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Russia Revolution) – 2월(3월)과 10월 혁명
러시아 혁명 (Russia Revolution)은 1917년 2월 (러시아 구력)과 10월 (러시아 구력)에 러시아에서 일어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정권이 수립된 혁명이다.
○ 러시아 혁명 (Russia Revolution)의 배경
– 러시아 제국의 전제군주정치
러시아 제국은 철저한 전제 군주전제 주도하에 근대화 개혁을 점진적으로 나아가, 그 결과 19세기 후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전제정치가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사회구조를 바꾸는 개혁안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자유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회민주당을 결성하여 사회 개혁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 제국은 격동하는 시대에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근본적인 개혁의 소리에 대해서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제국이 변화 되는 것을 두려워했었기 때문이다.
○ 러일전쟁
1904년 2월, 마침내 일본 제국이 러시아 제국이 점유하고 있던 청나라의 뤼순항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러일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은 치열한 공방전 끝에 예상을 깨고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은 애초에 러시아의 여론은 물론이고 일본의 여론,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의 여론마저 러시아의 승리를 점쳤기에 이 전쟁은 러시아에게 큰 타격이었다. 이로써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킨다.
– 피의 일요일
1905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러시아 정교회 사제의 주도로 개혁을 요구하는 민중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민중들은 차르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아버지로 믿었다.
1905년 1월 22일 사제 가폰 신부를 필두로 수많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평화와 굶주림을 달랠 빵을 달라고 하였으며, 노동조합의 설립과 근로조건의 향상들을 아버지 차르에게 요구하였으나, 차르는 그 요구에 무력 진압으로 답했다. 비무장한 시위대를 상대로 차르의 군대가 발포하였고, 달아나는 군중들을 기마대가 추격하여 학살, 이날 하루에만 3,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차르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고 러시아 제국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였다, 자본가의 착취와 노동자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열악한 근무환경에 맞선 온갖 파업 투쟁이 끊이지 않았고 1905년 5월 흑해의 러시아 전함 타우리스 공작 포툠킨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루마니아 정부에 항복하기도 했다.
1906년 한 해 동안 100만 명이 파업을 일으켰고 농민 반란이 2,600건이나 일어났다. 이에 러시아 제국정부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두마’라 불리는 의회를 설치하는 등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생활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 러시아 민중들의 생활고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국민들의 불만은 진정되지 않다가 1907년즈음 가서야 겨우 진정되어 갔었다. 한때 러시아에는 연평균 7%의 산업 성장화를 보이면서 위세를 떨치기도 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차르에 대한 불만세력이 여전하다고 여긴 니콜라이 2세는 이러한 국내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많은 병력을 파병하도록 선전했다.
처음에 민중들은 애국심에 불타서 제1차 세계대전에 많은 지지를 하였고, 무려 1500만 명이나 전선에 나가 지원 했었다.
.국민들의 사기저하와 생활고
하지만, 지휘관들의 무능함으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자멸적인 대패를 초래했을뿐만 아니라,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지원하여 러시아의 노동력은 급격히 저하되었으며, 민중의 복지에 써야 할 국가예산이 전쟁에 사용되면서 민중들의 생활은 오늘 먹을 빵과 우유조차 없을 정도로 아주 어려워졌다.
이는 러시아 제국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말해주는 증거였으며 1917년 러시아 민중들에 의해 공산주의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니콜라이 2세 황제는 1915년부터 직접 전투지휘에 나서며 국정은 황후에 맡기고, 황후를 등에 업은 라스푸틴을 중심으로 국정도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 2월 혁명 (3월 혁명)
– 페트로그라드 시위
제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 됨에 따라 러시아 제국 민중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당연히 러시아 민중들은 민중운동으로 그들의 생존권을 쟁취하고자 하였는데, 1917년 3월 8일 페트로그라드 시위가 그것이었다.
