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감사는 신앙의 척도
한국기독교 선교 역사는 천주교는 프랑스가 주도했고, 개신교는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가 주도했다. 한국에서는 장로교가 가장 큰 교단이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아주 미약하다. 세계 장로교 인구는 1,800만이고, 이중 한국이 1/3이다. 세계 기독교 인구에 대비해서는 0.8%이고, 개신교 인구에 비해서는 3.4%에 불과하다. 장로교가 가장 큰 교단이 된 것은 초기 선교사들과 관련이 있다. 미국의 북 장로교, 남 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등의 선교사들이 많이 파송되었다. 미국은 11월의 4째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 미국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처음 추수하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한국 개신교는 미국의 영향을 받아, 11월 3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켰으나, 지금은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교회들도 많이 있다.
1. 1620년 메이플라워호
추수감사절은 1620년 102명의 영국 청교도 (Puritan)들이 메이플라워 (May Flower)호를 타고 63일간의 긴 항해를 마치고 미국 동부 ‘프리모스’에 상륙했다. 12월 21일,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눈이 많이 쌓이고 기후는 급냉하여 활동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1년 동안 44명이 죽었다. 열심히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추수를 하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를 드렸다. 그 후 1789년에는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이 감사절을 선포하고 링컨 대통령이 1863년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국경일로 정하여 감사절로 온 국민이 지키게 된 것이다.
2. 1902년 갤릭호
1902년 12월 22일 월요일, 하와이 첫 이민단 121명이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우선회사 ‘현해환’에 승선하여 일본 나가사키 항을 향해 2일간의 항해에 올랐다. 이중 19명은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102명만이 이민선 ‘갤릭호'(S.S. Gaelic)를 타고 하와이로 향하게 된다.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난 청교도 숫자와 동일하다. 1903년 1월 13일 갤릭호(S.S. Gaelic)는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다. 이민자의 절반 정도가 내리교회 신자였다. 교회는 한인 공동체의 구심점이고 초기 이민자들의 안식처였다. 1903년 호놀룰루에서 정기적인 예배가 시작되어 1905년 해외 최초의 한인 교회가 에바 농장에 세워졌다. 여성은 남성의 1/10이었다. 이때 사진신부가 등장했다. 호주 최초의 한인교회는 1973년에 개척된 멜본한인교회이다.
3. BC 1446년 모세호
출애굽 연도는 BC 1446년과 BC 1440년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애굽에서 430년 동안(출12:41) 노예생활하고 있던 히브리 민족을 하나님이 모세틀 통하여 구출하여 내셨다. 20세 이상의 장정만 60 만명이 넘었으니, 200만 이상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호를 타고 홍해를 건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출애굽의 목적을 말씀하셨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출 5:1) 이스라엘의 3대 절기가 있다. 보리를 거두는 초실절, 밀을 거두는 맥추절, 과실을 거두는 장막절이다. 절기는 역사적인 의미도 함께 있다. 초실절은 출애굽한 유월절, 맥추절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오순절, 장막절은 40년간의 광야생활을 기억하는 초막절이다.
시편 136편은 유월절과 신년절에 주로 낭송되었다. 시인은 하나님은 신중의 신이고, 주 중의 주이시며(1-3),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통치하시고(4-9),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며(10-22),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23-26)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다.
3가지 종류의 감사가 있다. If 감사, Because 감사, In spite of 감사. If 감사는 ‘조건적 감사’이고, Because 감사는 ‘때문에 감사’이고, In spite of 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는 다니엘의 3친구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단3:18)의 감사이고, 하박국 선지자의 ‘아무것도 없을 지라도’의 감사이다. 이런 감사는 중심을 이동하면 된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은 중심이동이다.
오늘부터 나작지의 감사를 실천하여 보자. 나작지의 감사는 ‘나로부터, 작은 것부터, 지금부터’ 내가 먼저 감사하자. 어제의 감사가 아니고 내일의 감사도 아닌 오늘의 감사이다. 톨스토이의 인생에서 ‘3가지 질문’이란 단편 소설이 있다. 1.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2.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3.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가장 시간은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를 알기 원하는가? 감사의 척도를 제어 보아라.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신약성경은 27권이다. 신약성경을 구분하면 복음서 4권과 사도행전 그리고 서신서 21권과 계시록이다. 서신서는 바울서신 13권과 일반서신 8권으로 나눈다.
