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선교는 순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16:18)는 말씀은 사도행전 2장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임할 때 이루어지고,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인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사도행전 8:1절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로 이루어진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사도행전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1-7장), 온 유다와 사마리아(8-12장), 땅 끝(13-2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한계시록도 1장 19절의“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있는 일을 기록하라”는 말씀 속에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 네 본 것(1장), 이제 있는 일(2-3), 장차 있을 일(4-22)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권능 (Power, δύναμιν)
권능은 영어로 ‘Power’이고, ‘헬라어’로 ‘듀나미스’이다. 이 단어에서 ‘dynamite’가 나왔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고 했다. 여기서 능력도 ‘듀나미스’이다. 디모데는 나이가 어린 목회자여서 여러 도전에 노출되어 있었다. 더구나 육체적으로도 연약했다.(딤전 5:23) 하지만 성령이 임하면 다이너마이트처럼 강력하고 폭발적인 능력이 나타난다.
다이너마이트는 ‘알프레드 노벨’이 만들었습니다. 노벨은 스웨덴의 발명가이자 화학자이다. 그는 인류의 발전을 위하여 만들었는데, 전쟁에 사용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것을 후회했다. 그는 죽기 전에 전 재산을 털어 인류 복지에 기여한 사람에게 상을 줄 것을 유언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것이 노벨상 (Nobel Prize)이다.
2020년 여름 세계가 코로나 블루에 빠져 있을 때, 방탄소년단 (BTS)은 ‘Dynamite’를 발표하여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었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빌보드 차드에 당당하게 1위로 등극하였다. BTS는 빌보드 차트에서 처음으로 정상을 차지하는 한국 가수가 되었다. 2012년 세계를 들썩이게 했고,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강남스타일’도 7주 연속 2위를 기록했지만,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다. BTS는 코로나 사태로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우울증을 ‘Dynamite’로 날려버렸다.
2) 증인 (Witnesses, μάρτυς)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선교’이고, 교회가 세상을 닮아가는 것은 ‘세속화’이다. 초대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어 핍박을 받았고, 현대교회는 세상을 닮아서 비난을 받고 있다. 비난은 희망의 다른 표현이다. 교회만큼은 세상과 달라야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비난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생명 공동체이다.
‘증인’이란 단어인 헬라어 ‘마르투스’는 영어의 ‘순교자’이다. 개인의 신앙을 지키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증인이 되겠다는 것은 순교하겠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순교란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행동’ ‘신앙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는 일’을 의미한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삶에 대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고 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세워져, 순교자의 피를 통해 성장한다.
3) 교회 (Church, ἐκκλεσία)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를 세 종류로 분리할 수 있다. 모이는 교회인 ‘에클레시아’, 흩어지는 교회인 ‘디아스포라’, 임하는 교회인 ‘바실레이아’이다. 에클레시아가 방주의 역할을 한다면, 디아스포라는 구조선의 역할을 하고, 바실레이아는 흩어진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교회이다. 에클레시아는 복음서에 마태복음 16:18절과 18:17절에 단 두 번 언급된 반면 하나님의 나라는 80여 차례나 나온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며 첫 말씀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이다. 산상수훈의 팔복의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지막 여덟 번째 복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통치와 주권의 개념이다. 하나님이 주인 된 곳은 그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이다. 에클레시아가 방주의 역할을 한다면, 디아스포라는 구조선의 역할을 하고, 바실레이아는 흩어진 교회를 통해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교회는 모이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흩어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모였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호사탐탐 기회를 엿보는 사탄 (눅 4:13-15)
지난 목요일 예수전도단 (YWAM)에서 설교를 부탁 받았다. 영어로 설교할 정도의 실력이 안 된다고 사양했다. 하 목사는 통역을 쓰면 된다며 다시 부탁을 했다. 통역을 쓰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영어로 하자니 걱정이 되었다. 고민하고 있는 중에, 다시 카톡이 왔다. “그래도 사관님은 실력이 빵빵하니 영어로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말에 힘을 얻어 영어로 설교하게 되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예배 인도자는 누가복음 4:13-15의 말씀을 묵상하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예배의 문을 열었다. 묵상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오늘의 본문으로 택하였다.
