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목사의 특별기고

혼잣말이 바꾸는 불안의 온도
지인의 권유로 난생처음 골프채를 잡았다. 기본 자세조차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숙련자들 사이에 서 있으니 긴장이 앞섰다. 스윙은 번번이 빗나갔고, 공은 힘없이 굴러가기 일쑤였다. 그때 무심코 나온 혼잣말은 이랬다. “왜 이렇게 안 되지?”, “또 못 쳤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돌이켜보면, 그 순간 나를 위축시킨 것은 서툰 실력보다도 스스로를 향한 냉혹한 평가였다. 실수는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내 혼잣말은 그것을 ‘능력 부족’이나 ‘실패’로 규정하고 있었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자신에게 건네는 말의 태도였다.
인간은 하루 종일 자신과 대화하며 살아간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끊임없이 자신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그 혼잣말은 때로 약이 되지만, 때로 독이 된다. 자신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언어는 회복탄력성을 높이고 도전을 지속하게 하지만, 반복되는 자기 비난과 부정적 단정은 불안을 증폭시키고 행동을 위축시킨다. 혼잣말은 감정의 온도를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조절 장치다.
한 청년은 연인과의 이별 후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생각은 점차 확신이 되었고, 불안은 커졌으며, 그는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모든 사람이 그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현실이 그를 고립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반복해 들려준 말이 그의 세계를 좁히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은 감정을 만들고, 감정은 행동을 결정한다는 단순한 원리가 여기에 적용된다.
오늘날 불안은 가장 흔히 경험되는 정신적 어려움 가운데 하나다. 예측하기 어려운 경제 상황, 기후 변화와 재난, 국제 분쟁과 사회적 갈등은 일상의 안정감을 흔든다. 특히 미래를 준비해야 할 젊은 세대는 더 큰 불확실성 앞에 서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불안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불안을 어떻게 해석하고 다루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달라진다. 그 출발점이 바로 ‘혼잣말’이다.
불안을 완화하는데 도움이 되는 혼잣말의 방법은 여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인칭을 바꾸는 것이다.
“나는 실패했다” 대신 “○○는 실패했다” 혹은 “너는 실패했다”라고 표현해 보면 심리적 거리가 생겨 감정의 강도가 완화된다. 상황과 자아를 분리하여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둘째, 시제를 바꾸는 것이다.
불안이 고조될 때 우리는 “지금 숨을 못 쉬겠다”, “지금 너무 불안하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숨을 못 쉴 것 같았다”, “매우 불안했다”와 같이 과거형으로 전환하면, 뇌는 최고조의 순간이 이미 지나갔다고 인식하며 긴장을 낮춘다.
셋째, 단정 대신 질문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단정은 사고를 닫아 버린다. 반면 “정말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사고를 열어 두고, 뇌가 자연스럽게 다른 가능성을 찾도록 한다. 흑백 논리를 완화하고 사고의 유연성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넷째, 자기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다.
부정적 혼잣말은 이미 상처받은 자신에게 또 다른 상처를 더한다. 대신 “괜찮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애써 왔다”와 같은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야 한다. 자기 자비는 자기 연민과 달리,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자신을 지지하는 태도다.
다섯째,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불안하다”는 막연한 표현은 두려움을 키울 수 있다. 그러나 “관계가 멀어질까 봐 불안하다”, “경제적 불안정이 염려된다”처럼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문제의 윤곽이 드러나고 현실적인 대응이 가능해진다.
여섯째, 문제 중심이 아닌 해결 중심으로 사고를 전환한다.
“나는 왜 이렇게 잘못이 많은가”라는 자책은 정체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대신 “지금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실천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필요하다. 작은 실천이 반복되면 자기 효능감이 회복되고, 불안은 점차 완화된다. 초점이 과거 실수에서 미래 가능성으로 이동할 때 정서의 흐름도 바뀐다.
혼잣말은 사소해 보이지만 반복되면 사고 습관이 되고, 결국 삶의 태도가 된다. 우리는 외부 불확실성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에게 어떤 언어를 사용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을 무너뜨리는 언어 대신, 자신을 세우는 언어를 선택하는 것. 그것이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변화다.
말보다 마음을 먼저 듣는 대화
“우리 가족 모두가 나를 싫어해.”
어느 날 저녁, 가족회의를 위해 잠시 거실에 모이자고 하자 한 십대 자녀가 이렇게 말한 뒤 울먹이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예상치 못한 말에 가족들은 당황했다. 갈등의 시작은 비교적 단순했다. 동생의 티셔츠를 허락 없이 입고 외출한 일이 발단이었다. 동생이 화를 냈고, 다른 형제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집에 돌아온 아이는 여러 사람의 지적을 동시에 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행동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관계 전체의 거절’로 받아들였다.
