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신앙의 우선순위를 리셋하자(요 15:4-5)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주님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사역은 많아졌지만 사랑은 식어지고, 열매를 기대하지만 주님 안에 거함이 없고, 주님이 중심이라고 하지만 자기가 중심된 삶을 삽니다.
우리의 신앙이 건강하려면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15:4-5절의 말씀을 의지해서 ‘신앙의 우선순위를 리셋하자’라는 제목으로 피차간에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사역보다 사랑입니다.
사랑이 사역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역은 겉으로는 바빠 보이고, 열심 있어 보이고, 헌신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어느 순간 사역은 무거운 짐이 됩니다. 기쁨으로 시작한 일이 의무가 되고, 감사로 시작한 섬김이 불평이 되며, 은혜로 시작한 헌신이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합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깊이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훌륭한 사역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칭찬받는 봉사일 수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헌신적인 삶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했는지보다,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를 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보다, 그 안에 사랑이 있었는지를 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셨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큰소리쳤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자신감은 무너졌고, 사명도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묻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야, 앞으로는 더 열심히 할 수 있겠느냐?” “베드로야,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느냐?” “베드로야, 네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보여 줄 수 있겠느냐?” 주님이 물으신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이 사역의 시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가. 주님을 향한 첫사랑이 아직 살아 있는가.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의 중심에 있는가.
우리가 주님을 처음 믿을 때 그 첫사랑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베드로의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사랑입니다. 그 다음이 사역입니다.
먼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그 사랑에서 양을 먹이는 사역이 흘러나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사역이 사랑을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분주함이 친밀함을 빼앗아 가서는 안 됩니다. 봉사가 예배를 밀어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다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사역이 사랑에서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섬김이 사랑으로 따뜻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말과 손길과 눈물이 주님의 사랑을 담아내기를 바랍니다.
사역보다 사랑입니다. 사랑이 사역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열매보다 거함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시고 우리를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매우 단순하지만 깊습니다. 가지에 열매가 맺지만, 가지가 열매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나무입니다. 가지가 할 일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생명이 흐릅니다. 뿌리에서 올라오는 수분과 영양분이 가지로 흘러갑니다. 그러면 때가 되어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열매는 우리의 노력만으로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생명의 결과입니다. 성령의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인간의 의지력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 거할 때 맺히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때로 열매를 너무 빨리 보려고 합니다. 빨리 변화되기를 원하고, 빨리 성장하기를 원하고, 빨리 결과가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주님 안에 깊이 뿌리내리게 하십니다. 깊은 뿌리 없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뿌리가 약하면 열매가 많아질수록 가지가 꺾입니다. 건물의 높이는 건물의 깊이에 달려 있습니다.
조장(助長)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도울 조’, ‘자랄 장’을 씁니다. 빨리 자라게 하려고 순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뜻입니다. 조장(助長)은 송나라 농부가 벼를 빨리 키우려고 순을 잡아당겼다가 모두 죽인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조급함이 오히려 해가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조장하지 마”라는 말은 “억지로 끌어올려서 일을 망치지 말라”란 뜻입니다.
신앙의 열매는 조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기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배 안에 거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질 때 우리의 삶은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보다 거함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이 모든 열매의 시작입니다.
셋째. 자기보다 주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내 마음대로 살았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난 후 예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신앙은 중심이 이동된 것이고,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내 뜻이 먼저였던 삶에서 주님의 뜻이 먼저 되는 삶입니다. 내 이름을 드러내고 싶던 삶에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래서 바울은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빌1:21)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부정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힐 때에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고, 그가 부활할 때 우리도 새사람으로 되었습니다. 우리의 육의 사람은 죽고 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겉사람은 죽고 속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의 길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존재를 부정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중심성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미신과 기독교’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미신의 목적은 ‘자기가 잘 되는 것’입니다. 건강, 재물, 안전, 성공 등 복을 얻기 위함입니다. 기독교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그 은혜에 응답하며 사는 것입니다.
미신적 신앙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신적 신앙이란 목적이 되어야 할 예수가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된 신앙입니다. 기복주의 신앙은 하나님을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기복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의 복을 위한 신앙입니다. 기복신앙은 미신적 신앙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107개의 문답으로 구성된, 개혁신앙의 핵심을 가장 간결하고 명확하게 정리한 신앙 교육서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번 질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이다.”입니다. 좀 더 쉽게 질문을 하면 ‘인간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일 겁니다.
