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호주 시드니에서 신학함을 시작한 형제에게
견시관(見視觀)이라는 말이 있다. 볼견(見), 볼시(視), 볼관(觀)으로 모두 [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두 보는 것이지만 차원과 수준이 다르다. 즉 볼견(見)은 자기식 대로 견해를 가지고 본다는 의미이다. 볼시(視)는 시각을 가지고 어느 방향 어느 차원에서 보느냐를 의미한다. 견해와 시각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긴장과 다툼이 생길 수 있다. 마지막 볼관(觀)은 통찰력을 가지고 중심을 보는 관점이다. 선입견과 편견을 내려놓고 보려는 방편이다. 혼자서는 90도만 보이던 것이 두 사람의 의견과 생각을 가지고 보면 180도를 볼 수 있게 되고 여러 사람들이 모이면 360도 전체를 두루 볼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호주라는 다원화된 문화속(multicultural)에서 살아가면서 신학함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혹자들은 신학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아마도 다양한 현실에 비해서 신학은 단편적인 이론으로 현실적이지 못하다는데서 나온 현상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서 신학지상주의자들도 있다. 다원화 된 사회와 문화일수록 이에 대처하기 위한 걸맞는 신학이론정립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 일리가 있는 주장들이다 그러나 필자는 신학무용론이나 신학시장주의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다양한 이민자 문화속에서 올바른 신학함이 무엇인지 진정성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물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이민자 문화속에서 신학함이란 어느 견시관(見視觀)으로 할 것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바른 신학함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신학함이란 기독교의 메시지(진리)가 무엇인지 바르게 깨닫고 우리의 상황(문화)이 어떻게 진행되어가는 지를 바르게 분별하고 시대를 기억하며 해석해 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신앙과 삶이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작업이요 훈련이다. 이것을 바르게 하기 위함이 바로 신학함이 아니겠는가?
신학함에 있어서 적어도 자신에게 3가지의 물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나는 왜 신학을 하는가(Why)? 둘째는 나는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How)? 셋째는 나의 신학은 무엇을 할 것인가(What)? 이다.
첫째로 나는 왜 신학을 하는가?(Why)이다
이 물음은 신학함의 정체성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민자로 살아가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정체성의 문제였다. 신학함이란 어떤 특별한자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리스찬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본다. 신학함이 꼭 목회를 전제하지 않더라도 분명한 것은 나는 왜 신학을 하는지에 대한 존재론적인 분명한 물음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바로 “인간의 삶이란 해석학적 과정으로서의 삶”(김경재)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꽃이라고 하는 해석학(hermeneutics)은 시공을 달리한 다른 사람들의 내면적 삶의 체험을 ‘오늘 여기’에서 되살려 내어 다시 체험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삶의 질과 양을 더 풍요롭게 해가는 신학도 성서의 해석, 종교적 상징의 의미 독해, 성현들이 경험하고 깨달은 바를 내 체험과 나의 깨달음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도 해석학적 이해 과정 없이는 신학함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나는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How)이다.
이것은 신학함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안셀무스는 “믿기 위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믿을 때” 가능하며 또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는”거라고 했다 이것은 신학과 신앙이 이성과 서로 배제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말은 신학함의 방법론에서 배타성이나 차별성에서 자유하여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자세로 신학함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나의 신학은 무엇을 할 것인가?(What)이다.
이것은 신학함의 내용으로 신(神)을 향한 여정으로서의 ‘신학함’이란 한 가지 뚜렷한 명제로 정의할 수 없는 ‘학문’이다. 그것은 신학의 매력이자 신학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신학은 인문학이면서 인문학을 뛰어 넘는다, 사유는 신학의 출발점이지만 어느 순간, 신(神)의 섭리 안에서 사유 자체를 지워야 하는 자기 부정의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 신학함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견시관(見視觀)을 뛰어 넘어 죽을 때까지 영적인 영안(靈眼)을 가지도록 마음을 비우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우는 훈련을 전제로 하고 있다(빌 2:5~8).
호주 시드니에서 신학함이란 다양성 앞에서 신학함의 삶에 주목함으로써 신학함의 참모습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숙제요 과제다. 그 어떤 신앙고백보다도 거룩하고 아름다운 신(神)을 향한 진솔한 여정의 길이길 함께 빌며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의 기도로 중보하고 싶다
“당신을 찾도록 저를 가르치시고
당신을 찾는 이에게 보여주소서, 왜냐하면
당신께서 가르치시지 않으면, 저는 당신을 찾을 수도 없고
당신께서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발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그리워하면서 찾게 하시고
찾으면서 그리워하게 하소서
사랑하면서 발견하게 하시고
발견하면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