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발달과 봉건제의 붕괴
도시의 발달과 장원경제의 붕괴를 중심으로

1. 상업의 발달
① 유럽 경제의 성장
가) 11세기 이전
(ㄱ) 게르만족의 이동 → 로마의 멸망 → 이슬람과 노르만의 침입 → 프랑크 왕국의 분열 등 극심한 혼란의 시기
(ㄴ) 장원 단위의 자급자족적 농업 경제로서 상업은 위축
나) 11세기 이후
(ㄱ) 수도원과 제후들 주도하에 대규모 개간 사업
* 시토 교단이 대규모 목초지를 조성하여 양모 생산 → 모직물로 대표되는 플랑드르 교역권 형성
* 엘베강 너머 동유럽 개척 → 프로이센, 폴란드, 헝가리 등장
(ㄴ) 농업의 발달 → 잉여 생산물의 판매와 생필품 구입 위한 시장이 발달
(ㄷ) 십자군 계기로 동방 교역이 증가
② 교역권의 형성
가) 지중해 교역권(이태리 도시국가)
(ㄱ) 동방에서 사치품과 향료를 수입해서 유럽으로 공급
(ㄴ) 플랑드르의 양모를 넘겨 받아 모직물로 가공하여 동방으로 수출
나) 북방 교역권(플랑드르 중심)
(ㄱ) 양모, 모직물을 판매
(ㄴ) 한자동맹 등 도시동맹 결성
다) 내륙 교역권
(ㄱ) 프랑스의 상파뉴,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 등
(ㄴ) 지중해 교역권과 북방 교역권을 중개
(ㄷ) 백년전쟁의 혼란과 고액의 통행세로 내륙의 교역로가 쇠퇴하고 이후 대서양 연안을 거쳐 가는 해로를 통해 직접 교역
*참고 – 한자동맹
1. 한자(Hansa)는 독일어로 ‘조합’을 의미하며 한자동맹은 13세기 북유럽의 도시 동맹
2. 발트해와 북해 등을 중심으로 교역이 발달하여 북부 독일 도시들이 성장 → 북유럽 교역을 독점하여 푸거 가문과 같은 대상인 가문이 등장
3. 독일 등 주변국의 정치적 분열 속에서 각 도시들은 동맹을 맺고 자체의 법률과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며 교역
4. 15세기 이후 신항로의 개척과 영국, 프랑스 등 통일국가의 등장으로 교역의 주도권을 상실했으며 이후 30년 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해체
③ 상업 발달의 한계
가) 귀족의 사치품이 중심 — 13세기 이후 일반 소비재가 중심
나) 생산 수준이 낮아 상업 자체는 동방에 비해 낮은 수준 — 이전 자급자족적 경제에 비해 발달했다는 의미
다) 상업으로 얻은 부는 토지 매입, 금융업, 권력과의 결탁 등에 사용
2. 도시의 발전
① 도시의 출현(과정)
가) 상업이 성장하면서 장원, 교회의 외곽이나 교통의 요지에서 상거래가 형성되고 점차 상인, 수공업자들이 모여 거주하기 시작
나) 교회와 영주들은 이들 거류지를 보호, 육성하고 세금을 징수
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방어를 위해 주변에 성벽을 두르고 교회나 제후들로부터 자치권을 획득 — 자치권은 매수 또는 투쟁을 통해 획득되었으며 규모가 큰 도시의 경우 왕과 직접 교섭하여 자치권 획득
라) 이렇게 형성된 거류지를 부르그(Burg), 그 주민을 부르주아라 부름 — 중세의 부르주아는 도시민을 지칭하는 말로서 대상인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계층을 망라
*참고 – 중세 도시의 규모
1. 동방의 도시들은 국가 주도로 건설되어 행정의 중시이자 상업의 중심지로서 대규모
2. 반면 중세 유럽의 도시는 초기에는 상공인들이 스스로 건립하였으며 주변 농촌을 시장으로 하는 소규모 도시가 대부분 — 후일 원격지 교역이 발달하면서 해상 교통의 요지에 대도시들이 등장
② 도시의 자유
가) 도시의 자유는 시민 개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도시 자체’의 자유