대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입니다. 두 문장을 합치면, ‘사람의 제일 목적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이 고백은 참으로 위대한 고백입니다. 그는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고, 참된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공이 무엇입니까? 내가 잘되는 것입니까? 주님이 잘 되는 것입니까? 내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까? 주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성경 전체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도행전에는 핵심 단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령과 교회입니다. 성령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인 28장 31절에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전파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창세기 1–2장과 요한계시록 21–22장은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께서 에덴의 창조 질서를 세우시는 장면이고, 계시록 21–22장은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곧 새 에덴을 완성하시는 장면입니다. 새 에덴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입니다.
자기보다 주님입니다. 기복주의 신앙은 미신적 신앙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 가지 고백을 붙들었습니다.
사역보다 사랑입니다.
열매보다 거함입니다.
자기보다 주님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사역은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 안에 거할 때 열매는 맺힙니다. 자기보다 주님을 높일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신앙의 우선순위를 리셋해야 합니다.
사역보다 먼저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열매보다 먼저 주님 안에 거하겠습니다. 자신보다 먼저 주님을 높이겠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사랑의 주님,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주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사역의 분주함 속에서 사랑을 잃었고, 열매에 대한 조급함 때문에 평안을 놓쳤으며,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나 자신을 주장할 때가 많았습니다. .
주님, 우리의 중심을 다시 세워 주소서. 신앙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게 하소서.
사역보다 사랑을 붙들게 하시고, 열매보다 거함을 사모하게 하시며, 자기보다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자 (고후 5:20)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서론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교회에만 출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된 사람입니다.
사신을 ‘Ambassador’라고 합니다. ‘사자, 사신, 대사’ 등으로 번역합니다.
지난 목요일 6월 11일, Facebook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습니다. 시카고 구세군 사관학교에서 임관하기 바로 전에 찍은 사진입니다. 37년 전, 1989년 6월 11일에 구세군 사관으로 임관했습니다. 구세군 사관학교는 기수별로 학기명이 있습니다. 저의 학기명은 ‘그리스도의 사자’(Ambassadors for Christ)입니다. 사진 속에는 하나님 나라에 간 분들도 있고, 은퇴하여 사역의 일선에서 물러난 분들도 있으며, 지금도 현역으로 사역의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진을 보고 짧은 글을 썼습니다. 글의 결론은 이렇게 맺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수많은 계절을 지나오며 눈물과 기도, 헌신과 은혜로 빚어진 사역자들이 되었습니다. 세월은 우리를 변화시켰지만 단 한 가지, 변하지 않은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자(Ambassadors for Christ)
우리의 이름은 우리가 걸어온 길이었고, 우리가 붙들고 살아온 정체성이었으며, 앞으로도 우리를 이끌어갈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사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위대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메시지를 땅에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후 5장 20절의 말씀을 의지하여 ‘사신, 권면, 화목’이란 단어를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된 사람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대신하여’입니다. 사신이란 왕을 대신하여 보냄받은 사람입니다. 사신은 자신을 보낸 왕의 뜻과 마음과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사신은 자기 말을 전하지 않습니다. 사신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신은 자기 감정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높이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언어를 사용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지난 2월에 한국에서 가나 대사를 인터뷰했습니다. 그는 한국 선교사 자녀입니다. 이분들을 MK라고 합니다. 그는 가나에 교육을 받고 사역과 사업을 하다가 가나 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한국에 온 ‘최고조 대사’입니다. 대사관을 방문했을 때 그는 가나의 옷을 입었고, 사무실에는 가나 대통령인 마하마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책상에는 가나 초코렛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Born in Korea, made in Ghana’라고 했습니다. 그는 한국인이지만 가나 대통령을 대신하여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가나와 한국의 브리지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8장에 보면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등장합니다. 그는 바벨론의 멍에가 곧 꺾이고, 포로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백성들이 듣기에는 얼마나 좋은 말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냐는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처럼 포장합니다. 하나냐는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소원인 것처럼 말합니다(렘 28:15).
선지자는 히브리어로 ‘나비’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 앞에 선 사람입니다. 선지자는 자기 생각을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시대의 분위기에 맞는 말을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전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진짜 선지자는 전하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은 먼저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는가?
