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자크루이 다비드의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자크루이 다비드 / 1800년 / oil paint / 루브르 박물관
미모와 지성을 갖추고 긴 의자에 앉아 있는 레카미에 부인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얼굴과 고전적인 자세, 낮은 의자, 왼쪽의 길고 가는 스탠드 등 ‘신고전주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걸작으로, ‘나폴레옹 대관식‘과 마주 바라보도록 전시되어 있다.
‘다비드’의 의도와 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이지만, 정작 주문자였던 파리 은행가의 아내 레카미에 부인은 불만을 느껴, 2년 후 다른 화가에게 다시 초상화를 주문하였다.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Portrait of Madame Récamier)은 다비드의 그림 가운데 미완성 작품이다. 한 여인이 긴 의자에 누워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화면 구성은 매우 단순하다. 의자, 쿠션, 발받침, 촛대가 전부다. 단순한 구도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도드라지게 한다. 헤어밴드를 한 자연스러운 머리, 당당한 얼굴 표정, 자연스러운 포즈, 고대 로마풍의 흰색 옷은 단순함과 품위를 추구한 신고전주의적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그림은 군데군데 캔버스의 흰색 부분이 보일 정도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작품이다. 다비드는 당시 프랑스 사교계를 주름잡던 레카미에 부인으로부터 초상화를 의뢰받았지만, 이 작품을 완성하기도 전에 부인이 다비드 제자에게 초상화를 다시 의뢰함으로써 다비드는 이 작품의 제작을 중단했다.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은 다비드가 초상화에도 뛰어난 화가였음을 보여준다. 단순, 절제, 균형이라는 신고전주의 이상을 효과적으로 재현함으로써 다비드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담은 초상화의 한 전형을 성취했다.

– 자크루이 다비드의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제작: 1800년
.작가: 자크루이 다비드
.재료: Oil paint
.시대: 신고전주의
.소장: 루브르 박물관, 파리
왕정의 말기에 화가로 데뷔해 프랑스혁명 내내 혁명위원회의 중요한 인물로 활동하고, 나폴레옹의 시대가 오자 그의 최측근이 된 화가, 그는 바로 자크 루이 다비드다. 그 생존력과 권력지향적 성격은 훗날 많은 비판을 받지만 이 격동기에 그의 업적은 실로 엄청나다.
프랑스혁명 직전 장식에 치우치는 데다 귀족 취향의 퇴폐적 분위기에 빠져 있던 예술 흐름을 바꾸기 위해 서양문화의 원류라는 그리스·로마 예술의 미학을 기본으로 기본을 다진 예술운동을 신고전주의라고 한다. 다비드는 이 신고전주의의 핵심이었다.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은 그의 스타일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파리의 유력한 은행가의 아내였던 쥘리에트 레카미에는 19세기 초반 가장 눈에 띄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앞서가는 패션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자주 받았다. 이 그림에서 레카미에는 폼페이식 가구들과 함께 간결한 배경을 바탕으로 고전을 되살린 복고풍의 옷차림을 선보이고 있다.”
다비드가 그린 이 초상화는 구도부터 좀 특이하다. 원래 19세기 전후로 초상화들은 세로로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가로 구도를 가지고 몸 전체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파리 사교계의 최고 스타라는 쥘리에트 레카미에이다. 스물세 살에 불과한 그녀는 자신의 영향력과 유명세를 알고 이용하는 데 능했다. 다비드가 초상화를 착수했다는 사실은 그럴 듯한 둘 사이의 소문들과 함께 사람들에게 화제가 됐다. 작가는 이 그림을 어떤 방향으로 소화할 것인가.
“장식이 절제된 가구들과 세부사항을 모두 생략한 간결하고 단순한 배경이 이 그림의 우아함을 극대화한다. 다비드는 의도적으로 이 초상화의 화려한 장식이나 눈을 분산시키는 모든 것을 없앴다. 고대 로마를 연상시키는 긴 의자와 골동품 같은 촛대, 입고 있는 옷은 이 시대 유행한 신고전주의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17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이탈리아 폼페이의 유적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고전 로마에 대한 향수를 더욱 자극한다. 독일의 미술사가 빙켈만의 책을 열심히 읽었던 다비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신고전주의는 예술의 기초를 다지는 것과 함께 고전 고대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그림에 쓰인 가구는 폼페이 발굴과 함께 당시 유행하던 종류였다. 그리고 길게 늘어뜨린 드레스의 아랫자락은 오래된 우아함을 극대화한다.
“이 그림의 완성되지 못한 부분은 전체적으로 시적인 분위기를 흐르게 한다. 인물을 처리하는 마무리와 배경의 최종적인 정리가 아직 안 끝난 미완성의 작품이 된 이유는 다비드 본인 때문이다. 다비드는 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완성을 하기 전에 고민을 했고, 레카미에는 기다리다가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다른 화가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다시 주문한다. 이에 격분한 다비드는 이 그림을 중단해 버린다.”
결혼한 신분이라 하더라도 연애가 자유로웠던 당시의 프랑스에서는 화가와 모델의 내밀한 관계는 흔한 일이었다. 다비드가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 그림의 완성을 머뭇거렸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후배 화가 프랑수아 제라르에게 새로운 초상화를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그림 완성을 포기한다.
하지만 권력에서 멀어지고 벨기에로 망명을 떠날 때도 가지고 다녔던 점과 그의 만년을 생각해 보면, 다비드에게도 순수한 열정은 중요했던 듯하다. 그리고 이 초상화에서 우리는 프랑스혁명 이후 신고전주의라는 특이한 흐름의 미학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줄리에트 레카미에’에 대하여
줄리에트 레카미에(Juliette Récamier, 1777년 12월 4일 ~ 1849년 5월 11일)는 19세기 초반의 프랑스에서 당시의 정계, 예술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여성이다. 리옹에서 법률가의 딸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잔 프랑수아즈 줄리 아델라이드 베르나르 레카미에(Jeanne-Françoise Julie Adélaïde Bernard Récamier)이다.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 레카미에 부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녀보다 30세 가까이 연상이었던 남편 자크 레카미에는 부유한 은행가였고, 레카미에 부인 본인도 뛰어난 미모에 높은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레카미에 부부는 루이 16세 시절 재무장관 자크 네케르의 저택이었던 쇼세 당탱에 살았다. 레카미에 부인의 살롱에는 프로스페르 메리메, 스탈 부인, 뱅자맹 콩스탕, 장 빅토르 마리 모로, 테레즈 탈리앵, 훗날의 칼 14세 요한이 되는 장 밥티스트 쥘 베르나도트 등이 드나들었으며,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은 수 년에 걸친 염문 상대이기도 했다. 레카미에 부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던 인물 중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있었으나 두 사람의 관계는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와 함께 악화되었다. 1805년 남편의 레카미에 은행이 도산했고 1811년 레카미에 부인은 마침내 파리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수년간 유럽을 떠돌던 레카미에 부인은 1819년 파리로 돌아와 1849년 71세의 나이에 콜레라로 죽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