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대림절의 3가지 의미 (빌 2:6-8)
오늘은 1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이제 2025년도 한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 엉뚱한 질문인 것 같은데, 새해는 언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해를 중심으로 하면 양력 1월 1일이고, 달을 중심으로 하면 음력 설날인 2월 17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면 오늘이 2026년 새해의 첫날입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대림절의 첫 주일인 오늘이 새해의 첫날입니다.
대림절(Advent)은 성탄절 전 4주간을 의미합니다. 대림절은 초림의 주님을 기념하며 감사하고, 재림의 주님을 소망하며 기다리고, 오늘 우리의 삶을 준비하며 정돈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이 세 가지 축을 따라, 대림절이 우리 신앙과 교회 공동체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 초림의 예수님을 기념
대림절의 ‘기념’은 단순히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떠올리는 과거 회상이 아닙니다. 그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 가운데 행하신 은혜를 기억하며,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기념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대림절 동안 성탄의 이야기를 읽고, 찬양하고, 나누며, 이미 베풀어진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새롭게 고백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 음식과 음료, 우리의 관계와 성취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생을 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감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노력해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누구에게 감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인생을 선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받은 것이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알파크루시스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의 일입니다. 가르치는 신학교 학생의 부모님이 제주도에서 감귤을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카톡에 부모님이 귤을 판매한다는 광고가 올라왔습니다. 신학생도 돕고, 한국에 계신 은퇴 사관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겸 귤을 주문해서 익명으로 보냈습니다. 귤을 받은 사관님들은 누가 보냈는지를 몰라 발송한 제주도로 연락을 하고, 다시 시드니에 사는 아들에게 연락을 하는 번거로움이 생겼습니다. 그 다음해 부터는 제이름으로 귤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보냈다는 것을 알고 많은 사관님들이 카톡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올해는 모르는 분에게서 뜻밖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김환기 사관님!! 저는 고 박달용 사관님의 막내아들입니다. 많은 분들의 기도, 도움, 위로 덕에 아버님은 먼저 하늘나라에 가신 어머니 묘지에 함께 축복 속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3년 전부터 치매가 시작되었고, 결국 91세에 노환으로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에게 물려주신 재산은 없지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시고 떠나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구세군 사관으로 불타는 선교의 열정과 섬김의 사역을 46년간 한국과 미국에서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장 자주 인용하신 성경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사도바울의 간증처럼 “오직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부모의 은혜로 있게 됨을 감사드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집의 家訓으로는 “믿음, 소망, 사랑, 감사”를 실천행동으로 강조하셨습니다. 뜻밖의 귤 선물을 받고 감사했습니다. 축복합니다! 박세혁 드림”
저는 박사관님이 소천하신지도 모르고 귤을 보낸 것입니다. 사관님의 막내 아들은 귤을 받고 제주도에서 귤을 보낸 분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그 분은 다시 시드니에 사는 아들에게 보내고, 그 아들은 다시 저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에게 감사를 배우고 그 감사를 표현하며 사는, 박세혁씨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탈무드에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모든 것을 통해서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 재림의 예수님을 소망
대림절은 동시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소망의 절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망은 단순한 낙관주의나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바람이 아닙니다. 소망은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에 뿌리를 둔 믿음의 확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하셨기에,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미리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절)” 여기서 착한 일은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와 믿음의 삶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신앙의 출발이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 완성 역시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실 일이라는 확신을 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의미하며,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을 붙들고 완성해 가신다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는 이 소망을 붙들고, 어두운 세상 한가운데서 빛을 증거하는 공동체로 살아갑니다. 이 소망은 고난 중에도 우리를 붙들어 주는 힘이 되며, 포기하고 싶을 때 다시 일어나게 만드는 내적 에너지가 됩니다. 베드로전서에는 ‘산 소망’(벧전 1:3)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큰 물고기라도 죽었으면 현실의 물결에 쓸려 가지만, 작은 고기라도 살아 있으면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과 소망 없이 사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라나타’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마라나타”라는 말은 아람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서, ‘주님, 오시옵소서’ 혹은 ‘우리 주님께서 오셨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박해와 고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며 사용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믿음과 소망, 인내를 담아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고백으로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성경에서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등장하며,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기도와도 연결됩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20세기 신학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흔히 ‘희망의 신학자’라고 불리십니다. 그는 희망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현재를 변화시키는 미래의 에너지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를 만드는 것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내일의 희망’입니다. 희망은 미래적인 것인 동시에 철저히 현재적인 것입니다.
