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老子)의 ‘도덕경’ (道德經)
노자(老子)는 춘추시대 초나라의 철학자로 전해지고 있다. 기원전 604년(추정) 중국 초나라 허난성에서 출생했으며, 기원전 6세기~5세기초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시호는 담(聃)이다.
허난 성 루이 현 사람으로 주왕을 섬겼으나, 뒤에 관직을 버렸다.
그는 중국에서 우주의 만물에 대하여 생각한 최초의 사람으로, 그가 발견한 우주의 진리를 ‘도'(道)라고 이름지었다. 그 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도교’라고 하며, 그는 우주 만물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이치가 곧 ‘도’라고 설명하였다.
○ 노자 (老子)의 실체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에서 노자로 상정되는 인물이 3인이 있다고 하였다. (老子 韓非列傳). 첫째로 이이(李耳, 자는 담(聃=老聃)를 들었다. 그는 초나라 사람으로 공자가 예(禮)를 배운 사람이며, 도덕의 말 5천여 언(言)을 저작한 사람인데 그의 최후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다음에 든 사람은 역시 공자와 동시대의 노래자(老萊子)로서 저서는 15편 있었다 한다. 세 번째 든 것은 주(周)의 태사담이라는 사람으로 공자의 사후 100년 이상 경과한 때에 진(秦)의 헌공과 회담하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노자는 은군자(隱君子)’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노자라고 하는 이는 은자로서 그 사람됨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후세에 노자라고 하면 공자에게 예를 가르쳤다고 하는 이이(李耳)를 생각하는 것이 상례이나, 이이라고 하는 인물은 도가의 사상이 왕성하던 시기에 그 사상의 시조로서 공자보다도 위인(偉人)이었다고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전설일지도 모르겠다.
펑유란(馮友蘭)은 노자가 전국시대의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이에 근거하여 노자가 실존인물이라고 가정한다면 최소한 도덕경 죽간본(BC 300년경) 이전일 수밖에 없으며 한비자(BC 280~BC 233)가 도덕경을 인용하였으므로 한비자보다 앞선다. 또 도덕경에는 유가사상을 비판하는 내용이 많은데 이는 백서본(갑본은 전국시대 말기, 을본은 한나라 초기) 이후가 반유가적인 것이며 죽간본은 덜하다.
○ 사상 ‘무위자연’
도는 성질이나 모양을 가지지 않으며,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으며, 항상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우주 만물은 다만 도가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우주 만물의 형태는 그 근본을 따지면 결국은 17가지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저서 ‘노자 도덕경’ 속에 있는 ‘무위 자연’이라는 말로 나타낼 수 있다. 사람이 우주의 근본이며, 진리인 도의 길에 도달하려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무위 자연’ 사상이다. 즉, 법률·도덕·풍속·문화 등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사람의 가장 순수한 양심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갈 때 비로소 도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후세에 ‘도교의 시조’로 불리고, 그 사상은 ‘노장 사상’ 또는 ‘도가 사상’으로 발전하여 유교와 함께 중국 정신 사상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 노자 ‘도덕경’ ‘(道德經)
‘도덕경'(道德經)은 노자(老子)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도가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노자'(老子)로도 불린다. 노자는 이 저서에서 전체적으로 자연에 순응하는 무위(無爲)의 삶을 살아갈 것을 역설하였다.
노자의 말이라고 하여 오늘날 ‘노자'(老子道德經이라고도 한다) 상·하 2권 81장이 남겨져 있다. 거기서 기술되고 있는 사상은 확실히 도(道)의 본질, 현상계의 생활하는 철학이다. 예컨대 도를 논하여 이렇게 말한다.
‘도(道)’는 만물을 생장시키지만 만물을 자신의 소유로는 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형성시키지만 그 공(功)을 내세우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성장시키지만 만물을 주재하지 않는다'(10장). 이런 사고는 만물의 형성·변화는 원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또한 거기에는 예정된 목적조차 없다는 생각에서 유래되었다.
노자의 말에 나타난 사상은 유심론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펑유란은 도에 대해서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유물론으로서 무신론에 연결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해는 뛰어난 것이다. 또 ‘도(道)는 자연(自然)의 순리를 따른다(法)'(55장)고 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자연계를 지배하는 일은 불가능함을 설명한 것이다. 이 이론은 유가(儒家)의 천인감응(天人感應)적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자가 보인 인생관은 “유약한 자는 생(生)의 도(徒)이다” (76장). “유약은 강강(剛強)에 승한다.”(36장) “상선(上善)은 물과 같다. 물은 흘러서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그러면서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때문에 도에 가깝다”(8장), “천하의 유약하기는 물보다 더한 것이 없다”(78장) 등의 구절에서 보듯이 어디까지나 나를 내세우지 않고 세상의 흐름을 따라 세상과 함께 사는 일을 권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을 겸하부쟁(謙下不爭)이라고 하는 말로써 환언(換言)하고 있다.
노자는 또 “도(道)는 일(一)을 생하고 일은 이(二)를 생하고 이는 삼(三)을 생하고 삼은 만물을 생한다.”(42장)고 하는 식의 일원론적인 우주생성론을 생각하고 있었다.
