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과거에 묶인 삶, 미래를 향한 삶 (창세기 19:26, 히브리서 11:8)
인생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에 묶인 삶을 사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를 향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전자는 결정론자이고, 후자는 목적론자입니다. 결정론자는 과거 중심으로 닫힌 오늘을 살고, 목적론자는 미래 중심으로 열린 오늘을 삽니다. 결정론자는 인과론적 운명론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목적론자는 미래의 소망과 비전을 붙들고, 그 미래를 향하여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서로 다른 두 길을 걸은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롯의 아내와 아브라함입니다.
- 과거에 묶인 삶
창세기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때 천사들은 롯의 가족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1-32) 창세기 13장 10절에 소돔과 고모라성은 에덴 동산과 같고 애굽 땅과 같은 곳과 같았습니다. 롯의 처는 소돔에 많은 아쉬움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롯의 아내는 과거를 끊어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소돔의 익숙한 집, 재물, 인간적 추억에 묶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보다 과거의 삶을 더 소중히 여겼던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몸은 소돔을 빠져나왔지만 마음은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돌아본 것은 그녀가 포기할 수 없는 과거의 삶을 본 것입니다. 그녀는 과거에 발목 잡혀서 현재와 미래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청주에서 목회할 때에 아는 사관님이 찾아와서 김은려 사관에게 그림을 한장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바다로 항해하려는 배가 부두에 끈이 묶여 나가지 못하는 그림입니다. 과거의 끈에 묶여 미래의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영광이든 상처이든 과거를 묶여 있는 순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가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뒤만 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유독 과거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커피숍에서 ‘라떼’를 많이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때’의 이야기를 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조금 깊이 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면, 오늘의 삶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 미래를 향한 삶
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히브리서11장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갔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느니라”(히11:8). 아브라함은 알 수 없는 미래였지만,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목적을 붙들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목적론적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과거의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익숙한 것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미래를 향해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너를 통해 열방이 복을 얻을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의 현재를 이끌어 갔습니다.
목적론적 삶을 사는 사람은 과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듭니다. 환경이 아니라 비전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미래를 향해 걸어갑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책이 있습니다. 릭워렌 목사님이 쓴 책입니다. “당신은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그 목적을 따라 살아갈 때 진정한 의미와 만족을 누릴 수 있다.” 그 목적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 우리의 선택
인생은 과거에 의해 묶일 수도 있고, 미래의 비전에 의해 이끌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롯의 아내처럼 과거에 집착하여 소금기둥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미래로 나아갈 것입니까?
신앙은 본질적으로 미래 중심적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미래를 현재화하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입니다(빌 2:12). ‘하나님의 나라’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Already, but yet 입니다. 전도를 할 때 지금 죽으면 천국갈 수 있습니까? 질문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르겠는데요. 죽어봐야 알죠”라고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미래를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후회와 회개는 다릅니다. 후회는 과거지향적인 단어이고 회개는 미래지향적인 단어입니다.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파는 것과 배신한 것은 오십보 백보입니다. 이들은 차이는 유다는 후회하고 인생을 비관하고 자살을 했고, 베드로는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죄를 지어서 지옥가는게 아니라 회개하지 않아서 지옥갑니다.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과거의 상처, 실패, 영광, 익숙한 삶에 묶여 뒤를 돌아보며 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입니까?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 땅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애굽을 그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3:13-14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인생은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입니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고 달려야 합니다.
2025년 8월 31일, 오늘은 시드니의 역사적인 날입니다. 시드니에서 처음으로 국제 마라톤이 개최된 날입니다. 기존의 6대 메이저 마라톤(보스턴, 뉴욕, 시카고, 런던, 베를린, 도쿄)에 이어 시드니 마라톤이 세계 7대 마라톤으로 격상된 날입니다. 35000명이 참가 했고, 참가비는 250불입니다. 오늘 오전 6:30분에 시작해서 오후 3시 15분에 마감한다고 합니다.