- 오늘 우리의 삶을 준비
대림절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준비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하나님 앞에 다시 정돈하는 영적 준비를 뜻합니다. 준비란 행동 없는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 사랑의 실천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마 3:3)고 외쳤습니다. 대림절의 준비는 바로 이 외침을 오늘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는 시간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종말장이고, 마태복음 25장은 심판장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세 가지 비유(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는 심판의 기준을 보여줍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종말을 맞이하는 데 있어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등불과 기름은 믿음과 성령, 혹은 준비된 삶을 상징합니다. 신앙은 단순히 시작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깨어 있는 자세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깨어 있으라”는 메시지를 통해 준비된 신앙인의 삶을 강조합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맡기신 은사와 사명을 어떻게 사용했는지가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달란트는 은혜와 책임을 의미하며, 받은 것을 두려움 속에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열매를 맺는 충성이 요구됩니다. 심판은 단순히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맡겨진 것을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달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는 최종 심판의 기준이 사랑의 실천임을 드러냅니다. 양은 작은 자에게 사랑을 베푼 자를, 염소는 무관심하거나 외면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신앙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의 구체적 행위로 드러난다고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신앙이 단순한 고백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적인 사랑의 행동으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합니다.
대림절을 상징하는 4개의 촛불이 있습니다. 첫째 초는 희망, 둘째 초는 평화, 셋째 초는 기쁨, 넷째 초는 사랑입니다. 촛불은 작지만, 어둠을 이깁니다. 우리의 삶이 작고 연약해 보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이미 어둠을 이기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다같이 일어서서 우리 이렇게 고백합니다.
- 절망 대신 희망을 선택하겠습니다.
- 갈등과 미움 대신 평화를 선택하겠습니다.
-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기쁨을 붙들겠습니다.
- 무엇보다 사랑으로 살겠습니다.

하나님께는 영광, 땅에는 평화, 사람에게는 은총 (눅 2:8-14)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림절(Advent)은 성탄절 전 4주간을 의미합니다. 지난주 대림절은 2000년 전에 오신 초림의 예수님을 기념하고,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소망하며, 오늘의 우리의 삶을 준비하는 때라고 했습니다.
새해는 해를 중심으로 하면 양력 1월 1일이고, 달을 중심으로 하면 음력 설날인 2월 17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면 대림절의 첫 주일이 새해의 첫날입니다. 따라서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2026년 1월 8일입니다.
대림절을 상징하는 4개 초가 있습니다.
1주차 보라색의 소망의 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소망을 상징합니다. 예언과 약속을 믿고 바라보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2주차 보라색의 평화의 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샬롬, 하나님과의 화해와 관계 회복을 의미합니다. 공동체 속 화해와 정의의 평화를 지향합니다.
3주차 분홍색의 기쁨의 초입니다. 성탄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환희의 주간입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이 삶을 밝히는 내적 기쁨을 상징합니다.
4주차 보라색의 사랑의 초입니다. 섬김과 자비로 드러나는 실천적 사랑을 강조합니다.
성탄절에 점화하는 중앙의 하얀색의 ‘그리스도의 초’가 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합니다. 구원과 생명의 빛, 성탄의 완성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두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동방 박사들이 별을 따라와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황금, 유향, 몰약을 드립니다. 누가복음에는 한 밤중에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소식을 전해줍니다.
요한은 성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육신(Incarnation)’의 사건입니다.
