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강의 지상중계(16)
디아스포라, 그 은총과 전략
차별대우
각종 인간 차별에 대하여 아주 원색적인 차별은 오히려 그 대응이 쉽다. 문제는 상대가 편견적인 언어나 행동을 암시적으로나 빗대어 표현할 때이다. 당하는 사람은 분명 차별받았음을 느꼈지만, 정확하게 반박하기는 애매한 상황에 처했을 때이다.
가령 성차별 경우, 여성들이 아무리 설명해도 남성들은 깊이 있게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 인종차별도 마찬가지이다. 고등교육을 받고 또한 인격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사람에게서 느끼는 교묘하고 암시적인 인종차별을 아마도 많은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경험했을 것이다. 또한 본인이 인종적, 성적 편견이 없는 진보적인 사람이라는 의식이 강한 자들에게서 막상 차별대우를 받았을 때, 이것을 본인에게 인정시키는 일은 아주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아마도 이 점이 가장 소수민족이 겪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경우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당했다’고만 생각하면 피해의식에 젖어들게 되어 능동적인 대처가 힘들어진다. 그보다는 먼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먼저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 내가 경험한 것을 아뢰는 가운데 사실은 인종차별을 하는 이가 바로 인격적으로 미성숙 하며 죄에서 비롯된 ‘편견의 감옥’에 갇혀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관대함과 호의적인 새로운 마음을 하나님께 받음으로 차별대우에서 발생한 원망과 쓴뿌리에서 자유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소수민족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 될 것이다. 늘 투쟁하며 견제하고 버티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문화, 그 존재의 의미
다문화적인 호주의 경우 백인의 차별뿐 아니라, 타인종, 타문화의 차별들이 참 많다. 미국의 경우에는 다양성 가운데 ‘미국’이라는 정체성이 하나 되게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데, 호주는 좀 다른 것 같다. 호주가 다문화 정책을 펴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이들은 다문화는 타문화의 음식 정도 먹어주면서 결국 다른 민족들은 백인 중심의 문화를 따라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러한 다문화 개념은 매우 시대에 뒤쳐진 인식이다.
그러나 사회학적 연구 결과를 보면 대부분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소수민족과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고받는데 익숙하게 된다. 그래서 소수민족은 그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의 존재만으로도 그 사회를 개혁하고 있는 것이며, 세대가 지나면 반드시 그 사회가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교회는 의도적인 전략과 참여가 필요하다. 설교하고 자녀 교육할 때 민족성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녀들이 호주에 미쳐야 하는 긍정적인 영향력, 자녀들이 이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주는 것 역시 중요하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국가가 더 중요한가?’ 혹은 ‘혈통이나 민족성이 더 중요한가?’와 같은 질문만 하기보다 아이들이 분명한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이기적이고 고립적인 국가관과 민족관을 가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은 신앙관의 정립과 함께 교회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신앙적 수단’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선교를 나가면 그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듯, 우리의 자녀들이 호주 사회에 살면서 한국인의 정체성만으로는 살 수는 없다. 우리의 자녀들이 다방면의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그들의 국가/민족관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흩어지는 이유
그렇다면 우리가 호주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겠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적인 관점으로 생각한다면 그 이유에 대한 일정한 패턴이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 아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을 꾸준히 이동시키신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창세 이후 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은 흩으시기도 하고 모으시기도 하신다. 사실 사람들이 흩어지는 이유는 현재의 상태가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최고 상류층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데 굳이 다른 나라로 가려하지 않는다. 현재의 상태보다 더 나은 상태로 변화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교사들의 경우도 여러 가지 이유로 선교를 떠난다. 그런 9가지가 개인적인 이유이고, 1가지가 선교적 사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1가지 이유만으로도 구원계획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불만스러운 상태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더욱이 우리가 호주에 있는 이유는 성경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찾을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을 쫓겨난 것도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에덴동산에서 구원의 열매를 통하여 인간이 계속 타락한 상태로 그 생명을 지속한다면 구원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벨탑 사건도 인간의 흩어짐이 하나님의 벌이시는 구속의 역사였다. 그 회복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 성령이 오신 오순절에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것 역시 하나님의 진노이지만, 예레미야 29장부터는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그 흩어짐의 목적을 바꾸신다. 즉 거짓 선지자들은 곧 포로 생활이 끝나고 고향 땅으로 귀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 유배지에서 가족을 이루고 정착하여 살라고 말씀하셨다. 포로인의 삶이 아니라 그 땅의 정착민으로 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바꾸신 것이다.