역사적인 오늘,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힘차게 내일을 향하여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딤후 3:16, 요 14:26, 엡 6:17)
성경과 성령은 교회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한쪽 날개만으로는 하늘을 날 수 없듯이, 성경과 성령은 반드시 함께해야만 우리의 신앙이 균형 있게 자라고, 교회가 생명력 있게 세워질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돌아보아도, 성령 없는 말씀 운동은 차갑게 굳어 율법주의로 흐르고, 말씀 없는 성령 운동은 쉽게 신비주의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령은 언제나 하나로 역사하며, 이 둘이 조화를 이룰 때 교회와 성도는 비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경과 성령의 관계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나눌 때 여러분 모두에게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말씀의 영감(靈感) – 성령은 성경의 저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 3:16).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God-breathed, theopneustos)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숨결’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지혜로 기록된 문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감동하셔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의 책이 아니라, 성령의 저작물입니다. 베드로는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21)이라 증언했습니다.
성경은 약 1600년 동안 40여 명의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저자의 배경도 다양했습니다. 왕이었던 다윗, 목자였던 아모스, 어부였던 베드로, 의사였던 누가 등 오랜 시대와 다양한 환경 속에서 기록된 말씀이 하나의 이야기, 곧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한 작가의 작품도 전기, 중기, 후기의 작품이 다른데 어떻게 이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성령께서 성경의 참된 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서양문명의 기초입니다. 성경은 지금도 세계 최고의 베스트 셀러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성경을 읽습니다. 믿음을 가지려고 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벤허의 작가는 ‘루 윌리스’입니다. 그는 성경을 반박하기 위하여 성경을 읽다가 변화를 받고 ‘벤허’를 쓰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Testament 또는 Canon이라고 합니다. Testament는 언약이란 뜻이고, Canon은 잣대라는 뜻입니다. 구세군 11개 교리문 중 첫 번째는 ‘성서론’입니다. “우리는 신·구약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으며 성서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천의 표준임을 믿는다.” 성서만이 그리스도인의 내적신앙과 외적실천의 기준입니다.
지난 금요일 다니엘 1:8절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뜻을 정했습니다. 세상에는 3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기준이 되어 뜻을 정하는 사람은 이기주의자이고, 상황이 기준이 되어 뜻을 정하는 사람은 기회주의자이고, 성경이 기준이 되어 뜻을 정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나침반과 같습니다. 인생을 표류하지 않고 항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침반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천국으로 인도할 나침반은 가지고 계십니까? 성경은 우리가 어디서 왔으면,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가는 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입니다.
- 말씀의 조명(照明) – 성령은 말씀을 깨닫게 하심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고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로 성경에 요한복음에 4번(14:16,14:26,15:26,16:7), 요한일서(2:1)에 한번 나옵니다. 영어로 Helper, Counselor, Comforter, Advocate로 변역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기록하신 저자일 뿐 아니라, 지금도 그 말씀을 성도들의 마음에 조명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듣는 자세로 읽어야 합니다. “말씀하시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
절망과 공포에 잠겨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면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기쁨과 소망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습니다. 성령의 조명이 있을 때, 성경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사도행전 8장에 빌립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광야 길에서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됩니다. 내시는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읽고 있었고, 빌립은 그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임을 설명합니다. 복음을 들은 내시는 즉시 믿음을 고백하고, 물이 있는 곳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실 때,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깨달어지고, 그 말씀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말씀을 읽고 해석하는 일은 단순히 인간의 이성적 노력으로 끝날 수 없으며,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경 공부나 설교를 들을 때, 성령의 조명 없이는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말씀의 능력(能力) – 성령은 말씀을 살아 역사하게 하심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에베소서 6장에 하나님의 전신갑주인 6가지 무기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 의의 흉배, 진리의 허리띠, 평화의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그리고 성령의 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 불렀습니다. 5개의 무기는 방어용인데, 성령의 검은 유일한 공격용 무기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실 때 말씀이 살아 움직이며 영적 전쟁의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히 4:12)라고 증언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마른 뼈 골짜기의 환상(겔 37장)은 말씀과 성령의 연합된 역사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자 뼈들이 서로 연결되었지만, 생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아직 죽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바람(루아흐)이 들어가자 그 뼈들은 큰 군대로 일어섰습니다. 이것은 말씀과 성령이 함께할 때 죽은 자가 살아나고 교회가 부흥한다는 영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성령이 함께하실 때 말씀은 능력이 되어 죄인을 변화시키고, 상한 영혼을 회복시키며, 교회를 새롭게 합니다.