인도의 성자였던 ‘썬 다싱’은 성육신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양이 목자를 떠나서 낭떠러지로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목자가 양에게 접근하면 양은 접근한 만큼 낭떠러지 더 가까이로 도망갔습니다. 목자는 양을 구하기 위하여 양을 가죽을 쓰고 접근하여 데리고 올 수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에 가면 ‘목자들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교회 입구에는 청동으로 만든 천사가 날개를 펴고 있고, 교회안의 제단 뒤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그린 벽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14절에 수많은 천사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은혜(χάρις)는 일반적인 호의나 은혜를 뜻하지만, 은총(χαριτόω)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채워주신 은혜”를 강조하는 더 강한 표현입니다. 은혜를 상황에 따라 은총이라고도 번역을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께는 영광, 땅에는 평화, 그리고 사람에게는 은총’이란 3 대지로 나누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께는 영광
예수님의 탄생 소식 앞에서 천사들이 제일 먼저 선포한 것은 ‘사람에게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눅 2:14)라는 이 고백은 성탄의 출발점이자 복음의 방향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기쁨, 우리의 필요, 우리의 소망보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몰약과 유황을 가지고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베들레헴 들판의 목동들은 천사의 소식을 듣고 곧바로 아기 예수를 찾아가 경배했습니다.
인간의 존재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7절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서 비롯되며, 우리의 목적은 그분을 즐거워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내가 잘되고 못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이 나타나면 성공한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면 실패한 삶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이를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고백은 단순한 교리적 선언이 아니라, 인간 삶의 방향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의 삶의 모든 순간, 가장 평범한 일상조차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먹고 마시는 행위처럼 사소해 보이는 것조차 하나님을 향한 목적을 지닐 때,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됩니다.
결국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억압이나 의무가 아니라, 참된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동시에 그분 안에서 영원한 즐거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이며, 모든 삶의 중심이고, 창조의 질서입니다.
땅에는 평화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 다투지 않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로 ‘샬롬’이라 불리는 이 평화는 삶이 온전히 제 자리를 찾아가고,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며,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서 존재 전체가 안식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두 종류의 평화가 있습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군사력과 정치적 지배로 유지된 외적 평화이고,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은혜, 진리 안에서 누리는 내적이고 영적인 평강입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역사적으로 로마 제국이 군사력과 정치적 지배를 통해 억지로 유지한 외적 안정이었습니다. 전쟁을 잠시 멈추게 하고, 도로와 제도를 정비하여 제국의 질서를 유지했지만, 그 기반은 힘과 권력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Pax Romana는 언제든지 권력의 균형이 깨지면 무너질 수 있는 불안정한 평화였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는 전혀 다른 차원의 평화입니다. 그것은 외적 상황이나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 비롯되는 내적이고 영적인 평강입니다. 은혜와 진리 안에서 누리는 이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의 마음과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힘을 가집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요 14:27)는 선언은 Pax Christi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Pax Romana는 힘으로 유지되는 평화이고, Pax Christi는 사랑과 은혜로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참된 평강을 경험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 첫번째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첫번째 하신 말씀은 ‘평안’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떠날 때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평안하냐” 하시며, 이어서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 28:9-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첫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요 20:19).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습니다. 환경은 여전히 불안정할 수 있습니다. 삶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릴 때, 마음 깊은 곳에서 흔들리지 않는 샬롬이 흘러나옵니다. 폭풍 가운데서도 주무시던 예수님처럼, 세상의 풍랑 한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사람에게는 은총
천사들의 찬양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그냥 “땅에는 평화로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점입니다. 평화는 막연히 모든 사람에게 자동으로 임하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우리 가운데 나 같은 죄인은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은혜는 자격없는 자에게 조건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 North Head의 Barracks에 취재하러 갔습니다. 원래 노스 헤드(North Head)는 포병 기지(artillery base)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곳은 해안 포대의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이곳은 포병 학교(School of Artillery)로 사용되었다. 야포, 해안포, 대공포, 대전차포, 박격포 등 다양한 포병 교육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부대가 이전하면서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오늘날에는 다시 시민에게 열린 역사 공간으로 서 있게 되었습니다.
가이드는 ‘빌’이었습니다. 전직 교사였습니다. 투어를 신청한 사람이 저와 크리스천리뷰 권사님만 있어서 투어를 마친 뒤, 우리는 빌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크리스천이신가요?”