당시 페트로그라드의 민중들은 밀가루 반입량이 절반으로 줄어듦에 따라 빵을 살 수 없었고, 어린이들에게 먹일 우유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빵과 우유를 배급받고자 시민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줄을 서야 했다.
우연하게도 3월 8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었는데, 페트로그라드 여성들은 이날 빵과 우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그들과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이 8만명이나 시위에 가담하였다. 시위는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 대사관의 직원은 시위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했다.
“광장에는 수백만명의 군인들이 군중들을 막고 있고 기병들이 젊은 장교의 지휘아래 군중들을 거칠게 해산시키고 있다. 곧이어 기병들이 물러나자 2열 횡대의 근위병들이 일제히 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혁명가를 부르고 ‘자유를, 시민의 행복을, 조국 러시아의 부흥을’을 외치며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 시위에서 혁명으로
러시아 민중들의 시위는 전쟁에서 돌아오거나 민중시위 진압을 거부한 일부 사병들이 참여하면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로 단결하는 혁명로 발전하였다.
1917년 2월 22일 푸틸로프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고 니콜라이는 수도방위사령관 하발로프에게 군대를 보내 진압하도록 하였으나 2월 27일 군대까지 노동자들의 편에 섰다.
결국 3월 2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동생 미하일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이 혁명으로 폐위되었고, 제정체제가 붕괴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판단하고 정권을 장악하지 않았다.
이렇게 됨으로써, 부르주아와 사회주의자들의 연합 정권인 케렌스키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이때 2월은 러시아 달력에 근거한 것이며, 그레고리력으로 하면 3월 혁명이 된다.
○ 10월 혁명
– 볼셰비키의 지지
이 시기에 사회주의자들로 주축이 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민생이 어려워진 원인인 전쟁을 끝내길 바라는 민중들의 열망을 무시한채,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동시에 경제파탄을 겪자, 민중들의 지지기반을 잃어갔었다.
9월로 들어서자 페트로그라드 시내에서는 볼셰비키가 전국적인 지지를 얻게 되고, 볼셰비키 세력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 볼셰비키 혁명
1917년 11월 7일 (구력 10월 25일) 오전 10시,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트로츠키)가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1000명의 적위대를 이끌고 급습함으로써 케렌스키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음을 선언했다.
이 혁명은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부르는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망명지 스위스에서 급거 귀국한 지 6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 4월 테제
1917년 일어난 2월 혁명 이후 러시아는 귀족·부르주아들의 임시 정부와 노동자·병사들의 소비에트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망명지 스위스로부터 독일 제국이 제공한 봉인 열차편으로 귀국한 레닌은 혁명의 기운이 타오르던 도시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하였다. 이때 그는 자신을 함성과 박수로 환영하는 민중들에게 병사들이 가져온 장갑차에 올라가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친애하는 병사와 노동자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노동자, 병사들의 소비에트를 뜻함)을 러시아 혁명의 승리자, 세계 노동자 군대의 전위로 보고 경의합니다. 제국주의자들의 약탈전쟁은 유럽 전역에 내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세계는 공산주의 혁명의 여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유럽의 제국주의는 금명간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루어낸 러시아 혁명은 이미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계 공산주의혁명 만세!”
또한 레닌은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종전은 불가능하다.” 등 10개 항에 걸친 4월 테제 (April Theses)를 발표했는데, 4월 테제는 곧 볼셰비키의 방침이 되어 “임시 정부 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 정부에 대항했다.
– 임시정부 함락
레닌의 강력한 요청으로 볼셰비키 당 내에서는 봉기의 방침이 결정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의장 트로츠키의 지도하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어 구체적인 계획이 진행됐다.
11월 6일 새벽 2시, 임시 정부 수상 케렌스키가 볼셰비키 신문 인쇄소를 봉쇄하자 트로츠키는 전 부대에 무장봉기를 명령했다. 노동자를 주축으로 하는 적위대가 전화국, 정부 청사 등 주요 거점을 무혈 점거했다.
