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근 목사 칼럼
나무의 겨울 준비
지금 시드니는 가을의 정점에 서 있다. 한때 눈부신 초록과 화려한 단풍으로 하늘을 수놓았던 잎들이 이제는 미련 없이 땅으로 내려앉는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소리는 쓸쓸한 종말의 전주곡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식물학자의 시선으로 본 그 풍경은 사뭇 다르다. 그것은 나무가 다가올 겨울이라는 거대한 시련을 앞두고 감행하는 가장 치열하고도 지혜로운 ‘생존의 몸부림’이자 ‘거룩한 비움’이다.
나무가 겨울을 앞두고 잎을 떨구는 행위는 단순한 포기가 아니다. 기온이 내려가고 수분이 부족해지는 극한의 상황에서, 나무는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하던 잎사귀들을 과감히 버림으로써 몸체의 수분 손실을 막는다. 잎과 가지 사이에 ‘탈리층 (Abscission Layer)’이라는 이별의 벽을 쌓는 나무의 단호함은, 본질을 지키기 위해 비본질을 깎아내는 고도의 전략이다.
우리 인간의 노년 역시 이와 닮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청년기의 열정과 중년의 성취가 화려한 여름의 잎사귀였다면, 노년은 그 잎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생의 본질’만 남기는 시기다. 평생 쥐고 있었던 물질에 대한 집착, 명예에 대한 갈망, 그리고 타인과의 해묵은 갈등이라는 잎사귀들을 하나둘씩 소리 없이 떨어뜨려야 한다. 그래야만 죽음이라는 차가운 겨울 바람 앞에 영혼의 줄기가 부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다.
나무의 겨울 준비에는 또 하나의 경이로운 비밀이 숨어 있다. 겉으로 보기에 나무는 성장을 멈추고 잠든 것 같지만, 그 내면에서는 전분을 당분으로 바꾸는 ‘화학적 대변혁’이 일어난다. 세포액의 농도를 높여 어는점을 낮추는 이 과정은, 나무가 추위 속에서도 얼어 터지지 않게 하는 천연 부동액이 된다.
인간의 황혼기 또한 이처럼 ‘내면의 당도 (糖度)’를 높이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육신은 낡아지고 사회적 역할은 줄어들지언정, 평생의 경험을 지혜로 승화시키고 원망을 감사로 바꾸어 영혼의 농도를 진하게 만들어야 한다. 시련 앞에서 얼지 않는 단단한 영성은 바로 이 ‘내면의 전환’에서 나온다.
나무는 또한 내년 봄에 틔울 ‘겨울눈’을 겹겹이 싸서 보호한다. 비록 자신은 잎을 잃고 앙상해질지라도, 다음 세대를 위한 생명의 씨앗만큼은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다. 우리 역시 우리가 떠난 자리에 남겨질 이들에게 어떤 ‘정신적 유산’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재산의 상속보다 훨씬 귀한, 사랑의 기억과 삶을 대하는 숭고한 태도일 것이다.
죽음은 나무의 겨울처럼 끝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계절로 들어가는 문이다. 겨울을 이겨낸 나무가 봄의 찬란한 꽃을 피우듯, 우리 역시 이 땅에서의 겨울을 소망 중에 인내하며 준비해야 한다. 죽음 너머에 약속된 ‘천국’이라는 영원한 봄을 신뢰할 때, 비로소 우리는 두려움 없이 마지막 잎새를 보낼 수 있다. 시드니의 낙엽 길을 걸으며, 우리도 나무처럼 고요히 물어보아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비우고 있으며, 내 영혼의 당도는 얼마나 깊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내 시선은 저 겨울 너머의 영원한 나라를 향하고 있는가.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린도후서 4:16)
광야 시대와 가나안 시대의 영성 비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여호수아 5:12)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매일 아침 진영 주위에 이슬처럼 내리던 하늘의 양식, 만나가 멈춘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첫 소산을 맛본 다음 날이었다. 누군가는 당혹스러웠을 것이고, 누군가는 두려웠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입만 벌리면 주어지는 ‘공급의 기적’은 없었다. 광야의 끝자락에서 이스라엘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적 전환점을 맞이한다. 바로 ‘기적의 시대’에서 ‘땀의 시대’로의 이행이다.
광야는 결핍의 공간이었다. 씨를 뿌릴 땅도, 거둘 낫도 없는 그곳에서 인간의 노력이란 무의미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으셨다. 그 40년은 인간의 수고가 0%일 때 비로소 100%의 하나님을 보게 되는 훈련의 시간이었다.
광야의 영성은 ‘전적인 의존’이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내 실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지는’ 것이었다. 이 시기 이스라엘은 영적 유아기였다. 부모가 입에 넣어주는 젖을 먹듯, 그들은 공급자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선포는 그 척박한 모래바람 속에서 완성되었다.
하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서자 익숙했던 기적이 사라졌다. 여호수아 5장 12절의 기록처럼, 그 땅의 소산을 먹자마자 신실하게 내리던 만나가 그쳤다. 이스라엘은 이제 손에 쟁기를 잡아야 했다. 땅을 기경하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으며 하늘의 비를 기다려야 하는 고단한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흔히 오해한다. 기적이 멈춘 것이 하나님의 부재나 은혜의 철회를 의미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가나안의 영성은 기적의 소멸이 아니라 ‘기적의 일상화’를 의미한다. 이제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여는 방식 대신, 인간의 노동과 땀방울 속에 복을 담아내시는 방식을 택하셨다.
광야에서 ‘가만히 서서’ 구원을 보았다면, 가나안에서는 ‘발바닥으로 밟으며’ 약속을 쟁취해야 한다. 이것은 영적 성인기 (Maturity)로의 진입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입에 음식을 넣어주는 부모가 아니라, 자녀와 함께 밭을 일구는 동역자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것이다.
가나안 영성의 핵심은 ‘거룩한 노동’에 있다. 내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 것이 복이며 형통이라는 시편의 고백처럼, 가나안에서의 농사는 단순한 생존 활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땅을 다스리고 관리하라는 창조주의 명령을 수행하는 예배였다. 오늘날 우리도 각자의 광야와 가나안을 지나고 있다. 때로는 뜻밖의 기적으로 버티는 ‘광야의 계절’이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반복되는 일상과 치열한 수고가 요구되는 ‘가나안의 계절’이다. 만약 지금 당신의 삶에서 기적 같은 만나가 그쳤다면, 그것은 당신의 영적 수준이 낮아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스스로 땅을 일구어 이웃을 먹일 만큼 당신이 성숙했다는 하나님의 신뢰이자 선언이다.
광야의 영성이 ‘비움’이라면 가나안의 영성은 ‘채움’이다. 광야에서 애굽의 노예 근성을 비워냈다면, 가나안에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질서로 삶의 터전을 채워가야 한다.
만나가 그친 그 자리, 비로소 우리의 땀방울이 거룩한 성수가 되어 땅을 적시기 시작한다. 기적보다 위대한 것은 기적이 사라진 일상을 기적처럼 살아내는 성숙함이다. 오늘 당신의 일터에서 흐르는 땀방울은, 하늘에서 내리던 만나만큼이나 고귀한 하나님의 은혜다.

김병근 목사
시드니성시화운동 대표회장, 엠마오상담대학 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