빌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성공회(Anglican Church)에 다녔다고 했다. 성공회 안에서 소위 ‘거듭난’ 기독교인의 경험을 했고, 한때는 신앙이 삶의 중심이었던 시절도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아내는 영국인이고, 지금은 이혼한 상태입니다. 전 부인과 두 자녀는 영국에 살고, 또 다른 한 자녀는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스코틀랜드를 방문하여 영국에 있는 아이들을 만났고, 성 콜롬바(St. Columba)가 머물던 아이오나(Iona) 섬을 방문하여 많은 은혜도 받았습니다. 아이오나는 오늘날에도 ‘켈트 기독교의 요람’으로 불리며, 성 콜롬바의 발자취를 따라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성지입니다.
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이제는 예전과는 다른 길 위에 서 있다고 했습니다. 성공회 안에서 받은 신앙의 유산을 고마워하면서도, 그 안에서 ‘죄’에 대한 강조가 너무 강했다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직면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죄의식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는 고백했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날 즈음 주문한 음식이 식탁 위에 놓였습니다. 나는 빌에게 “식사 전에, 잠깐 기도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조금 놀란 듯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짧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 기도했습니다. 죄책감과 자기 비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 되게 해 달라는 간청도 함께 올려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은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며, 구원이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바울은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말하며, 인간의 자랑과 공로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산상수훈에서 8복의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니라.”
헬라어로 보면 순서가 다릅니다. 8복의 마음을 가진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이 있는 자가 8복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이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기쁨, 우리의 필요, 우리의 소망보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이 주는 조건적이고 외적인 평화에 우리의 마음을 뺏기지 말고,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시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성탄의 계절,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로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린튼 가문의 4대 선교 계보
“언더우드가가 연세대라면, 린튼가는 한남대”라는 말처럼, 한국 근대사와 선교사역에 깊은 흔적을 남긴 가문입니다.
-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 – 1대
그는 1895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전라도 땅을 밟았다. 복음은 학교와 교회, 곧 일상의 삶 속에서 자라난다는 확신으로 목포와 군산 일대에 교회를 세우고 정명학교·영흥학교 같은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지역 공동체의 문해와 신앙을 함께 일으켰다. 그의 사역은 단지 전도에 머물지 않고, 가난과 질병, 문맹과 차별이라는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 사회적 복음의 실천이었다. 딸 샬럿 벨이 훗날 윌리엄 린턴과 결혼하면서, 그의 헌신은 가문의 역사로 이어져 한 세대의 열정이 다음 세대의 소명으로 전수되었다. 유진 벨의 뿌리내림은 한국 땅에서 “복음은 사람과 마을을 동시에 새롭게 한다”는 선교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 윌리엄 린턴(William Linton, 인돈) – 2대
그는 장인이 남긴 길을 이어 1910년대 전라도에서 교육과 신앙의 두 축을 세웠다. 군산·전주 일대에서 영명·신흥·기전 등 학교를 맡아 학생들에게 지식과 양심을 함께 가르쳤고,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3·1 만세운동을 뒷받침하며 “신앙은 정의에 침묵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행동으로 증언했다. 신사참배 강요 앞에서 학교를 자진 폐교할 만큼 원칙을 지킨 그의 선택은 교육을 넘어선 예언자적 저항이었다. 해방 이후 그는 대학 설립 등으로 교육의 기반을 넓히며, 지역 교회와 사회가 서로 지탱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의 생애는 ‘복음의 양심’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제도와 공동체를 변화시키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 휴 매킨타이어 린턴(Hugh MacIntyre Linton, 인휴) – 3대
그는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나 한국을 ‘고향’으로 기억했다. 1953년부터 순천과 전라 일대에서 농촌 교회 개척, 결핵 요양소와 병원 협력 등 의료선교에 몰두하며, 가난과 병으로 고통받는 이웃 곁에 머무는 것이 복음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그의 사역은 설교보다 치료, 계획보다 동행에 가까웠다. 아내와 함께 다자녀를 양육하면서도, 집은 늘 환자와 이웃에게 열린 쉼터였고, 자녀들은 그 일상 속에서 ‘섬김’을 생활의 언어로 배웠다. 1984년 소천하기까지 그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그리스도 안의 위로가 사람을 일으킨다”는 디모데후서의 약속을 자신의 몸으로 써 내려갔다.