(ㄱ) 교회나 제후들은 도시 자체에 자유를 부여한 것이지 도시에 거주하는 도시민 개개인들에게 자유를 부여한 것은 아님
(ㄴ) 도시민은 도시의 보호와 통제 안에서만 자유를 누리게 되므로 도시민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도시에 강한 애착과 충성
나) 도시의 자유는 외부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도시 내부적으로는 엄격한 통제 체제 — – 길드체제가 대표적인 예
다) 도시의 자유는 구체적으로 행정, 사법, 군사 등 모든 면에서의 자치를 의미
*참고 – 중세 도시의 성격
1. 자치 도시 — 국왕, 제후, 교회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고 도시 자체의 법규, 의회, 행정과 사법 기구들 갖춤
2. 자유 도시 — 농노가 도시로 도망 와서 ‘1년 1일’이 지나면 영주의 추적권 소멸(자유민의 신분을 획득)
3. 경제 도시 — 도시는 길드가 주도하는 경제적 공동체
③ 도시 발전의 의의 —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촉진시켰으며 도시가 발달할 시기에 농촌의 장원에서도 장원제가 붕괴되기 시작
3. 길드
① 길드의 형성
가) 상공업 발달이 미약했던 당시에는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동종업자들간의 유대, 단결이 불가피
나) 길드를 통해 상공업자들이 성장함으로써 상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도시의 성장이 가능
② 상인 길드
가) 초기 구성원간 상호 부조, 유대를 목적으로 결성
나) 도시의 성립과 성장을 주도하면서 도시의 지배층(도시 귀족)이 됨
다) 특히 대상인들의 경우 원격지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왕권의 경제적 후원자 역할을 담당하기도 함
③ 수공업자 길드(장인들의 조합)
가) 생산 및 판매의 전 과정에 대해 철저한 통제와 보호를 통하여 길드 구성원간 ‘이익의 균분’을 추구 → 이를 통해 길드 체제가 유지
(ㄱ) 회원간 경쟁 금지 — 원료 구매, 제조, 판매 등 모든 과정 통제
(ㄴ) 배타적, 독점적 생산 — 길드 구성원 아닌 자의 생산 및 판매 등 금지
나) 도제 제도
(ㄱ) 도제 → 직인 → 장인의 과정
(ㄴ) 도제는 수업료를 내지 않는 대신 장인의 집에서 무보수로 일하면서 기술을 터득 — 별도의 가르침이 없이 스스로 눈으로 보고 익히는 전수 방법
다) 신규 가입에 많은 제약을 둠
(ㄱ) 도제 → 직인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외부인의 길드 가입은 금지되며 직인에서 장인으로의 승격에도 많은 제약
(ㄴ) 특히 중세 말 경기 침체에 직면하여 기존의 길드 구성원들의 이익을 보장하고자 신규 가입 자체가 금지됨
라) 경쟁의 금지는 발전을 저해하여 결국 상업자본에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 — 선대제
④ 길드 체제의 문제점
가) 초기의 길드는 도시의 발전, 상공업의 발전에 공헌
나) 그러나 독점과 보호체제로는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 — 단적인 예가 동방으로부터의 수입은 증가했으나 마땅히 수출할 물품이 없어 노예나 신대륙에서 들여 온 귀금속으로 지불하는 상황이 전개됨
다) 그 결과 근대 산업의 발전은 길드 체제로부터 자유로운 농촌에서 시작 — 새로운 생산 방식인 선대제는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수공업자나 농한기의 농민들을 고용
4. 중세 후기의 도시