결론
성령은 말씀을 기록하셨고, 지금도 말씀을 조명하시며, 말씀을 통해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해야 하며 동시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말씀 없는 성령 사역은 신비주의로 흐르고, 성령 없는 말씀은 율법주의로 치우칩니다.
성령과 말씀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역사입니다. 성경은 성령과 함께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성도는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하며 동시에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성경과 함께, 성령과 함께,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흑조와 여인
시드니 올림픽 파크의 Bicentennial Park. 호수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흑조 한 쌍이 올해 봄에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그러나 자연은 언제나 냉정했다. 여섯 중 세 마리는 벌써 세상을 떠났고, 남은 세 마리 가운데 한 마리는 부리에 문제가 있어 먹이를 잘 먹지 못했다.
그 흑조 가족 곁에는 매일같이 찾아오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날마다 손에 작은 먹이를 들고 와, 조심스럽게 새끼들에게 다가갔다. 특히 부리에 문제가 있는 작은 새끼를 보며 안타까운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다른 새들이 재빠르게 먹이를 집어삼킬 때, 그 아이는 부리에 걸려 몇 번이나 놓치곤 했다. 그녀는 끝까지 기다려 주었고,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도록 먹이를 잘게 부수어 주었다.
오늘,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그녀가 흑조들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마치 오래된 친구를 돌보듯 흑조 가족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내게 흑조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 아이가… 잘 먹질 못해요. 매일 와서 지켜보는데, 혹시라도 굶어 죽을까 늘 걱정이에요. 조금 후에는 비 바람이 몰려 올 것 같은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애정과 근심이 묻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한 생명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깨달았다. 비록 자연의 법칙을 모두 바꿀 수는 없지만, 그 곁에 머물며 정성을 다하는 한 사람의 사랑은 분명히 작은 기적을 만들고 있었다.
그날 호수 위로 석양이 물들며, 흑조 가족은 그녀의 손길을 받으며 잠시나마 평화를 누렸다.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저 작은 흑조가 하루하루 무사히 자라기를, 그리고 그녀의 따뜻한 발걸음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흑조(Black Swan), 학명 Cygnus atratus,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대표하는 고니속의 물새로, 그 외형과 생태가 매우 독특하다.
흑조는 전신이 검은 깃털로 덮여 있으며, 날개 끝에만 흰색 깃이 살짝 드러나 있어 비행 시 매우 인상적인 대비를 보여준다. 부리는 선명한 붉은색 또는 오렌지색이며, 끝부분에는 흰색 띠가 있어 시각적으로 강한 인상을 준다. 몸무게는 약 9kg 정도로, 고니류 중에서도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이 새는 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호수나 습지에서 서식하며, 텃새로서 태어난 지역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둥지는 호숫가에 큰 둔덕을 만들어 짓고, 매년 같은 둥지를 고쳐가며 사용한다. 수컷과 암컷이 교대로 알을 품는 등, 짝짓기와 육아에 있어 협력적인 성향을 보인다. 생태적으로는 일부 계절 이동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개체는 정착 생활을 한다.
흑조는 1697년에야 유럽 탐험가에 의해 처음 알려졌으며, 그 전까지는 백조만 존재한다고 믿었던 서구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흑조’는 이후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나 기존의 믿음을 뒤엎는 상징으로 철학과 경제학에서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수명은 일반적으로 20~30년 정도이며, 보호 환경에서는 더 오래 살기도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1974년부터 법적으로 보호받는 종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의 상징 새로도 채택되어 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