잘못은 분명했다. 타인의 물건을 허락 없이 사용한 행동은 책임을 물어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왜 이 일은 단순한 훈계에서 멈추지 않고 “모두가 나를 싫어한다”는 결론으로까지 확장되었을까.
다음 날, 감정이 가라앉은 뒤에 다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제야 보이지 않던 맥락이 드러났다. 아이는 그날 학교에서 친구와의 관계 문제로 이미 큰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다. 사소한 오해가 있었고, 미묘한 소외감이 이어졌으며, 속으로는 억울함과 불안이 쌓여 있었다. 겉으로는 평소와 다르지 않아 보였지만, 정서적 에너지는 상당히 소진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집에 돌아와 여러 형제의 말을 동시에 듣게 되자, 그것은 단순한 지적이 아니라 ‘집단적 비난’처럼 느껴졌다. 이미 마음속에 쌓여 있던 긴장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은 A였지만, 실제로 감정을 폭발시킨 것은 그 이전에 누적된 B라는 맥락이었다.
우리는 흔히 눈앞의 사건만 본다. 그러나 감정은 언제나 축적된 맥락 위에서 반응한다. 이미 긴장이 높아진 상태에서는 작은 자극도 훨씬 크게 체감된다. 평소라면 넘길 수 있었던 말도 그날은 날카로운 공격처럼 들릴 수 있다. 특히 청소년기는 이러한 반응이 더욱 두드러진다. 또래의 평가와 가족의 시선은 생각보다 깊이 각인된다. 논리적으로는 과장된 해석일지라도, 당사자의 정서 안에서는 매우 실제적인 경험이 된다.
갈등 상황에서 어른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사실을 정리하는 것이다. “잘못했잖아.” “규칙을 어겼잖아.” “사과해야지.” 물론 책임은 분명히 해야 한다. 규칙과 한계를 세우는 일은 가정 안에서 중요한 역할이다. 그러나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에는 또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바로 말의 이면에 있는 감정을 읽어내는 태도다.
“모두가 나를 싫어해”라는 말은 객관적 사실을 진술한 문장이라기보다, 주관적 체감을 표현한 문장일 가능성이 크다. 그 안에는 “나는 지금 상처받았다”, “나는 혼자인 느낌이다”, “나는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낀다”는 정서가 담겨 있을 수 있다. 감정은 종종 극단적인 언어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대개 충족되지 않은 심리적 욕구가 자리하고 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소속감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공정하게 대우받고 싶은 마음이 그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자주 놓치는 부분은 사건의 ‘중요도 차이’다. 같은 사건이라도 사람마다 체감하는 무게는 크게 다르다. 나에게는 2나 3 정도의 일이라도 상대에게는 8이나 9의 강도로 다가올 수 있다. 예를 들어, 교재 배송이 며칠 늦는 일은 행정 담당자에게는 일정 조정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학생에게는 학습의 출발이 지연되는 중대한 문제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 차이를 고려하지 않으면 “그게 뭐 그렇게 큰일이냐”는 말이 쉽게 나오고, 그 한마디가 관계를 더 멀어지게 만든다.
관계를 살리는 질문은 다르다. “왜 그렇게 예민하니”가 아니라 “이 일이 당신에게는 얼마나 크게 느껴졌습니까”라는 물음이다. 이 질문은 상대의 경험을 존중한다는 신호가 된다. 이해하려는 태도는 방어를 낮추고, 대화의 가능성을 넓힌다.
감정이 격해진 순간에는 인지적 교정보다 정서적 안정이 먼저다. 이성적 설명은 감정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게 느꼈구나”, “많이 속상했겠구나”라는 한 문장은 상대의 마음에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 준다. 이는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인정하는 태도다. 공감이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책임과 재해석의 논의가 가능해진다.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일상이다. 가족 안에서도, 부부 사이에서도, 직장과 사회에서도 의견 충돌은 반복된다. 중요한 것은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갈등을 다루는 방식이다. 말의 표면에 즉각 반응하기보다, 그 아래에 흐르는 감정을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태도는 관계의 방향을 바꾼다.
어쩌면 관계를 지키는 힘은 설득의 기술이나 논리의 날카로움에 있지 않을지 모른다. 누군가의 과장된 말 뒤에 숨은 상처를 읽어내고, 그 마음을 먼저 붙잡아 주는 데 있을 것이다. 사실을 바로잡기 전에 마음을 먼저 듣는 일, 그것이 갈등을 단절이 아니라 성숙의 기회로 전환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김훈 박사 (호주카리스대학 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