제2회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린 오전 11시까지는 임시 정부의 거점인 동궁(冬宮)을 제외한 도시 전체가 볼셰비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1월 7일 새벽 2시, 드디어 동궁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소비에트 대회장에 알려지자 대회장은 환호의 도가니로 변했다. 오전 6시, 해가 떠오르는 가운데 레닌이 기초한 대회 선언이 낭독됐다.
○ 러시아 내전
10월 혁명 이후의 내전은 기본적으로 황제를 지지하는 백군과 혁명을 지지하는 적군 사이의 내전을 말한다. 이는 표면적인 것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내전은 레닌 주도의 공산주의 혁명 세력 및 혁명을 지지하는 러시아 국민들과 백군과 백군을 후원하는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이다.
내전 초기의 혁명 국가는 완성되지 못했으며, 혁명 러시아의 국가 체제나 군대 체계는 매우 엉성한 상태였다. 반면에 백군은 제정 시대의 장교들의 통솔력과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후원받은 강력한 무기로 인해 상대적으로 내전 초기에 적군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특히, 알렉산드르 콜차크, 안톤 데니킨, 레오니드 유스포프, 라브르 코르닐로프가 지휘하는 백군은 볼셰비키 정권을 심각하게 위협했었다. 하지만 백군은 공산주의 혁명에 반대하는 구체제로 구성된 귀족출신들이나 장군들이었고, 이들에게 뚜렷한 제도나 정책이 없었다.
이들의 목표는 단순히 볼셰비키 정권을 무너뜨리고 구체제로 회복하는 것 뿐이었다. 그렇기에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백군을 후원하는 세력들의 뒤에는 귀족들이나 자본가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은 백군에 등을 돌려 볼셰비키 정권을 지지했다.
그렇게 됨으로써, 러시아 공산당의 끈질긴 저항과 러시아 인민들의 지지로 인해 1922년부터는 백군 세력이 혁명 러시아로부터 완전히 밀려나가게 되어 패망했으며, 1922년 12월 30일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였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 내전은 이후 혁명 러시아의 미래에 여러 가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첫째로, 공산주의 혁명을 지지했던 많은 노동자 계급이 전쟁 속에서 죽거나 다쳤다.
이는 이후 혁명 러시아의 본래 목적과 이상향이 변질되는데 큰 영향을 준다. 둘째로, 혁명 러시아에 제정 형태의 군사 제도, 사회 제도가 도입된다.
처음에 이것은 내전기의 일시적인 정책으로 시작하였으나, 내전이 끝난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내전기에 들어온 제정 시대의 군인, 관리 계층이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반혁명 시도를 돕게 된다. 셋째로, 내전과 무관하게 적군에 반대했던 무정부주의적 농민, 노동자 집단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내전 이후 공산당에 반대할 대항 세력의 몰락을 뜻했다.
○ 결과
끝으로, 내전으로 인한 극심한 사회 혼란과 경제력 파괴는 이후 혁명 세력으로 하여금 신경제 정책{네프(NEP)}, 즉 일정 부분 자본주의 도입을 허용하게 된다. 이 요소도 이후 소련시기에 스탈린의 반혁명(反革命) 시도에 일조하는 요인이 된다.
