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토론모임 시드니시나브로
‘상처 입은 감정의 치유’ (Healing Wounded Emotions)를 읽고
마르틴 파도바니 / 분도출판사 / 1999.4.30
– 책 리뷰

내 서재에는 유난히 치유와 관련된 책들이 많이 있다. 나도 모르는 상처가 내 안에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서점에 가면 자연스럽게 치유와 관련된 책을 샀던 것 같다. 오늘은 나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책 한권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 책은 심리학과 신앙, 신학은 서로를 도와가면서 상처 입은 영혼들의 내면 세계를 치유하는데 힘을 모으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에는 나이테가 생기듯이,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삶을 살아가면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입기도 한다.
인간은 심리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다. 심리학 (psychology)의 어원인 ‘psyche’는 마음. 정신, 혼이고, ‘logos’는 지식. 연구를 뜻한다. 성경의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 (Spirit)과 혼 (Soul)과 몸 (Body)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에서 인간을 영-혼-육의 삼중구조로 나누었다. 여기서 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푸쉬케 (ψυχὴ)가 영어로 ‘혼’ (Psyche)이다. ‘혼’이란 용어를 ‘마음 (Mind)’ 혹은 ‘정신 (Soul)’이라고 한다.
저자는 지난 반세기 동안 인간의 몸과 마음과 영에 관심을 두고 심리학과 신학을 통합하여 인간을 설명하고 있다. 책은 16개의 주제를 바탕으로 인간이 직면하는 다양한 문제를 ‘심리학과 신학의 통합’으로 풀어가고 있다.
1. 문제 Problems
“상담과 심리 치료의 근본적인 목표 가운데 하나는 고통을 호소하는 개인과 부부들, 그리고 가정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안정성은 우리의 유한성과 이 세상의 한계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인간의 불안정성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 세계의 유일한 안정 영역을 초월해서 크리스천들이 천국이라고 부르는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안식과 평화가 지배하는 곳을 숙고하게 합니다.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삶은 문제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살아있음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 문제가 없는 곳은 단 한군데 있다. 공동묘지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은 자에게는 문제가 없다. 인간의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은 인간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정상적인 실존의 일부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며, 그 문제들을 통해 자신의 발전과 성숙을 이룰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태도이다. 자극은 같지만 반응은 다르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쿠션이 있기 때문이다. 쿠션은 우리의 마음의 태도이다.
2. 종교 Religion
“종교는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 희망, 평안 그리고 위로를 가져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삶의 불행을 경감시켜야 하는 것이지 가중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에 대한 참된 종교적 신앙을 우리 삶 안에 일치시켜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비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편을 드시는 분이지 우리를 대적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기독교와 타종교의 본질적인 차이는 타종교는 ‘자기의 의’로 ‘구원’ 받을 수 있음을 믿고 ‘행위중심’의 종교생활을 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의 의’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고 ‘믿음중심’의 신앙생활을 한다. 기독교인이 ‘자기 의’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한다면,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자기 의’란 행위의 의이고, ‘하나님의 의’란 믿음의 의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했다. 신앙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굴레를 씌우지 않는다.