① 14세기 유럽의 상황
가) 백년전쟁, 흑사병, 대기근으로 유럽 전역에 걸쳐 인구감소와 경기침체
나) 반면 원격지 교역은 계속 발전하고 있어 상업의 양극화 — 원격지 교역을 기반으로 하는 대도시와 대상인들은 발달한 반면 주변 지역을 시장으로 하는 중소 도시와 중소 상인들은 몰락
② 도시민의 계층 분화
가) 대상인
(ㄱ) 상인 길드를 형성하여 특권을 독점하였으며 도시의 지배층으로서 귀족과도 통혼하는 도시귀족
(ㄴ) 교역에서 얻은 부를 토지, 금융업에 재투자
(ㄷ) 왕이나 제후 등을 경제적으로 후원하고 대가로 교역상의 독점, 특혜 등을 얻음
나) 중소 상공업자
(ㄱ) 일부는 왕이나 제후의 관료로 진출
(ㄴ) 이들 대부분은 봉건적 질서에 불만 → 후대 시민혁명 주도 세력의 조상
다) 도시 빈민 — 길드 체제(진입 장벽)에 막혀 생계 유지 곤란 → 구빈법의 대상
③ 도시 하층민의 반란
가) 치옴피의 반란
(ㄱ) 양모공(직인)들이 상인길드, 장인길드에 반기
(ㄴ) 직인들만의 조합 결성, 도시 행정 참여, 평등한 사법권 등 요구
나) 계층분화가 심화되면서 도시 하층민의 반란은 확산
5. 봉건제(주종 관계)의 붕괴 – 왕권의 강화
① 왕과 제후 간의 권력관계, 왕과 교황 간의 권력관계는 반비례의 관계로서 십자군 전쟁으로 왕권의 경쟁자였던 교황, 제후들의 세력이 약화되어 왕권이 상대적으로 신장
② 교역과 도시의 발달로 성장한 상인층은 상권의 확대를 위해서 통일 국가를 지향 — 이 점에서 왕과 일치된 이해관계를 가져 왕의 든든한 경제적 후원자
③ 전술의 변화(화포의 사용), 상비군과 관료 체제가 갖추어 지면서 봉건제후들이 제공하는 정치, 군사적 봉사가 불필요
*참고 – 상비군
‘주군’들은 이전부터 ‘봉신’이 제공하는 군사적 봉사 보다는 용병을 선호하여 봉신들이 부담하는 군사적 봉사를 경제적인 것으로 대체하고 이를 재원으로 용병을 고용 — 이를 체계화 한 것이 상비군 체제
6. 장원제의 붕괴
① 흑사병
가) 흑사병은 근대 초까지도 빈번히 발생했지만 특히 1340년대 발생한 흑사병은 심각하여 당시 유럽 인구의 1/3이 흑사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
나) 원인 — 이 시기 중국과 비잔틴 제국에서도 흑사병이 발발한 것으로 보아 동방과의 접촉 과정에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며 중세 유럽, 특히 도시의 경우 협소한 지역에 높은 인구 밀도로 인한 열악한 위생 환경으로 동방에서와는 달리 대재앙을 초래
다) 영향
(ㄱ) 인구의 감소 → 노동력의 감소, 생산의 감소 → 영주 수입의 감소, 농노(노동력)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향상 → 장원제 및 장원제에 근거한 봉건제의 위기를 초래
(ㄴ) 인구의 감소 → 구매자의 감소 → 경기 침체를 초래
(ㄷ) 성직자 수가 감소하면서 이 시기 자질이 떨어지는 성직자가 대거 양산되어 교회의 부패가 심각한 수준
(ㄹ) 흑사병에 대한 공포를 신앙으로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효과가 없자 미신, 광신의 풍조, 도덕의 타락 등이 만연
*참고 – 흑사병과 유태인 학살
1. 유럽인들은 전통적으로 유태인을 미워하였는데 이는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지만 유태인들이 고리대업으로 돈을 벌었다는 점이 큰 이유 — 세익스피어의 회곡인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유태인 상인 샤일록이 당시 유럽인들이 바라보는 유태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