누가복음 4:13-15의 말씀을 의지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사탄’의 제목으로 피차간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호시탐탐 (虎視耽耽)이란 굶주린 호랑이가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 날카로운 눈빛으로 형세를 바라보며 기회를 노린다는 뜻이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표현이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8)
1) 시험 (Temptation)
누가복음 4장과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이 시험받는 장면이 나온다. 누가복음과의 차이가 있다면 순서가 다르다. 마태복음은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 ‘산에서 나를 경배하라’이고, 누가복음에는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와 ‘산에서 나를 경배하라’의 순서이다. 신약성경에 시험을 뜻하는 두 종류의 헬라어 단어가 있다. ‘페이라조’와 ‘도키마조’이다. ‘페이라조’는 유혹을 뜻하는 시험 (Temptation)이다. 이 시험은 우리를 파괴시키고 멸망시키려는 사탄의 궤계이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약 1:13) ‘도키마조’는 성숙을 위한 시험(Test, Trial)이다. 연단의 과정을 거쳐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갖게 하는 시험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 23:10)
시험을 받기 전에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1, 22)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시에 임재하고 있는 자리이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셨다. 사탄은 바로 이 말씀으로 근거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증명하여 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쳤다. 모두가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신 8:3),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신 6:16),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신 6:13)
시험을 받을 때는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Temptation은 내적 욕망에서 오고, Test는 외적 환경에서 온다. Temptation은 대적해야 하고, Test는 통과해야한다. 아담과 이브는 욕망으로 Temptation에게 졌고,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Temptation을 이기셨다.
2) 잠시 (Until an opportune time)
개역개정 성경의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눅 4:13)을 공동번역에는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악마는 이렇게 여러 가지로 유혹해 본 끝에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다.” 사탄은 영원히 떠난 것이 아니라 다음 기회를 엿보며 호시탐탐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가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자 다시 온 집으로 돌아가 보니 예전보다 더 환경이 좋아진 것을 보고 저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니니 예전보다 상태가 더 심해 졌다. (마 12:43-45)
사탄은 ‘대적자, 유혹자, 살인자, 거짓말쟁이, 이간질하는 자, 고소하는 자, 시험하는 자 (마 4:3)’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탄은 거짓말로 이간질하여 아군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하여 스스로 멸망하게 한다. 사탄의 꾐에 빠져 아군을 적군으로 오인하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주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의 적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이며, 사람이 아니고 사탄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기에 혈과 육으로 이길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구원의 투구, 의의 흉배, 진리의 허리띠,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중 5개는 방어용 무기이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만이 공격용 무기이다.
한글성경은 악한 영들의 존재를 ‘사탄’ ‘마귀’ ‘귀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탄’은 히브리어이고, ‘마귀’는 히브리어인 ‘사탄’의 뜻을 헬라어로 번역한 ‘디아볼로’ (διαβ λλω)이다. 마귀와 사탄과의 관계는 요한계시록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 (계 12:9)라고 말씀한다. 사탄과 마귀는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귀신’과는 다르다. 귀신은 헬라어로 다이몬 (δαιμων)인데 여기서 영어의 ‘demon’ (악령)이 나왔다. 성경은 ‘사탄’과 ‘마귀’를 단수로 기록하고 있지만 ‘귀신’은 단수와 복수로 모두 사용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인 지역에서 귀신을 쫓아냈을 때 많은 귀신이 귀신들렸던 사람에게서 나와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 들어가기도 했다. (막 5:13) 예수님께서 ‘마귀와 그 사자들’ (마 25:41)이라고 언급하신 것과 성경의 여러 본문을 고려할 때 ‘귀신’은 ‘사탄’ 혹은 ‘마귀’가 부리고 있는 낮은 등급의 악한 영들이라고 할 수 있다.