3. 종교와 심리학 Religion and Psychology
“참된 종교와 참된 심리학은 서로의 가치를 증가시키고 보완합니다. 심리학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과 접하고 종교를 통하여 하느님과 접하게 됩니다. 이 둘을 통합시켜야 하며,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 보완적인 것으로 인지해야 합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신을 알라’고 충고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되라’고 하였으며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을 인간 (人間)이라고 한다. 간 (間)은 ‘사이와 관계’라는 뜻으로 인간은 관계적 존재라는 뜻이다. 3종류의 관계가 있다. 위로는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 옆으로는 사람과 수평적 관계, 안으로는 나와 내면적 관계이다. 하나님과 관계는 대신관계, 인간과 관계는 대인관계, 나와의 관계는 대아관계이다. 인간은 전인적인 존재로, 인간구원은 전인구원이다. 구원이란 ‘소테리아’는 영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전인적인 차원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4. 하느님의 뜻 God’s Will
“때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은 삶에 대해 대답하기 힘들지만 정직한 질문을 회피하려 할 때 사용되거나, 우리에게 닥친 일의 더 깊은 의미를 헤아려 보기를 외면할 때 일종의 도피로 사용합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삶의 주체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옆으로 물러나 소극적인 삶을 영위할 때는 소위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거룩함이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거룩한 백성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한 자요, 세상과 구별된 존재이다. ‘거룩, 성화, 성결’이란 것은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성도, 성민’이란 구별된 백성이란 뜻이다. 구약시대에서는 ‘성도’라는 말 대신 ‘성민’이란 말을 썼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신 14:2) 히브리어로 ‘거룩’을 ‘코데쉬’라고 하는데 “잘라낸다”, “구별하다”라는 뜻입니다. 성화는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어거스틴은 “성화는 여인의 화장과도 같다” 고 했다.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거룩함이 하나님의 뜻이다.
5. 분노 Anger
“우리가 느끼게 되는 분노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기르는 것이 중요하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분노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분노를 느끼고, 다루고, 드러내야 합니다.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적절한 방법으로 표출해야 합니다. 잘못은 행동에 있는 것이지 감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우울증은 대부분의 경우 내적으로 전환된 분노입니다.”
감정이란 E + motion이다. 행동하게 하는 힘이다. 상한 감정을 가지면 악한 행동을 하고, 좋은 감정을 가지면 선한 행동을 한다. ‘법보다 주먹이 앞선다’는 말이 있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다는 뜻이다. 우리 안에 있는 상한 감정을 풀지 못하면 병이 된다. 의학이 발달되기 전에는 두 가지 병뿐이 없었다. 화병과 염병이다. 염병은 전염병이고, 화병은 ‘상한 감정’을 억누를 때 생기는 병이다. 우리 안에 분노 (火)를 품고 있는데 어떻게 온전할 수 있겠는가? 감추어진 분노가 표면으로 노출되어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다른 형태로 다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분노를 누르며 소극적으로 반응하면 내가 다치고, 과잉반응하면 상대방이 다친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분노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분노를 표출하는 목적은 상대방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으며, 우리의 느낌이 어떤지를 상대방에게 알게 하는 것이다.
6. 용서 Forgiving
“사람들은 용서한다는 행위와 용서한다는 감정 사이는 간단하지만 중요한 특성을 구분 짓지 못합니다. 용서한다는 행위란 그리스도교적인 신념에 기초해 내린 결정입니다. 이성에 근거한 의지적이고 지적인 행동입니다.” “실제적으로 용서한다는 행위는 이루어졌어도 감정상의 용서는 때가 되어야 오게 됩니다. 죄란 우리의 감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용서에 있어 한 가지 중요한 면이 있는데, 잊는 다는 것이 곧 용서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거치지 않은 잊음은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과 상처를 기피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생각도 힘들지만, 적용이 더 힘들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 “그 사람을 생각만 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등은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가를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정말 쉽지가 않다. 특히,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할 때의 분노는 뭐라 표현할 수 없다. 남을 용서해 주지 못한 마음은 자신을 아프게 한다. 사람들은 외면의 상처는 보여서 치료하지만, 내면의 상처는 보이지 않기에 방치하고 있다. 인간은 원하든 원치 않던 관계 속에서 살고 있기에,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올드보이’라는 영화가 있다. 피해자인 오대수도, 가해자인 이우진도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만약 당신이 복수를 꿈꾼다면, 먼저 두 개의 무덤을 파라. 한 개는 상대의 것,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것을” 복수는 함께 죽는 자폭과 같은 것이다.