1. 바울서신
바울서신은 1차 전도 갈라디아서, 2차 전도 데살로니가전후서와 3차 전도 고린도전후서와 로마서 그리고 옥중서신인 빌립보서, 빌레몬서, 골로새서, 에베소서와 목회서신인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로 전부 13권이다. 바울이 편지를 쓴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있다. 첫째는 목회적인 목적에서였다. 바울이 교회에 증거한 복음을 교회에 다시 설명하고 가르쳐, 잘못된 교훈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으며, 참된 진리로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요, 둘째는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키고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변증하기 위함이다. 특별히 고린도후서 12장에 삼층천까지 갔다 온 일을 말하여 자기의 사도성을 방어하려고 했다. 변증이란 질문하는 사람에게는 대답해 주고, 공격하는 사람에게는 방어하는 것이다. 바울 서신은 편지 내용이 긴 것부터 차례로 배열되어 있다.
2. 목회서신
목회서신이란 목회자인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3권의 서신이다. 교회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며, 신자들은 어떻게 가르쳐야 하고, 거짓 가르침은 어떻게 막아내야 하는가를 말하면서도, 후배 목회자들에게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이 절절이 드러나 있는 서선이다. 내용을 목회서신서를 5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교회 직분자는 어떤 사람을 세워야 하는가, 둘째 이단에 대한 대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셋째 공적인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넷째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은 어떠해야 하는가, 다섯째 경건한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사도행전 6장에 7 집사를 세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을 세웠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성령이 일을 하게 해야 한다. 선교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선교를 성공했다고 해서 교만해서도 안 되고, 선교를 실패했다고 해서 절망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선교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다.
3. 디도서
디도서는 바울이 로마 1차 투옥에서 석방되고 나서 AD 66년경 마게도냐에서 기록한 것으로 추정한다. 바울을 대신하여 그레데 섬에서 목회하는 제자 디도에게 목회의 지침을 알리고자 쓴 글이다. 디도가 사역하는 그레데 교회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도덕적으로 타락하였고, 교리적으로 심각한 이단 사상의 공격을 받았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딛1:12-13절)
어떤 선지자란 그레데 출신으로 덕망이 높은 ‘에피메네데스’이다. 그레데 사람들에 의하여 존경을 받는 에피메네데스가 자기 민족을 향해서 한말이니 그레데의 영적, 도덕적 수준은 알만한다. 성경에 윤리적으로 부패하고 방탕한 사람들을 고린도 사람과 같다는 것과 같고, 마피아하면 시칠리아 섬을 연상하는 것과도 같이 크레데 사람하면 방탕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다. 오래전 아테네에서 민박을 하던 중 그레데에서 온 여학생을 만났다. 그레데에 대한 그녀의 인상은 성경에 나오는 그대로였다. 그레데에 도착하여 배낭을 풀고 수영하고 왔더니 배낭 안의 노트북을 누가 훔쳐갔다고 한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곳에서 디도가 목회를 했고, 바울은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고, 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으며, 성도들의 올바른 삶을 가르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오늘의 본문은 신앙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칭의와 성화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칭의는 거듭남, 중생, 구원, 영생과 같은 의미이고, 성화는 성결, 거룩과 같은 의미이다. 칭의는 성령세례로 인한 신분의 변화이고, 성화는 성령충만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에게까지 자라는 점진적인 변화이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간다. 그는 예수의 표적을 보고 하나님께서 보낸 선생임을 확신했다. 그를 본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니고데모는 이 나이에 모태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가 하면서 다시 질문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셨다. 거듭난다는 것은 Born Again이란 뜻도 있지만 Born Above라는 뜻이다. 예수를 믿고 성령세례를 받아 신분세탁을 한 것이다. “어둠의 자식이 빛의 자녀로, 죄인이 의인으로, 육에 속한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으로, 옛사람이 새사람으로, 겉 사람이 속사람으로”
1866년을 아시나요?