베드로전서 2:9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우리가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이웃 가운데 살아갈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있는 그 자리가 곧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선교지입니다.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이 곧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영혼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언어를 사용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보냄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만남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섬김에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사람들을 권면하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라고 말합니다. 권면이란 단순히 충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권면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세우는 말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권면하시는 말은 더욱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태도는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우리의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함께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교회 직분이 있습니다. ‘권사’입니다. 성경에 ‘권사’라는 단어는 없지만, 교회의 여성 지도자가 권면 사역의 전통 속에서 발전했습니다. 권사는 ‘권면을 삶으로 실천하는 영적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을 권면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로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을 사용하십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다”(잠 18:21)고 했습니다.
민수기 13장에 12명의 정탐꾼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10명은 “우리는 저들의 비해서 메뚜기”라고 보고하여 듣는 사람들을 절망시켰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했습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 하나님은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행하리라”고 했습니다.
“유머치료 교실에 오시는 80대 할머니가 늘 행복한 얼굴로 마냥 싱글벙글하셨다. 참 부럽기도 하고 또 그 비결이 궁금해서 말을 붙여 보았다. “할머니! 요즘 건강하시죠? 그러자 할머니께서 씩씩하게 대답하신다. “응~ 아주아주 건강해. 말기 위암 빼고는 다 좋아.”
암에 걸렸을지라도 ‘고질병’이라 생각하는 사람에겐 암 치유율은 38%에 그치지만, 점 하나 붙여서 ‘고칠병’이라고 믿는 사람에겐 암 치유율은 70%까지 올라간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잠언 16:24
선한 말은 약과 같습니다. 격려의 말은 낙심한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위로의 말은 상처 입은 사람을 일으킵니다. 감사의 말은 관계를 따뜻하게 만듭니다. 축복의 말은 미래를 향한 믿음을 심습니다. 사람은 음식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말도 먹고 삽니다. 사랑의 말을 먹으면 영혼이 자라고, 비난의 말을 먹으면 마음이 병듭니다. 사람은 긍정적인 말의 씨를 뿌리면 긍정의 열매를 거두고, 부정적인 말의 씨를 뿌리면 부정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지난주 유퀴즈에 ‘젠슨 황’이란 사람이 나왔습니다. NVIDIA 창업(1993)자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의 인터뷰를 보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지금 만나는 사람에 집중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우를 했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단어는 평범하지만 분명한 철학이 있고, 긍정적이며 창조적이고 건설적입니다. 어떤 사람을 직원으로 채용하느냐는 질문에 ‘인간성’을 본다고 했습니다. AI 시대에 기술과 실력은 쉽게 따라갈 수 있지만 인간성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사람을 배려하고 인정하며, 다른 사람의 성공에 박수를 쳐 줄 수 있는 사람을 뽑는다고 합니다. MC인 유재석이 다음 일정이 있어 바쁠 것 같다고 하자, 그는 팔목을 걷으며 “나는 시계가 없습니다”라며 유재석에게 여유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젠슨 황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잘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는 기업보다 더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 우리의 메시지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사신의 핵심 메시지는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라.”입니다. 화목이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입니다. 위로는 나와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 옆으로는 나와 이웃의 수평적 관계, 안으로는 나와 나의 내면적 관계입니다. 수직적인 하나님의 관계가 깨어지면, 수평적인 이웃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내적인 나와의 관계도 깨어집니다. 세상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고,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면서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전 3:11).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육으로 영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중심은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목의 길을 여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죄의 담을 허무신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은 죽음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탄과 마귀의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사탄은 ‘대적하는 자, 고소하는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생명을 방해하는 영적 대적자를 의미합니다. 마귀는 ‘디아볼로스’로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존재’, ‘이간질하는 존재’, ‘거짓을 던져 관계를 깨뜨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이고, 마귀는 관계를 파괴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공동체에서 이간질하여 관계를 깨뜨리는 사람들은 마귀 같은 존재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자 바리새인들은 “저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것이다”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그 나라가 서겠느냐” 즉, 악한 영들도 자기들끼리는 싸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싸우면 자기 왕국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사탄도 자기 왕국을 지키려고 내부에서는 싸우지 않는데, 만약 우리가 서로 싸우면 사탄보다 더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탄보다 나쁜 놈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할 메시지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 세상은 갈등으로 가득합니다. 나라와 나라가 갈등하고, 세대와 세대가 갈등하고, 가정과 가정이 갈등하고, 사람의 마음속에서도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모든 화목의 시작은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자신과도 화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이웃과도 화목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세상 속에서 평화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초대해야 합니다. 정죄의 손가락이 아니라 화목의 손길로 초대해야 합니다. 차가운 판단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 세상에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
말씀을 마칩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세상은 여전히 화목의 복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상처를 입은 영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길을 잃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
다 같이 손을 들고 여러분이 전도해야 할 분을 생각하며 크게 외칩시다.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화목’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말에 사랑이 있게 하시고,
우리의 섬김에 진실함이 있게 하시며,
우리의 눈물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기게 하옵소서.
