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강의 지상중계(5)
구약에 나타난 윤리적 주제들<2>
정미연 박사(몰링 칼리지 교수_조직신학, 윤리학)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 속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반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전에 하신 일을 바라보고 우리는 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
구약에서는 그러한 믿음으로 이루어진 일들이 많이 있다. 절망 가운데 공동체를 이끌며, 하나님의 법대로 살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 안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 따라서 창조론은 기독교 윤리에서 토대와 바탕이 된다. 우리가 삶에서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합당한 결정 즉, ‘하나님을 믿는 내가 그 믿음에 위배되거나 인간으로서의 나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각오’를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왕조 유다의 멸망을 목도해야 했던 비운의 선지자였다. 유다의 멸망 가운데에서도 그는 하나님께 유다의 회복에 관한 미래의 약속을 받는다. 그러나 앞에 놓인 당장의 현실은 매우 절망적이었다. 하나님의 미래약속과 지금 자기 앞에 펼쳐진 현실이 너무나 상반되어 인간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경우 보통 인간은 현실을 회피한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 아무 것도 없는 잿더미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고백한다(렘 32:17).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했다. 나라가 처참하게 망하고 무너져 재건이 불가능한 것 같지만,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에 반드시 다시 일어서는 날이 올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언약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윤리적 기준으로서 ‘언약’과 ‘율법’ 그리고 ‘예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언약’은 약속이고, 약속은 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이러한 언약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윤리적 기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과 한 약속은 인간 사이의 약속과 매우 다르다. 유일한 예로써, 바로 부모와 어린 자식과의 약속을 들 수 있다. 그 약속에서 부모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소위 ‘갑과 을의 계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가 약속을 못 지켜도 부모는 지키려고 온힘을 다한다. 아이가 약속을 안 지켜도 부모의 약속은 파기되지 않는다. 동등하지 않고, 주고받는 관계도 아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약속이 그렇다.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신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약속을 했다는 것 자체가 큰 성과이다.
율법
또 구약윤리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 그 중에 특히 ‘십계명’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출애굽 당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셨다. 그 후에, 신명기에서 그 2-3세대에게 또 다시 십계명을 주셨다. 그리고 그 때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하나님이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이스라엘이 율법에 대한 전제 상황을 말씀하신 것이다. 십계명 중 후반 6계명은 함무라비 등 고대 법전에도 나오는 당시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던 내용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십계명이 이러한 고대 근동의 문헌을 모방했다고 주장하지만, 근거는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반적인 내용의 십게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직접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데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계명과 율법을 특별하게 만들며, 구약 윤리의 중요한 바탕이 된다.
예언
구약 윤리에서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예언’이다. 예언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을 통하여 그 뜻을 파악하여 전달하는 것이다. 모세오경 이후 예언서를 포함한 모든 구약 성경은 모세오경의 적용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모세오경을 확실히 알아야 다른 구약 책들의 내용을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특별히 우리는 예언서에 나타난 ‘예언자들’에 대해 좀 더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예언자는 하나님 말씀의 ‘전달자’를 말하며, 때로는 ‘통역자’로 번역된다. 통역자로 번역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개념으로 해석되어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지만, 이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보전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구약 성경에는 다양한 예언자들이 등장한다. 또한 선지자 학교가 있어서 실제로 예언자들은 훨씬 더 많았으며, 거짓 선지자들도 많았다.
예언자들
성경에 등장한 예언자들은 그 배경이 다양하다. 아모스는 교육을 받지 못했고, 가난해서 다른 사람의 양치는 일을 돕거나 남의 농장에서 일해주고 품삯을 받는 일꾼이었다. 반면, 이사야는 왕족 출신이고 예레미야는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좋은 환경에서 자라면서 선지자로서 교육 받은 엘리트들이었다. 이렇듯 다양한 배경의 선지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선지자로서의 선택 여부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 준다. 우리는 예언서를 볼 때 흔히, ‘예언’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언자들과 그들의 환경과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사야는 원래 제사장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 이스라엘은 당시 번영을 누리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그 내부를 들여다보셨을 때 그 나라는 썩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여호와께 잘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웃시야 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이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이사야는 왕의 보좌 보다 더 높은 보좌를 보았다. 그곳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비로소 이스라엘의 심각한 타락의 상태를 전하여 듣게 된다. 이러한 이사야의 상황(context)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윤리적 관점에 파격적 차이를 가져온다. 즉, 옳고 그름의 윤리적 기준은 인간의 생각과 판단이 아니다. 오직 인간의 보좌보다 더 높은 거룩한 보좌 위의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는 아모스도 마찬가지였다. 유다의 가난한 농부였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던 그는 어느 날 하나님께로부터 예언자로서 부르심을 받는다. 이스라엘의 타락과 그로 인한 심판에 관하여 전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농부로서 그러한 예언자의 사명을 거부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미연 박사 (몰링 칼리지 교수_조직신학, 윤리학)
미국 이민 1.5세 출신의 차세대 신학자.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의 여러 신학교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몰링 칼리지 전임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여름과 겨울방학기간 동안에는 콩고, 인도, 케냐, 말레이시아, 미얀마, 네팔, 르완다. 우간다 등지의 신학교와 교회에서 사역한다. 세계침례교연맹, 아태침례교연맹, 로잔회의 세계선교글로벌 디아스포라 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