○ 러시아 혁명과 소설 ‘동물 농장’
조지 오웰이 쓴 ‘동물 농장’은 이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 시대를 비유해 썼는데, 민중들의 밀가루 반입량이 절반으로 줄어듦에 따라 빵을 살 수 없었던 것을 존스(니콜라이 2세)가 동물들에게 음식을 주지 않은 것에 비유한 것이고, 니콜라이 2세가 쫓겨난 것을 존스가 장원 농장에서 쫓겨난 것에 비유한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 반(反)공산주의 국가들이 연합하여 러시아를 침공한 러시아 내전은 인간들이 동물 농장의 몇몇 동물을 포섭하여 쳐들어 온 것으로 비유되었다. 일반적으로 나폴레옹은 이오시프 스탈린, 스노볼은 트로츠키를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부록 : 러시아 2월 혁명 (February Revolution)
2월 혁명(February Revolution)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7년 3월 8일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러시아 혁명이다. 로마노프 왕조가 세운 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었으며, 러시아 제국은 멸망했다. 이후 몇년 간의 혁명과 내전을 거쳐 소비에트 연방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 2월 혁명 (러시아 혁명의 일부)
.날짜: 1917년 3월 8일-3월 16일
.장소: 러시아 제국 페트로그라드
.결과: 혁명파의 승리, 러시아 제국의 붕괴, 러시아 공화국 건국
이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는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그레고리력과는 다른 율리우스력이 채용되고 있었으며, 두 달력 간에 13일의 차이가 존재했다. 따라서 혁명은 현재의 그레고리력으로 3월에 일어났지만, 율리우스력으로는 2월에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 혁명에 참여한 이들은 러시아 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노동자였으며, 사병들이 혁명에 참여하며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로 단결하였다. 민중들이 2월 혁명에 참여한 이유는 러시아 제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극도의 생활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 배경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은 유럽의 강국을 끌어 들여 각 국은 총력전을 펼쳤다. 러시아 제국도 세르비아와의 상호 협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오스트리아 방면에서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그러나 독일전에서는 1914년 타넨베르크 전투와 이듬해 1915년 고를리체-타르누프 전투를 시작으로 패배가 이어졌고, 러시아 국내에서는 길고, 고통스러운 전시 생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다. 황제에 대한 농민의 존경은 변함이 없었지만, 라스푸틴이 영향력을 행세하는 독일 제국 출신의 알렉산드라 황후에게는 노골적인 불만을 나타내는 등 국내의 불안 요인이 짙어지고 있었다.
– 혁명 발발
국제 여성의 날이었던 1917년 2월 23일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식량 배급의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는 수만 명 규모까지 확대되었지만, 처음에는 온건하게 진행되었으며, 수도의 치안을 담당한 하바로프 장군도 경찰과 기병대의 투입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위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도시 노동자 대부분이 참여하게 되었다.
총리의 니콜라이 골리친은 사태 수습을 포기하고 전선의 니콜라이 2세에게 사임을 제안했지만, 황제는 이를 거부했고 하바로프에게 시위를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26일 시내 중심의 넵스키 대로의 시위대에 경찰 부대가 발포하여 다수의 시민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해 파블로프스키 연대 소속의 일부가 병사가 반란을 일으켰다. 시내에 주둔한 다른 연대에서도 반란병의 진압과 노동자 측의 참여에 혼란스러워 했다.
두마 의장 미하일 로쟌코는 대본영에 있는 니콜라이 황제에게 수도가 무질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신속하게 알리고,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여 민중의 불만을 가라앉힐 것을 요청했다. 이 연락을 받은 니콜라이 2세는 이바노프 장군에 몇 개 연대를 수도로 보내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다음 날이 되자 다른 연대의 귀추도 결정되어 있었다. 볼린스키 연대는 병사가 상사를 사살하고 거리로 나섰다. 저녁 때 또 다른 연대가 반란에 가담하면서 반란 병사의 규모는 수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에 따르면, 봉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휴가를 보내고 있었던 부대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반란 병사와 노동자는 내무부, 군사령부, 경비대 사령부, 경찰, 무기고 등을 습격하여 무기를 손에 넣었다. 하바로프 장군은 해군 본부 건물에서 농성을 시도했지만, 병사의 탈주는 그치지 않았고 부대는 즉시 해산되었다. 27일에는 모스크바에서, 3월초에는 다른 도시에서도 혁명이 시작되었고, 군부대도 거기에 동조하고 있었다.
– 소비에트 결성
의회 해산을 황제에게 명받은 의장 로쟌코는 이러한 혼란을 보고 의회 의원 12명으로 구성된 임시위원회를 설치했다. 황제에 대한 충성에도 불구하고 로쟌코는 다음날 새벽 위원회가 정권을 장악하기로 결정하고 2월 28일에는 각 부처를 접수했다.