정죄가 아니라 사랑으로,
교만이 아니라 겸손으로,
명령이 아니라 권면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삶의 자리마다 화목의 은혜가 흐르게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7년 전 오늘, 그 부르심을 다시 기억하며
1989년 6월 11일,
우리는 시카고 구세군 사관학교에서 구세군 사관으로 임관하고 안수받았습니다.
사진 속 우리의 얼굴은 참 젊었습니다. 아직 세상의 무게를 다 알지 못하던 얼굴들, 사역의 눈물과 기쁨을 다 경험하기 전의 얼굴들, 흰머리 하나 없이 주님을 향한 열정과 소명감으로 빛나던 얼굴들입니다.
그날 우리는 주님 앞에 서서 우리의 삶을 드렸습니다. 어디로 보내시든 가겠다고, 무엇을 맡기시든 순종하겠다고 헌신했습니다.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빵을 들고 주님의 사랑을 나누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누군가는 도시의 거리로, 누군가는 작은 마을로, 누군가는 병든 자와 가난한 자 곁으로, 누군가는 상처 입은 영혼과 길 잃은 사람들 곁으로 보내졌습니다. 우리는 그때 우리의 길이 늘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 얼마나 많은 눈물과 인내, 희생과 기다림을 요구할지는 다 알지 못했습니다.
3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예배당에서 말씀을 전했고, 병상 곁에서 기도했으며, 장례식장에서 유가족의 손을 잡았고,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로했습니다. 때로는 환영받았고, 때로는 외로웠습니다. 때로는 열매를 보며 감사했고, 때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믿음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사진 속의 젊은 얼굴들은 이제 많이 변했습니다. 검은 머리는 희어졌고, 힘차던 걸음은 조금 느려졌으며, 웃음 뒤에는 세월의 흔적과 사역의 무게가 새겨졌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은혜이며, 그 부르심에 응답했던 우리의 첫 마음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더 이상 이 땅에 함께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떠났지만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름, 그들의 헌신, 그들의 기도, 그들의 눈물, 그들이 섬겼던 사람들 속에 남아 있는 사랑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주님의 품에 안겼고, 우리는 감사와 그리움으로 그들을 기억합니다.
또한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는 동기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어떤 이는 여전히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고, 어떤 이는 조용한 자리에서 사람들을 섬기며, 어떤 이는 은퇴 후에도 기도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몸과 마음을 붙드시고, 남은 걸음마다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수많은 계절을 지나오며 눈물과 기도, 헌신과 은혜로 빚어진 사역자들이 되었습니다. 세월은 우리를 변화시켰지만 단 한 가지, 변하지 않은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Ambassadors for Christ.’
우리의 이름은 우리가 걸어온 길이었고, 우리가 붙들고 살아온 정체성이었으며, 앞으로도 우리를 이끌어갈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Remembering That Calling Again, 37 Years Ago Today
On June 11, 1989, we were commissioned and ordained as Salvation Army officers at the Salvation Army Officers’ College in Chicago.
Our faces in the photograph were truly young. Faces that did not yet fully know the weight of the world, faces before they had fully experienced the tears and joys of ministry, faces that shone with passion and a sense of calling toward the Lord, without a single gray hair.