7. 자아용서 Self-Forgiveness

“우리가 그리스도이라면, 우리는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구원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며, 우리 자신과 회해하지도 않은 상태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하지 못한 결과가 됩니다.” “자아 용서는 그리스도교의 구원과 화해에 이르는 마지막 도전이며 정신적 정서적 그리고 영적인 건강과 치유에 이르는 열쇠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용서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용서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관계의 시작은 자기사랑에서부터 시작된다. 자기 사랑의 근거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랑한 나를, 나도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얼마나 큰 모순인가?
8. 죄책감 Guilt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죄가 아닙니다. 우리가 행하는 행위만이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합당한 죄책감은 직시하고 용서와 잘못을 구하며 사죄함으로 해소시키야 합니다.” “죄책감은 일종의 각성제, 즉 우리를 자극하여 변화하게 만드는 신속하고도 고통스러운 충격입니다. 죄책감은 우리가 잘 못한 것을 인정하도록 도와주는데 이것은 좋은 일입니다. 죄책감을 파악한다는 것은 우리의 건정함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죄책감에 압도당하지 않는다면, 죄책감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타인 그리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용서를 구하도록 해줄 것입니다.”
사이코패스 (Psychopathy)는 반사회성 인격장애에 속하는 하위 범주로서, 공감 및 죄책감의 결여, 얕은 감정, 자기중심성, 남을 잘 속임 등을 특징으로 하는 종류이다. 사이코패스는 다른 사람의 슬픔, 두려움 등 부정적 감정에 반응하지 않아 범죄를 저질러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이코패스는 부정적 감정뿐만 아니라 행복 같은 타인의 긍정적 감정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자신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극단적 이기주의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9. 우울증 Depression
“우울증을 유발시키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인 상실의 경험은 절망감을 유발시키고, 이 절망감은 우리로 하여금 무기력하게 느끼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우울증을 유발시키는 근본적이고 가장 흔한 원인들 가운데 하나는 억제입니다. 우리가 고통스럽고 부정적인 감정들, 즉 기억, 공포 등을 우리 안에 묻어둘 때, 우리는 모든 종류의 혼돈스럽고 왜곡된 괴로운 생각들과 감정들을 억제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러한 생각과 감정들을 직면해서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악화되도록 방치해 버릴 경우, 이것은 우리 마음의 평화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우리를 우울증에 걸리게 하는 엄청난 긴장과 내적 갈등을 가중시켜 버립니다.”
우울증은 ‘De (Down) + Press’, ‘마음을 밑으로 누르다’란 뜻이다. 우울감은 마음의 감기라고 할 정도로 흔한 심리적 증상이다. 우울증이란 우울한 감정이 2주 이상 지속되는 경우를 말한다. 몸에 면역체계가 약화되면 감기에 자주 걸리는 것처럼, 마음의 면역체계가 약화되면 우울증에 쉽게 빠진다. 감기를 방치하면 더 큰 병에 걸리듯, 우울증도 방치하면 끔찍한 결과로 발전할 수 있다. 우울증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다. 신체적 원인이면 충분한 휴식과 건강한 식생활을 변경과 더불어 규칙적인 운동을 해야 한다. 심리적 원인이면 상실로 인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환경적 원인은 새로운 관계형성을 통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 생물학적 원인이면 약물을 복용하는 방법이 빠르고 효과적일 것이다. 유전적 요인이라면 우울증의 가능성이 다른 사람보다 높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예방이 최선의 치료일 것이다.
10. 자기비판 Self Criticism
“타인에 의한 비난도 듣기가 힘겹지만 자기 스스로의 비난을 견딘다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그것의 파괴력을 감안할 때 한층 힘든 일입니다.” “자기비판과 자기 비난 사이를 구분하는 경계선은 매우 모호하지만 양자의 차이점은 매우 큽니다.” “자기비판은 정서적, 영적 성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비판은 긍정적이며 생산적인 것입니다.” “자기비판은 우리의 삶에 새로운 활기와 희망을 불어넣어줍니다. 반면 자기 비난은 오로지 절망과 죽음을 가져다 줍니다.”