그즈음 멘셰비키 소속 의원이나 노동자 대표 등으로 1905년과 비슷한 소비에트의 결성을 호소할 수 있었다. 이날 밤 회의에서 임시 위원이었던 멘셰비키의 니콜라이 치헤이제가 의장으로, 임시 위원으로 당시 혁명파 의원으로 유력자로 주목 받고 있던 사회 혁명당 의회 의원 케렌스키를 부의장으로 하고 페테르부르크의 소비에트가 결성되었다. 동시에 선출된 집행위원 15명 가운데 급진적인 혁명을 주창하는 볼셰비키는 2명뿐이었다.
○ 부록 : 러시아 10월 혁명
10월 혁명, 혹은 볼셰비키 혁명 (十月革命)은 1917년 2월 혁명에 이은 러시아 혁명의 두 번째 단계이다. 10월 혁명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도하에 볼셰비키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기반한 20세기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혁명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10월 혁명의 진짜 주체는 레닌 등의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아닌, 민중들이었다. 그래서, 모스크바에 특파원으로 와 있던 일본 언론인은 민중혁명의 기운이 달아오른 모습에 대해 “노동자와 사병들이 근위병들의 탄압에도 혁명가를 부르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레닌 자신도 “혁명이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몰랐다”고 했다고 한다.
– 10월 혁명 (러시아 혁명의 일부)
.날짜: 1917년 11월 7일
.장소: 러시아 공화국 페트로그라드
.결과: 볼셰비키의 승리, 러시아 공화국의 붕괴, 소비에트 러시아의 건설, 러시아 내전의 시작.
10월 혁명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분열하여 형성된 좌파 세력인 볼세비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일련의 러시아 혁명 속에서 로마노프 왕조의 제정을 붕괴시키고 공화국을 탄생시킨 2월 혁명에 이은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10월 혁명에서는 2월 혁명으로 출범한 입헌민주당(카데트) 주도의 임시정부가 쓰러지고 임시정부와 병존하고 있던 볼세비키 중심의 소비에트(노동자, 농민, 군인위원회)로 권력이 집중되었다. 이것에 이어 러시아 내전( 1917 – 1922 )이 일어나, 결국 1922년에 사상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탄생한다.
당시 러시아는 율리우스력을 채택하고 있었으며, 현재의 태양력에 비해 13일이 늦었다. 따라서 양력으로 계산하면 11월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고유명사로 고착되어 계속 10월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 배경
러시아 혁명 이전에 진행하고 있던 급속한 산업화 등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라 농업을 중심으로 한 전통 사회는 타격을 받고 흔들리는 한편,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샐러리맨 등 전문가 계층이나 교육을 받은 중산층이 러시아에서 부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시민들이 힘을 얻고, 삶의 발전을 구한 것은 당연한 일로, 구체제 하에서 이러한 이들의 욕망이 혁명의 밑바탕이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도 러시아 사회에 충격을 주어 혁명에 불을 당기는 외적 요인이었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많은 전사자가 났고, 산업과 경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으며, 시민들의 생활은 빈곤으로 허덕이고 있다.
이렇게 시민들의 분노는 위정자에게 향하였고, 제정을 전복하기 위해 1917년 2월 혁명으로 바뀌었다. 이후 임시 정부와 소비에트가 병립하는 이중 권력 상태가 탄생하여 혼란이 계속되었지만, 사람들은 다양한 정치 세력 속에서도 강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을 증명하고 러시아 사회의 변혁을 약속한 볼세비키에게 지지를 보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군의 군기는 혁명 전보다 오히려 더 소진해 있었던 상태였으며 1917년 9월 1일에 이르면 독일군의 공습을 받아 리가(오늘날 라트비아의 수도)가 함락되었고, 독일군이 국경까지 다다를 위기에 처해 있었던 상태였다. 아기에게 먹일 우유와 빵조차 모자라서 사람들의 불만도 극에 달해 있었다.