- 인요한(John Alderman Linton)·인세반(Stephen Win Linton) – 4대
형제는 각자 다른 길로 같은 복음의 심장을 이어간다. 인요한은 응급의학과 공중보건의 관점에서 한국형 구급차와 이송체계를 발전시키며, 병원 밖 일상의 현장에서 생명을 지키는 구조를 복음의 섬김으로 해석했다. 그는 국제진료와 정책 현장을 오가며 “의료는 속도와 신뢰”라는 신념으로 제도와 시민을 잇는 다리를 놓았다. 인세반은 북한 결핵 퇴치에 힘을 쏟아, 치료 접근성이 낮은 곳에서 꾸준한 지원과 병원 설립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곳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지속했다. 두 사람의 길은 서로 달라도, 고통의 현장으로 걸어 들어가 구조를 만들고 사람을 살리는 한 가지 고백으로 만난다. 그들의 세대에서 린턴 가문은 한국의 남과 북, 병원과 거리, 제도와 공동체를 가로질러 복음의 섬김을 현재형으로 확장했다.

셔우드 홀
이 가족은 단순한 선교사가 아니라, 한국 근대 의료·교육·복지의 초석을 놓은 인물들입니다.
윌리엄 제임스 홀 (William James Hall, 1860–1894)
그는 캐나다 출신의 의료선교사로 1891년에 조선에 들어와 평양에서 감리교 선교의 의료 기반을 닦았습니다.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중 로제타 셔우드를 만나 결혼했고, 조선에서는 병원·학교·교회를 함께 세우며 복음과 근대 의료를 병행하는 사역을 펼쳤습니다. 청일전쟁의 참혹한 현장에서 부상자들을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다가 전염병으로 순직했으며, 그의 헌신은 이후 ‘홀기념병원(기홀병원)’로 이어져 지역 사회의 치유와 교육을 지속시키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은 고통의 한복판에서 몸으로 증언된다”는 신념을 삶으로 남긴 인물이었습니다.
로제타 셔우드 홀 (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그녀는 미국 출신의 여의사이자 교육자, 의료선교사로 1890년에 내한하여 조선 여성의 의료교육에 선구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화학당 학생들에게 의학 지식을 가르치며 여성들이 의료현장에 서도록 길을 열었고, 보구여관의 2대 원장으로서 근대 병원 운영과 여성·아동 의료에 앞장섰습니다. 평양에서 맹아(시각·청각장애) 학교를 설립하고 한글 점자의 개발·보급에 힘쓰는 등 특수교육에도 헌신하여 배움의 문을 넓혔습니다. 남편 윌리엄의 순직 이후에도 수십 년간 조선에 남아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의료·교육 사역을 지속했으며, “은혜는 약한 이들을 일으키는 기술과 교육으로 구현된다”는 확신을 남겼습니다.
메리언 홀 (Marion Hall)
사진 속 ‘메리언(마리안) 홀’은 셔우드 홀의 배우자로 알려진 마리안 홀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녀는 간호와 보건교육 분야에서 셔우드와 협력하며 결핵퇴치 운동을 조선 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실’(결핵퇴치 모금우표)의 발행·보급과 대중 캠페인, 모자보건 교육 등에서 실무와 조직을 이끌며 공중보건의 기반을 넓혔습니다. 일제 강점기 말 선교사 추방과 전쟁 등 격변의 시기에도 사역지를 옮겨가며 의료·교육 활동을 이어가, 릴레이처럼 가문의 헌신을 다음 현장으로 이어준 인물로 평가됩니다.
셔우드 홀 (Sherwood Hall, 1893–1991)
그는 윌리엄과 로제타의 아들로, 부모의 선교 정신을 의료·복지 현장에서 구체화한 인물입니다. 국내 최초 수준의 결핵요양병원을 설립하고, ‘크리스마스 실’ 발행을 통해 대중 참여형 결핵퇴치 재원을 마련하여 공중보건 운동을 사회적 운동으로 확장했습니다. 병원 운영과 지역 클리닉 네트워크, 환자 교육을 결합해 예방·치료·재활을 잇는 체계를 구축하려 했고, 일제의 통제와 전쟁, 추방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사역지를 전환하며 일을 지속했습니다. 그는 “질병과 가난의 구조를 바꾸는 공공의 참여”를 선교의 핵심으로 보았고, 의료와 사회운동을 연결하여 한국 결핵퇴치의 상징적 족적을 남겼습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