– 도덕경의 판본
오늘날 우리가 도덕경으로 규정한 판본은 삼국시대 말기에 왕필이 정리한 것이며, 이를 소위 왕필본 혹은 통용본이라고 부른다.
1973년도에 중국 장시성에서 발견된 고분 마왕퇴(BC 168년 추정)에서 발굴된 백서본에 담겨있는 문장들은 왕필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불어 마왕퇴에서 발견된 도덕경 판본은 중국 삼국시대 말기에 왕필이 편집한 통용본보다 연대가 훨씬 앞섰다. 다시 말하자면, 왕필본의 저본이 바로 백서본인 셈이며, 왕필이 정리하기 이전에 중국의 여러 사서에 인용된 판본도 이 백서본인 셈이다. 백서본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백서본 갑본으로서 전국시대 말기(BC 247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을본은 한나라 초기(BC 195년 이전)에 제작된 판본으로 추정된다.
1993년 중국 화북성의 곽점촌에서 발견된 곽점본(혹은 죽간본, BC 300년 추정)은 백서본에는 있는 중요한 시문들이 많이 빠져있으나, 백서본에는 없는 내용 일부가 있어 새로운 텍스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곽점본과 백서본의 주요한 차이는 다음과 같다.
1. 곽점본은 대나무에 쓰인 반면에 백서본은 비단에 쓰였다.
2. 곽점본의 내용 상당수가 백서본에는 없으며, 백서본에 없는 내용 일부가 곽점본에 있다.
3. 곽점본은 2,000여자로 백서본의 40% 정도의 분량이다.곽점본에 비해 백서본의 내용에는 조금씩 추가된 것들이 있으며 문장 형태가 말끔해지는 경향이 있다.
4. 백서본에는 전사과정의 기본적인 오류와 원래는 주석이었으나 옮기는 과정에서 본문으로 들어간 오류 등이 확인된다.
5. 곽점본에 비해 백서본이 더욱 반 유가적인 경향을 보인다.
6. 백서본이 곽점본에 비하여 정치술수적인 내용을 더욱 많이 지니고 있어, 백서본 성립 시기에 유행한 황로학의 영향을 받아 통치술에 대한 내용이 추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7. 백서본은 음양사상을 받아들여 기화론적 우주생성론의 내용을 담고있다.
처음으로 도덕경을 상하로 나눈 사람은 전한 말기의 학자 유향이다. 완결편 도덕경 주석서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하상공'(혹은 ‘하상장인’)이 지은 하상공장구가 있다. 후한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하상공장구는 당나라 시기까지 가장 유행한 판본으로 양생론적 성향이 강해 초기에는 도교도들에 의해 많이 읽혔으나 이후 당나라 시대까지 가장 많이 읽히는 판본이 되었다.
왕필은 18세이던 243년에 ‘노자도덕경주’를 완성하였고, 이후 그의 저서는 위나라의 재상 하안에 의해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당나라때까지만 해도 그의 구석서는 하상공장구에 비해 덜 읽혔으나 송나라때 이후 유학자들에 의해 주요한 판본으로 여겨지게 됐으며, 이 지위는 명,청대에 더욱 확고해져서 백서본 출토 이전까지 무려 천년 이상 동서양 도덕경 이해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 탁월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도덕경을 유가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많았기에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백서본과 왕필본의 다른점은 다음과 같다.
1. 백서본은 장절구분이 거의 없이 이어 적혀있었으나, 왕필본은 장절구분이 잘 되어있다.
2. 백서본은 덕경이 도경보다 앞에 놓이나, 왕필본은 도경이 덕경보다 앞에 놓인다. 다시 말하면, 백서본은 덕도경이라고 불릴 수 있고, 왕필본은 우리가 익히 들언대로 도덕경이라 읽는다.
3. 왕필본의 장절구분을 기준으로 하면, 백서본은 24-22-23장과 41-40-42장, 66-80-81장의 순서로 구성되어있다.
4. 백서본은 왕필본에 비해 시대 특성상 (가차자)가 많이 쓰였고, 따라서 그 글자들의 해석이 복잡하다.
5. 백서본은 왕필본에 비해 허사가 많이 남아있어 왕필본의 끊어읽기 문제를 다소 해결해준다.
곽점본과 백서본 그리고 왕필본의 차이만 보아도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전설처럼 노자가 함곡관을 넘으면서 도덕경 5,000여 자를 남겼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도덕경은 일거에 성립된 것이 아니고 고대부터 전국시대 말기를 거치면서 발생한 여러 생각과 사상들이 응축되어 성립된 책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복잡한 성립과정은 도덕경 안에 여러 모순된 사상이 뒤섞여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도덕경에 모순과 여러 사상이 뒤섞여 있는 만큼, 여러 사상가와 학자마다 도덕경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는데, 하상공장구는 양생술을 위한 음양사상의 기본 경전으로서 여겼고, 왕필주는 도덕경에 담긴 형이상학적인 면모를 흠모하여 신비주의학적으로 여겼으며, 그 외에도 여러 학자와 사상가들이 저마다 무위자연주의, 반유가주의, 반법가주의, 음양가 사상, 무정부주의, 병가 사상들의 근간이 되는 저서로 여겼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