– 과정
.7월 봉기
2월 혁명으로 성립된 임시 정부의 실권은 사회혁명당의 두마 의원으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이었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쥐고 있었다. 전쟁에 지쳐 평화를 바라는 병사에 반해 육군 장관을 겸임하였던 케렌스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지속을 주장했다. 6월 16일 (율리우스력), 그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에 갈리시아 공격을 시작한다. (케렌스키 공세) 서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사기 하락으로 전선은 붕괴되고 7월 2일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7월 6일에는 반대로 독일군 –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러시아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급기야 8월에는 독일군의 리가 공세로 리가를 빼앗겼다.
이 공격 실패를 계기로 병사들의 전쟁에 대한 불만과 노동자들의 배고픔과 어려움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 7월 3일에서 7월 7일(율리우스력)에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세비키가 이끄는 노동자와 병사들이 거리로 나와 임시 정부에 대한 봉기를 시작했다. 페트로그라드 앞바다 해군 기지 섬 크론에서 수병 20,000명 정도가 무장을 하고 페트로그라드로 행진하여 소련에 대한 권력 집중을 요구했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노동자들도 같이 봉기하여 사태는 커졌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시가전이 일어났지만 임시 정부는 군대를 지휘하여 봉기를 진압했다.
이 봉기 이후 임시 정부는 볼세비키가 반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를 포함한 볼세비키 지도자는 체포를 피해 몸을 피했고, 일시적으로 볼세비키의 세력은 후퇴했다. 7월부터 8월까지 볼세비키는 준합법적인 활동을 시작했지만, 러시아 정계에서 극좌의 정치적 위치는 점점 더 강력해졌다. 사회민주노동당 중 과격한 반전파가 1917년 초에 결성한 메지라이온트 (지구 연합파, межрайонцы , Mezhraiontsy, 레프 트로츠키, 아돌프 요페 , 콘스탄틴 유레네프 등이 소속된)는 볼세비키와 거리를 두면서 공동 보조를 취했지만, 8월 초 볼세비키 당대회에서 볼세비키에 통합되었다.
메지라이온트의 지도자들 중 특히 트로츠키는 노동자와 군인들을 격려하고 요페 이후에 “봉기를 위한 조직이 수행하는 모든 실질적인 활동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트로츠키의 지휘를 따르도록 했다”고 쓰고 있다. 이것을 병사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트로츠키와 그것을 위협으로 느낀 스탈린 사이에 권력 투쟁의 시작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요페와 유레네프는 이후 혁명노선을 지지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실행하며 볼세비키의 페트로그라드 제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코르닐로프 사건
8월부터 9월까지 코르닐로프 사건이 일어났지만, 이것도 볼세비키의 세력 부활에 큰 역할을 한 10월 혁명의 촉매가 되었다. 임시 정부군 총사령관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은 혼란스런 러시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임시 정부와 소비에트에 속한 케렌스키와 대립하였다.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를 총사령관에 임명했지만, 그 직후에 코르닐로프를 스스로 군사 독재를 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코르닐로프가 실제로 독재의 음모를 진행해하고 있던 내용도 현재도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가 볼세비키의 협박이나 강요 아래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러시아 국민에게 “죽어 가고 있는 러시아의 대지를 지켜라”라며 당부, 궐기하였다.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에 직면한 케렌스키는 임시정부 군인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볼세비키의 적위대 등 무장 세력에 구원을 요청하며, 무기까지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볼세비키의 설득을 받은 군인과 러시아군 병사들이 코르닐로프를 배신함으로써 유혈사태에까지 이르지 못한 채 실패하고 코르닐로프과 그 지지자 7,000여명이 체포됐다.