비난과 비판은 다르다. 비난 (非難)은 ‘다른 사람의 흠이나 잘못을 들추어 사실보다 부풀려 나쁘게 말 하는 것’이요. 비판 (批判)’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대상의 옳고 그름을 가린다’는 뜻이다. 비난은 상대방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 상대방을 부정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힐난하는 것이요, 비판은 상대의 오류를 명확히 지적하면서 그에 대한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경우로 객관적인 평가나 판단을 의미한다. 비판 없는 개인이나 단체 그리고 국가는 고인물과 같이 썩기 마련이다. 건강한 사람은 상대방의 냉철한 비판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마음이 병든 사람은 비판을 비난한다.
11. 자아 사랑 Self-Love
“자아 사랑과 이기심과의 갈등은 너무나 흔한 것이고 또 항상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실제로 이 갈등의 빚어내는 긴장감을 위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냅니다.” “결혼이란 사랑을 받는 경험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 경험입니다.” “핵심적인 크리스천 사상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세 가지 사랑 중에 어떤 하나의 사랑이 없으면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사랑은 자존감이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다르다. 자존심이란 ‘내가 잘났다’는 것이고, 자존감은 ‘내가 소중하다’는 것이다. 자존감은 자존심을 내려 놀 때 비로소 높아진다. 꽃이 떨어져야지만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자존심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자존감이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자존심은 비교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내가 잘났다’는 말 속에는 ‘너 보다는’이란 비교의식이 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열등감 또한 깊다. 왜냐하면 ‘자존심과 열등감’은 비교의식이라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존감은 내가 소중한 것처럼, 너도 소중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관계가 좋다. 상처도 받지 않고, 소통도 잘한다. 자존감이 낮으면 모든 관계에 문제가 있다.
12. 베풂 Giving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것은 주로 의지의 결정과 선택에 의한 행위입니다.” “우리의 감정이란 지속적이지 못하여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감정이 우리의 베푸는 행위를 지배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정이란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순수하게 베푼다는 것의 또 하나의 특징은 때때로 이것이 매우 어렵긴 하지만 베푼 뒤에 생기는 심오한 평화와 만족감입니다.”
베풂을 섬김으로 이해하여 보자. 기독교 영성은 ‘자기 비움’에서 시작하여, ‘성령으로 채움’ 받아, ‘성도를 섬김’으로 완성된다. 섬김’이란 헬라어로 ‘디아코니아’ (Diakonia)라고 한다. ‘디아코니아’라는 말은 식탁 옆에서 시중든다는 의미로 집사 (Deacon)란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교회는 디아코니아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 중심의 공동체에서,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했고, 예수 그리스도도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존재는 아니다. 섬김은 육신적 차원을 넘어, 영적 차원까지 이르러야 한다. ‘복음 없는 섬김’은 ‘구원 없는 봉사’이다.
13. 연민 Compassion
“연민은 성서 전체를 지속적이고 아름답게 엮어 나가는 주제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연민의 하느님, 즉 자기 백성들의 처지를 헤아리시는 다감하신 하느님, 자기 백성들과 항상 접촉하고 계시는 민감하신 하느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연민은 무엇보다도 타인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나타냄을 의미합니다. 연민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 인간미의 절정과 본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가장 큰 죄는 무관심, 즉 타인에게 감정과 연민을 보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연민의 정을 가지고 경청하는 것만이 타인의 영혼으로 들어가 그 영혼을 어루만지며 타인의 마음과 생각을 들여다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연민과 타인에 대해 동정심을 가질 때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인이며 하느님의 연민을 드러내는 대리인인 것입니다. 인간미와 그리스도교는 연민과 감수성의 교차로에서 만납니다.”