이처럼 ‘흩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펼치시는 중요한 도구이다. 따라서 그 이후로는 선교와 디아스포라를 엄격히 나눌 수 없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유년시절을 보내셨던 베들레헴과 갈릴리 지역도 팔레스타인의 영토였기 때문에 예수님 역시 자국민이 아니셨다. 메시아 예수님도 타국 땅에서 오신 것이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타문화에서 본토에 많은 도움을 주고 여러 민족의 사람들에게 유대교를 전파했다. 그들을 통해 복음 전파의 좋은 길이 준비되었다. 예수님 시대 이미 유대인들은 여러 문화와 언어 습득했다. 이로 인해 바울의 경우 이방인 위한 사도로 선택 받았다. 바울은 3개 국어 이상을 구사할 수 있었고, 유대교육과 로마교육을 받았다. 즉 그는 유대인인 동시에 로마 시민권자로 당시 이미 세계화된(globalised)된 사람이었다.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우리 자녀들 역시 바울과 같이 세계화된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장차 바울과 같은 역할을 감당해야 할 ‘다음 세대’이다.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연결하는 고리였다. 이와 같이 디아스포라 한인 교회는 호주의 많은 타문화 교회와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또 우리의 자녀들 가운데 유엔이나 국제기구에서 민족을 대표하면서 중재 역할을 할 인재가 나와야 할 것이다. 사실 앞으로는 이러한 역할은 미국보다 호주가 더 가능성이 클 수 있다. 왜냐하면 호주의 한인 디아스포라들은 많은 민족과 잘 융화하면서 유연성이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구밀도가 높고 앞으로 복음이 활기차게 일어날 아시아권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디아스포라는 하나님의 구속역사 곧 선교역사이다. 존 하워드 요더가 “디아스포라는 선교다, 선교는 디아스포라다”고 잘 묘사했듯이, ‘흩어지지 않고’ 선교는 불가능하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땅에서 추방당하게 하셨다. 그렇게 쫓겨 다니는 사람들을 통해 복음은 전파되었다. 요즘에는 이동하는 사람들이 정착해 있는 사람들보다 많다. 세계인구 대비 이동인구가 25-30%정도 된다. 불법 이민자들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또한 이동인구가 많다는 것은 선교지가 우리의 눈앞에 ‘스스로 찾아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제 타국으로 파송되는 소수의 해외 선교사들을 통해 선교하는 시대가 아니다. 모든 성도가 본인의 동네로 이주한 자신의 이웃을 선교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언어를 배울 필요도 없이 호스트/거주 국가의 언어(호주의 경우는 영어)를 사용하여 전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따라서 교회는 사람들의 이민 경로나 종착국가를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당장 호주 안에서는 여러 언어로 번역된 성경이 필요하다. 글로벌 시민으로서 한국 자녀들 중에서도 언더우드, 아펜젤러, 모펫 사무엘과 같은 선교사들이 타국에서도, 호주 안에서도 나와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오늘의 디아스포를 살고 있는 우리 세대는 다문화 교육이 잘되어 있고, 우리의 자녀들은 선교하기 신나는 때를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할 수 있다.
디아스포라의 은총
남동생이 전쟁의 갈등을 안고 사는 중동지역의 선교사로 두 번째로 떠날 때 아이들은 만 2살과 만 4살 때였다. 어렸을 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부모를 따라 갔다. 이번에는 4살이라 미국에 친구들도 있고 정이 들어서 아빠에게, “꼭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아빠는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라고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조카는 “엄마 아빠는 어른들에게 예수님에 관해 말하고, 나는 아이들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해야겠죠?”라고 말한 후 “함께 가겠다”고 했다.
선교의 사명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 순간 성령께서 아이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무언가를 주신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세례 요한에게 성령께서 인지능력을 주셔서 태아일 때 엘리사벳의 태안에서 뛰게 하신 것처럼 말이다. 성령의 감화는 말씀에서 오는 것이다. 아이에게 이해가 되든 안되든 말씀을 읽어주면 아이들은 그대로 믿는다.
다니엘은 전쟁 포로였고 에스더는 난민의 자손이었다. 바울은 쫓기는 신세였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의 상황을 통해 그들을 선교사로 만드시는 것이었다고 한마디씩만 해줘도 아이들의 마음에 이 말씀들이 각인된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이 말씀으로 준비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미연 박사 (몰링 칼리지 교수_조직신학, 윤리학)
미국 이민 1.5세 출신의 차세대 신학자.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의 여러 신학교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몰링 칼리지 전임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여름과 겨울방학기간 동안에는 콩고, 인도, 케냐, 말레이시아, 미얀마, 네팔, 르완다. 우간다 등지의 신학교와 교회에서 사역한다. 세계침례교연맹, 아태침례교연맹, 로잔회의 세계선교글로벌 디아스포라 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