.군사혁명위원회
1917년 10월 10일(율리우스력), 볼세비키 중앙위원회는 투표를 실시하여 10대 2로 무장봉기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으며, 시기가 무르익었다”라는 선언을 채택했다.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는 10월 12일(율리우스력)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했다. 이것은 원래 페트로그라드의 방위를 목적으로 멘세비키가 제안한 것이었지만, 무장봉기를 위한 기관을 필요로 하고 있던 볼세비키는 찬성했다. 트로츠키는 “우리는 권력 탈취를 위한 사령부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고 연설하고 노골적으로 무장봉기의 방침을 인정했다. 그는 권력 장악을 승인하기 위해 10월 25일(율리우스력) 개회 예정인 제2회 전국 소비에트 대회에 맞춰 봉기하자고 주장했다. 멘세비키는 군사혁명위원회 참여를 거부했고, 위원회의 구성 멤버는 볼세비키 48명, 에스에르 좌파 (사회혁명당 좌파) 14명, 무정부주의자 4명이 되었다.
그 이후 군부의 각 부대가 차례로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에 대한지지를 표명했고, 임시정부가 아닌 소비에트의 지시에 따를 것을 결정했다.
– 10월 25일
10월 23일 (그레고리력 11월 5일), 볼세비키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에스토니아 인의 얀 안벨트(Jaan Anvelt)는 혁명 이후 설립된 에스토니아 자치 정부의 수도 탈린에서 좌익 혁명 세력을 이끌고 무장 봉기를 시작했다. 10월 24일, 마지막 반격을 시도했던 임시정부는 부대를 동원하여 볼세비키의 신문 《라보치 프치》, 《소르다트》의 인쇄소를 점거했지만, 군사혁명위원회는 이것을 계기로 무력 행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적위대는 별 저항없이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페트로그라드의 인쇄소, 우체국, 발전소, 은행 등 요충지를 제압했고, 10월 25일(양력 11월 7일)에 ‘임시 정부’는 타도되었다. 국가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노병 소비에트 기관이며, 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와 수비군을 이끄는 군사혁명위원회로 옮겨졌다”고 선언했다.
임시정부의 각료가 남아 있는 겨울 궁전에 대한 점령은 25일 오후 9시 45분 방호 순양함 〈아브로라〉 공포사격을 신호로 블라디미르 안토노프 오후세엔코 이끄는 부대가 진입하기 시작했다. 겨울 궁전은 러시아군과 사관학교 생도, 여군이 방어를 맡고 있었지만, 거의 저항없이, 26일 새벽 오전 2시경에 점령되었다. 속수무책으로 회의를 계속했던 각료들은 체포되었고, 케렌스키는 마지막으로 겨울 궁전을 탈출하여 외국으로 망명했다.
10월 혁명의 공식적인 날짜는 겨울 궁전을 제외한 모든 정부 기관이 점령당한 10월 25일 (양력 11월 7일)로 되어 있다. 이후 10월 25일부터 26일에 걸쳐 사건은 소련 정부에 의해 실제보다 극적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영국의 페트로그라드에 주재한 알프레드 녹스는 겨울 궁전의 수비가 제대로 방어를 하지 못하고, 거의 무저항으로 점령당한 모습을 목격하고 쓴 책을 남겼다.[2] 1920년 혁명 3 주년을 기념해서 겨울 궁전에서 상영한 역사재현 군중극 《겨울 궁전 돌입》에서는 겨울 궁전을 점령한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그렸다. 이후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10월》(1928년) 등 10월 혁명을 그린 작품에서도 “겨울궁전 돌입”은 혁명의 절정으로, 격렬한 전투 끝에 겨울 궁전을 제압했다는 줄거리로 다루고 있다.
– 결과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보기 드문 무혈혁명이다. 이 혁명은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등이 이끄는 러시아 임시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1918년부터 1920년 사이 혁명파와 반혁명파간의 러시아 내전을 불러일으켰지만 결국 1922년 소비에트 연방을 탄생시켰다.
1927년 혁명의 10주년을 기념하며 소련에서는 이 혁명의 공식 명칭을 10월 사회주의 대혁명으로 결정했으며, 이 이름은 현재까지 널리 쓰이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