Compassion이란 Com (함께) + Passion (고통)란 뜻으로 ‘고통을 받는 자과 고통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긍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에오’는 흔히 ‘불쌍히 여기다’ 혹은 ‘측은히 여기다’라는 뜻이다(마 18:33, 막 10:47).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헤세드’인데 이는 ‘자비’로 번역할 수 있다. 자비를 영어로 Mercy 또는 ‘Compassion’이라고 번역한다. Compassion이란 Com (함께) + Passion (고통)란 뜻으로 ‘고통을 받는 자과 고통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긍휼의 마음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자가 복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주님의 긍휼함을 받는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14. 변화 Change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타인을 변화시키려고 나서게 되면 예기치 못한 어려움과 좌절감에 부딪치게 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연히 거부감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순응하도록 다스려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녀의 내적 변화는 오로지 자녀 스스로의 성숙한 신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리석음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여,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은 수용할 수 있는 평안과 바꿀 있는 것은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이다. 변화의 우선순위는 자신이다. 자기 자신의 변화 없이 결코 타인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15. 뿌리 Roots
“상담과 심리 요법이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으려면 반드시 내담자의 족보를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단순히 단절시킬 수 없으며 또한 과거를 하나의 골동품 가구로 가볍게 처리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세가지 유형의 가족들은 밀착된 가정, 유리된 가정, 그리고 협조적 가정입니다. 밀착된 가정은 엄격합니다. 유리된 가정에 구성원들은 서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협조적 가정은 동조와 무책임한 개성간의 더 나은 균형을 이루어냅니다“
개인의 인격과 인격의 뿌리인 가정은 역사와 같다. 알렉스 헤일리는 ‘뿌리 (Roots)’라는 소설을 썼다. ‘뿌리’는 노예로 납치되어 미국으로 온 아프리카 소년 쿤타킨테와 그 후 2백 년간 그의 후손이 겪는 파란만장한 미국 흑인들의 뼈아픈 역사를 담은 작품이다. 뿌리는 개인의 역사이며 민족의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역사는 사건과 사관의 만남이다. 사건은 어제의 일이고 사관은 오늘의 사람이다. 역사란 과거의 사건을 오늘의 사관이 내일을 위해 쓴 글이다. 지금도 역사는 살아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못한 민족은 역사의 어리석은 전철을 다시 밟는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를 통하여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데 있다”라고 했다.
16. 인정 Affirmation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즉 칭찬받고자 하는 욕구는 우리가 인간적이고, 정서적으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고자 할 경우 필요한 것입니다.” “심리적 장애를 앓고 있는 구성원이 있는 가정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은 인정에 대한 커다란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성, 즉 내적 규율를 발달시키는 것은 건전한 방법으로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안을 마음대로 선택하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 것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깨닫고 인식한다면 우리는 타인들이 지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의 삶에서 균형 있게 인정이 있다면 자긍심이 배양되고 이 사람은 또한 타인들의 자긍심도 배양시킬 수 있습니다.”
과도하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지닌 사람들은 대부분 정서적으로 결핍된 가정 출신이다. 정서적 결핍은 정서적 학대의 또 다른 한 형태이다. 이것은 수동적이지만 파괴적인 것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서서히 파괴시키는 암과 같은 존재이다. 신학 용어에 ‘코람데오’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Before God)라는 뜻이다.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은 사람에게 잘 보이고,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한 삶을 산다.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은 ‘자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로 사는 사람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안다.
– 리뷰 마무리
저자는 서언에 심리적 영역에 대한 접근 없이 영적 치유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은 감성적이고 영적이며 신체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했다. 심리적 영역과 영적 영역은 양분될 수 있는 양상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영역만 강조하고 다른 영역을 도외시하는 것은 두 영역 모두에 대한 이해를 제한하는 것이다. 심리적 영역의 접근 없이 영적 치유가 있을 수 없고, 영적 영역의 접근 없이 감정의 치유는 있을 수 없다. 심리적인 실명 상태는 인간에 대한 무지를 초래하고, 영적인 실명 상태는 신앙에 대한 심오한 무지를 조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철저하게 전인적인 사역을 하셨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Teaching)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Preaching)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Healing)”(마 9:35) “상처입은 감정의 치유”는 감정의 치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치유”를 뜻한다.

김환기 사관 (시드니시나브로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