3) 성령 (the power of the Spirit)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였고 (눅 3:21, 22),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에게 시험받으시고 (눅 4:1), 성령의 권능으로 사역을 시작하셨다. (눅 4:14) 누가는 성령에 대하여 누구보다 많이 강조하였다. 산상수훈 중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11)와 비슷한 유사한 말씀이 누가복음에도 있다. 마태가 ‘좋은 것’이라고 했는데, 누가는 구체적으로 ‘성령’이라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3) 누가복음의 후속편인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른다.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고 땅 끝까지 증인이 되어 흩어졌다. 능력은 헬라어 ‘듀나미스’이고, 영어로 ‘Dynamite’이다. 선교의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교회는 선교의 도구이자 선교의 결과이다.
우리는 계속하여 다양한 시험에 직면한다. 만약 사탄에게서 온 것이라면 말씀으로 물리쳐야 하고, 하나님께서 온 것이라면 통과해서 정금과 같은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사탄의 시험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호시탐탐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이 되어야 한다.
시드니 두레장로교회 권면사
– 2021년 5월 30일 오후 3시 시드니 두레장로교회 권면사
오늘 시드니 두레장로교회 3대 담임목사로 취임하는 임의순 목사님을 축복하며 축하드립니다. 시드니에서 먼저 목회를 하는 사람으로서, 시드니에서 목회를 시작하는 임 목사님에게 권면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민목회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렵습니다. 이민 목회가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어느 농부가 고랑을 치려고 하는데 도대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때려고 안 되고 달래도 안 되고 난감하여 어쩔 주를 모르고 있는데, 길을 가던 행인이 자기가 한번 움직여 보겠다고 하고, 소 귀에 대고 뭐라고 뭐라고 하니 소가 눈물을 흘리면서 고랑을 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너무 신기해서 농부가 행인에게 무슨 말을 했냐고 물어봤습니다. 행인은 웃으며 “별다른 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너 나랑 같이 이민목회할래, 아니면 고랑 칠래”라고 했습니다. 이민 교회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어느 목사님은 이민 목회는 특수 목회이기에 10년이 지나면 박사학위를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임 목사님은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 10년 지나서 이민신학 박사학위까지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이민 목회에서 꼭 필요한 두개의 단어를 말씀드리며 권면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연합
교회는 Organization이 아니라 Organism입니다. Organism은 유기체이고, Organization은 조직체입니다. Organism은 살아 있는 생명공동체이기에 지체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곳이 아프면 다른 곳도 아프고, 한곳이 영광을 받으면 다른 곳도 같이 영광을 받습니다. 교회란 개 교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두레교회는 공간적으로 시드니의 던다스에 있지만 나머지 교회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교회는 경쟁자가 아니라 형제이고 자매이고 지체입니다.
오래전 이동원 목사님께서 시드니 목회자 세미나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워싱턴에서 목회할 때 옆 교회는 부흥하는데 본인 교회는 정체되어 많은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아무리 기도를 해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주님, 옆에 교회도 부흥하게 하여 주시기, 우리 교회도 부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바꾸었답니다. 심지어 옆에 교회를 위해서 건축헌금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하였답니다.
경계
바운더리는 물리적 혹은 공간적인 경계, 영역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사용하는 ‘Social Distance’를 의미합니다. 심리적 바운더리도 있습니다.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건강한 바운더리를 가진 사람은 자기보호와 상호관계가 조화를 이루지만, 건강하지 못한 바운더리를 가진 사람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아니며 둘 다 제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혼자 서지 못하는 사람은 함께도 서지 못합니다. 개인 바운더리를 통해 자기만의 공간 (emotional space)이 생기고, 이 정서공간을 통하여 타인과의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바운더리는 타인의 삶을 통제하려 하거나, 자기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 사람 등에게 적용되는 용어입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타인에게 하는 나의 행동의 경계와 타인이 나에게 하는 행동의 경계가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적으로 타인의 경계를 침범해서도 안 되지만, 반대로 스스로의 자율성을 포기하여 타인에게 통제 당해서도 안 됩니다.
3대 두레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신 것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리며 축복합니다. 두레 교회가 시드니의 많은 교회 중에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 1대와 2대 목사님의 뜻을 교훈 삼고, 14년 전에 이곳에 두레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대로, 이 시대 이 지역에서 꼭 필요한 교회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