That day, we stood before the Lord and offered our lives. We committed ourselves to going wherever He sent us and obeying whatever He entrusted to us. Holding the Bible in one hand and bread in the other, we vowed to live sharing the Lord’s love. Some were sent to the city streets, some to small villages, some to the side of the sick and the poor, and some to the side of wounded souls and the lost. At that time, we vaguely knew that our path would not always be smooth. However, we did not fully know how many tears, patience, sacrifice, and waiting that path would require.
Thirty-seven years have passed.
During this time, we have preached the Word in countless chapels, prayed by the sickbed, held the hands of bereaved families at funerals, and comforted wounded souls. At times we were welcomed, and at times we were lonely. At times we gave thanks seeing the fruits of our labor, and at other times we had to endure by faith in times when nothing seemed to matter.
The young faces in the photographs have changed significantly. Our black hair has turned white, our once vigorous steps have slowed a little, and behind our smiles are etched the traces of time and the weight of our ministry. However, there is something that has not changed. It is the grace of the Lord who called us, and our initial hearts that responded to that call.
Some among us are no longer with us on this earth. They have departed, but they have not been forgotten. Their names, their devotion, their prayers, their tears, and the love remaining in the people they served are still alive. They were embraced by the Lord before us, and we remember them with gratitude and longing.
We also pray for our fellow members who are still serving the Lord in their respective places. Some are still preaching the Word from the pulpit, others are serving people in quiet places, and still others are likely upholding the Kingdom of God with prayer and love even after retirement. I pray that the Lord will uphold their bodies and minds and add grace to every step they take.
And today, having passed through countless seasons, we have become ministers forged by tears, prayers, devotion, and grace. While time has changed us, there is one truth that remains unchanged. Then and now, we are still those called to be ‘Ambassadors for Christ.’
‘Ambassadors for Christ.’
Our name is the path we have walked, the identity we have held onto throughout our lives, and the calling of God that will lead us into the future.

한국최초 성경전래지 마량진
사진의 비석은 충남 서천 마량진에 세워진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비입니다. 이곳은 1816년 조선 순조 때, 영국 함선이 조선 서해안을 탐사하던 중 성경이 처음으로 조선 땅에 전달된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충남관광 안내도 1816년 마량진 갈곶에 머물렀던 영국 함선의 맥스웰 함장이 조선의 첨사 조대복에게 성경을 전달한 사건을 “한국 역사상 최초의 성경 전래”로 설명합니다. (Chungnam Tour)
역사적 배경은 이렇습니다. 1816년 9월 5일, 영국 해군의 두 함선 알세스트호(Alceste)와 리라호(Lyra)가 서천 마량진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이 배들은 단순히 표류한 배가 아니라, 조선 서해안을 탐사하고 해도를 작성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도 당시 조선 관청은 이들을 “표류한 이양선”으로 보고했지만, 실제로는 맥스웰과 바실 홀이 이끄는 영국 해군의 서해안 탐사 항해였다고 설명합니다. (Korean History Online)
당시 조선 쪽에서는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 현감 이승렬이 나아가 영국 함선을 조사했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깊은 대화는 어려웠지만, 서로 예의를 갖추어 만났고, 그 과정에서 영국 측이 조선 관리들에게 책과 물품을 전했습니다. 그중 한 권이 성경이었고, 이 성경이 기록상 조선 땅에 처음 전달된 성경으로 여겨집니다. 서천군 관광 안내도 이 사건을 근거로 2004년 학계와 종교계의 고증을 거쳐 마량포구 일대를 “한국최초성경전래지”로 선포하고 기념공원을 조성했다고 설명합니다. (Seocheon Tour)
이 사건은 곧바로 선교나 교회 설립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달된 성경은 영어 성경이었기 때문에 조선 관리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선교사가 오기 전에 먼저 성경이 조선 땅에 도착했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구분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사건”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천주교 신앙은 이미 18세기 후반 중국을 통해 조선 지식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비석이 말하는 것은 기록으로 확인되는 ‘성경책’의 첫 전래 사건입니다.
이후 한국 개신교 역사는 1832년 귀츨라프의 방문,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입국 등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마량진 사건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직접적인 시작이라기보다, 한국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놓인 상징적 출발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비석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816년 9월 5일, 서천 마량진에서 영국 함선의 맥스웰 함장이 조선 관리 조대복에게 성경을 전달하였다. 이 사건은 한국 땅에 성경이 처음 전해진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된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