은 바나나, 아보카도, 시리얼과 함께 호두, 캐슈넛, 호박씨 등 10여 가지의 견과류를 챙기며, 분유 한 스푼과 꿀 한스푼, 비타민 C, D는 꼼꼼히 챙김니다. 점심은 학교에서 간결하게, 저녁은 아내가 정성껏 차려주신 밥상을 감사함으로 즐기며 지난 10년간 80kg의 체중을 한결같이 유지하고 있습니다.
피로를 남기지 않는 탁월한 수면 습관
피로가 몸에 축적될 틈을 주지 않는 수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도 안전한 곳에 차를 세우고 단 5~10분만 눈을 붙여도 바로 꿈을 꿀 만큼 깊은 숙면에 빠지며, 낮에도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30분에서 1시간가량의 달콤한 낮잠을 통해 몸의 활력을 즉각적으로 회복하십니다.
원만한 인간관계
심리학자 아들러의 말처럼 인간관계에서 누군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말을 잘 실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인사를 잘 합니다. 유머로 타인에게 웃음을 주고 함께 기뻐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적을 만들지 않고 넓은 포용력으로 참으로 원만하고 따뜻한 관계망을 가꾸어 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추가적으로 꼭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면, 매 순간마다 따뜻한 물로 꼭 발을 씻어 주는 습관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잇빨은 치약대신 소금물로 관리하고 그리고 그때마다 소금물로 가글을 합니다. 그리고 프라스틱 솔로 머리를 빗고 그리고 꼭 40번 정도를 두드려 줍니다. 그리고 시간 날때마다 물로 눈을 씻어 줍니다. 지난 십년간 시력에도 변화가 없습니다. 한 가지 어릴때부터 오래토록 앓아왔던 중이염으로 저의 가장 약한 부분은 청력입니다. 더 이상 청력이 약함을 예방하기 위해 지난해 부터 보청기를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청력의 변화는 거의 없습니다.
이상이 저의 영, 혼, 육 건강관리의 일상입니다. 오늘이 내 나이 74세가 되는 날입니다. 감사합니다.

김병근 목사
시드니성시화운동 대표회장, 엠마오상담대학 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