2. 기독교 윤리에 따르면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 금지되어 유럽인들은 대부업을 기피한 반면 유태인들이 대부업(고리대업)으로 큰 돈을 벌어 들이는 경우가 많음 — 물론 기독교도인 유럽인들도 암암리에 대부업을 하였으나 적어도 드러내놓고 하지는 못함
3. 위로는 왕과 제후들, 아래로는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유태인들에 빚을 졌으며 특히 힘없는 서민들의 경우 유태인의 고리대업으로 몰락하는 경우가 빈번
4. 따라서 흑사병이 퍼졌을 때 유태인이 우물에 독을 탔기 때문이라는 등의 소문이 돌고 많은 유태인이 학살된 것은 공포에 의한 광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소 유태인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 작용
② 붕괴 요인
가) 십자군 전쟁의 실패, 동유럽 개척의 한계 → 유럽의 팽창이 한계에 도달
나) 백년전쟁, 흑사병, 계속되는 기근 → 인구감소와 경기침체
다) 상품화폐경제, 도시의 발달로 자급자족적인 장원체제 동요
(ㄱ) 상업의 발달은 영주층의 소비 증가, 화폐수요 증가를 초래
(ㄴ) 지출은 증가하는 반면 수입은 감소하여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영주층은 수입 확대 위해 대응책 마련 — 농노제를 완화 또는 강화
③ 농노제 완화(또는 농노 해방)의 경우 — 영국 등 일부 지역
가) 농노제를 완화하는 경우 — 농노가 부담하던 노동 지대(부역)를 현물 또는 화폐로 대체
(ㄱ) 이 경우 농노는 정해진 액수의 현물 또는 화폐만 부담하면 되므로 농업 경영에 있어 자율성을 획득하고 영주에 대한 인신적 예속성도 완화
(ㄴ) 특히 화폐지대인 경우 당시의 화폐가치 하락과 맞물려 농노 부담이 경감
나) 일정액을 받고 농노 신분에서 해방시키는 경우
다) 영주 직영지를 소멸시키는 경우
(ㄱ) 영주들은 토지를 매각하고 도시로 이주하거나
(ㄴ) 또는 농노들을 해방시키고 직영지는 임노동을 고용하거나 소작의 형태로 경영
④ 농노제 강화 – 재판(再版) 농노제
가) 유럽 대륙, 특히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영주층은 봉건적인 공납, 현물지대를 유지하거나 오히려 그 부담을 늘리고자 시도 → 농민반란을 야기
나) 특히 엘베 강 너머의 신 개척지의 경우 넓은 토지에 비해 노동력이 부족하여 농노제가 오히려 강화된 대표적인 경우 — 이 지역의 개간을 주도한 융커()들은 유럽 시장에서의 판매를 목적으로 한 상품작물을 재배
*참고 – 융커
1. 영어의 younger에 해당되는 말로서 신흥 귀족이라는 의미이며 대규모 개간을 통해 대토지 소유자가 된 이들을 지칭
2. 후일 프로이센의 지배층으로 성장
⑤ 농민 반란
가) 원인 — 백년전쟁, 흑사병, 기근으로 궁핍해진 상황에서 영주층이 봉건지대를 인상하거나 농노제를 강화하자 농민들이 이에 반발
나) 영국의 와트 타일러의 난
(ㄱ) 왕과 제후 등 봉건 지배층에 의해 봉건 지대 인상 + 백년전쟁 전비 조달 위해 세금 인상 + 노동조례를 제정하여 임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억제 등의 조치가 잇따르자 농민층의 불만이 폭발
(ㄴ) 당시 종교개혁 운동과 연결되어 위클리프파, 롤라드파가 대거 참여
(ㄷ) 와트 타일러의 난 이후 농노해방이 순조롭게 진행
다) 프랑스의 쟈크리의 난 — 백년전쟁의 와중에 발생하여 프랑스의 혼란은 극심
라) 독일도 농민반란이 종교전쟁, 30년 전쟁과 연계되어 복잡하게 진행
*참고 – 쟈크리
당시 프랑스 농민이 입던 작업복의 명칭이 ‘쟈크리’여서 농민반란을 쟈크리의 난이라 부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