1866년은 병인년이다.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에게 중요한 해이다. 천주교 박해와 양요가 있었던 해이고,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해이다. 대원군은 1863년부터 1873년까지 아들인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했다. 중국은 제 2차 아편전쟁의 패배로 ‘베이징 조약'(1860년)을 맺게 된다. 전쟁 당사자도 아닌 러시아는 조약을 중재해주었다는 명목으로 중국에게 연해주를 할양 받고 조선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남하 정책을 펼치던 러시아가 조선을 위협하여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조선에서 선교하는 프랑스 신부와 협상하여 조.불.영 동맹을 체결하려고 했다. 프랑스 신부와의 만남이 지연되면서, 러시아는 특별한 이유 없이 물러갔다. 한편 대원군이 천주교와 내통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정치적 기반이 위태롭게 되자, 대원군은 초기의 천주교 ‘묵인정책’에서 ‘탄압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병인박해 (丙寅迫害, 1866년)
병인박해란? 1866년 병인년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를 말한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에서 9명이 처형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동안에 국내 천주교 신도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왜 조선이 천주교를 박해했을까? 당시의 교서를 보면 박해의 원인을 알 수 있다. “‘사교를 금지하는 교서’, ‘요즘의 서양인 사건은 참으로 일대변괴이다. 우리 백성들의 떳떳한 윤리를 파괴하고 우리나라의 풍습과 교화를 어지럽혔으니 천도로 용납할 바가 아니며 왕법으로도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다.’ ‘만약 이들을 숨겨주고 아뢰지 않다가 발각되었을 경우 결단코 응당 남김없이 코를 배어 죽여야 할 것이다.” 1866년 3월 10일 대왕대비 조씨. 박해의 원인은 조선사회의 근간인 유교사상을 천주교가 흔들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가 박해 받은 이유도 유사하다. 기독교는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계급사회에서 인간평등을 주장하고, 다신교 사회에서 유일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용어로 인하여 식인종, 근친상간 자들이라는 오해까지 받았다. 주후 64년 로마의 대화재로 황제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자, 네로가 희생양으로 기독교인을 지목하면서 본격적인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토마스 선교사 (1866년 9월)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이다. 1839년 9월 7일 목사인 Robert Thomas의 아들로 웨일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848부터 1884년까지 웨일즈 하노버 교회를 섬겼다. 토마스 선교사는 하노버(Hanover)에서 자라 런던 대학교 ‘뉴 컬리지'(New College)에서 공부를 마치고, 1863년 6월 4일 하노버 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는 언어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 도착하고 4개월 만에 중국어로 대화할 정도이다.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부인은 아이를 유산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실의에 빠진 토마스 선교사는 ‘런던 선교회’를 떠난다. 그는 1865년 1월-8월까지 청나라 세관 통역으로 근무하면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서 파송한 ‘윌리암슨'(Dr. Williamson) 선교사를 통해서 조선사람을 만나 조선을 품게 된다. 1865년 9월에 세관을 사임하고 ‘1차 조선선교여행’을 떠나 백령도 및 서해 도서에서 선교하고, 한양으로 가려고 했지만 폭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1866년 8월 9일 미국 무장상선인 ‘제너럴 셔만호’를 타고 ‘2차 조선선교여행’을 떠난다. 평양 감사인 박규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제네럴 셔만호’는 막무가내로 올라가다가 대동강에서 좌초된다. ‘제너럴 셔만호’는 불타고 토마스 선교사는 박춘권에 의해 참수 당한다. 대동강에 뿌려진 토마스 선교사의 피는 한반도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물들이는 초석이 되었다.
병인양요 (丙寅洋擾, 1866년 10월)
병인양요란? 병인년에 서양인(洋)들이 일으킨 ‘소요사태'(擾)라 하여 ‘병인양요’라 불린다. 병인박해 때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3명 중 한 사람인 ‘리델’ 신부는 청나라로 탈출해서 천진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다. 프랑스는 조선과 수교관계가 없는 점과 조선은 정치적 독립국가라는 점 등을 들어 프랑스정부의 직접 개입 없이 현지사령관인 로즈의 주재 하에 군사적 응징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차 원정은 탐사를 하고, 1866년 10월 11일 2차 원정은 로즈 제독이 직접 인솔하는 프랑스 군함 3척이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의 안내로 강화도를 침략한다. 프랑스는 어렵지 않게 10월 16일 강화도를 점령한다. 하지만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의 전투를 통하여 전세가 역전되자, 프랑스군은 철수하면서 외규장각 도서와 은괴 등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던 외규장각 도서들이 2011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반환이 아닌 대여란 명목으로 돌아 왔기에 불만은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루브르 박물관’의 수 많은 유물들은 전쟁을 통해서 약탈해 온 것들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유물이라며 절대로 돌려주지 않고 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