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단상
기러기아빠를 넘어서
아버지는 위대하다. 위인전을 보라. 역사 속에서 중대한 업적을 이룬 주인공들은 거의 다 아버지들이 아닌가. 아버지가 된 남자들이 큰일을 해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근대 과학의 아버지’ 같은 표현에서처럼, 몇몇 아버지들은 어떤 분야에서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역사의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북한에는 ‘어버이 수령’으로 등극하여 온 백성의 절대 우상으로 군림해온 아버지와 그 아들이 있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사제를 ‘신부(神父)’라고 지칭하고(영어로는 ‘holy father’이지만, 보통은 그냥 ’father’라고 칭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가리켜 아예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렇듯 아버지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였고 역사를 만들어왔다. 과연 ‘history’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아버지들은 불쌍하다. 중년 돌연사 1위, 40대 남성자살률 1위 (이는 같은 연령대 여성의 자살율의 4배에 이른다) 등의 통계 수치는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그들의 삶은 어떻게 묘사되는가. 한국의 현대 문학사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중요한 모티브로서 꾸준한 흐름을 이어왔다. 드라마, 영화, 연극에서 묘사된 아버지의 이미지는 한결 같이 무능하고 초라하다. 그리고 많은 경우 불치병으로 애처롭게 죽어간다. “어느 세일즈맨” “3류 배우” “프루프” – 기능 부전 “주먹이 운다” “어메리칸 뷰티”
‘가족에게 소외받고, 돈 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다.’(신해철 ‘아버지와 나’ 중에서) 그러나 서럽다고 함부로 눈물을 흘릴 수도 없다. 공익광고에서는 힘들어 고개 숙인 남편을 향해 아내가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말라고 노래한다.
자녀에게는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가. 어릴 때에는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소통이 이뤄진다. 그래서 ‘아빠하고 나하고 놀던 꽃밭’의 추억도 있고,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하는 따스함도 있다. 최근엔 요가 등 임산부들의 프로그램에 남편들이 함께 하면서 태교에도 동참하고, 출산과 그 이후의 육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나고 발랄했던 ‘아빠의 청춘’이 퇴색하면서 관계는 조금씩 서먹해진다. 자녀의 성장과 교육은 엄마의 몫으로 독점되고 책임도 전가된다. 아이의 성적은 곧 엄마의 성적으로 여겨지고, 사교육 시장의 상품들은 마케팅 전략에서 그 코드를 십분 활용한다. ‘엄마, 수학과 과학이 너무 쉬워졌어요!’ 이 광고 문구에서 ‘엄마’를 ‘아빠’로 바꾼다면? 흡입력은 반감되고 만다. 입시 설명회나 수능 고득점 기원 기도회에 아버지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빠는 그저 돈만 벌어다주면 된다. 그래서 그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이다.
부자 아빠들 가운데 일부가 기러기 아빠가 된다. 자녀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는 한국의 부모들, 이산(離散)과 외로움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헌신하는 아버지들의 모습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갸륵함 그것이다. 한 해가 다르게 점점 늘어나는 기러기 아빠들 가운데는 고생을 감내한 끝에 자녀들의 학업 성공과 가족의 행복을 거머쥐고 비상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경제적으로 빈털터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아이의 교육도 실패하고 이혼까지 당하면서 송두리째 추락하는 인생도 있다. 그만큼 불확실성과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 ‘벤처’ 가족과 기러기 아빠의 삶이다. 아이가 나름대로 그쪽 생활에 잘 적응하더라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하다. 고독과 불면의 밤을 달래려 맥주를 들이키면서 자신이 ‘돈 버는 기계’가 되어 버린 듯한 자괴감이 든다는 아버지, 견디다 못해 휴가를 내서 오랜만에 가족을 찾아갔더니 아이들이 자기를 ‘삼촌’ 취급하더라는 하소연도 들었다.
기러기 아빠. 그것은 우리 시대 가정과 교육을 명상하게 하는 화두다. 거기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위에서 인용한 고백처럼 자녀 교육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돈벌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아닐까. 자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물리적으로 곁에 있든 없든 별로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만일 아버지가 정서적 또는 지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면, 설령 다른 조건들이 모두 갖춰져 있다 해도 과연 그 머나먼 이국으로 떠나 갈 것인가를 두고 심각한 갈등에 빠질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 고민을 거치고 유학을 떠나보내는 가정은 많지 않아 보인다. 대부분 아주 간단하게 결정하고 신속하게 실행에 옮긴다. 민족의 혼란기에 만연했던 ‘아버지의 부재’는 아직도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기러기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들을 외국으로 보내지 않은 가정의 경우에도, 반쯤은 기러기 신세가 되어 있는 아버지들이 대단히 많다. 잠만 함께 잘 뿐 가족들과 의미 있는 교분을 나누지 못하는 이들, 어쩔 수 없이 또는 어찌 하다 보니 정말로 돈벌이에만 온 삶을 바치고 있는 아버지들이다. 그래서 어쩌다가 자녀와 느긋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도 도대체 나눌 이야기나 함께 즐길 놀이가 없다. 자녀의 공부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수험 공부하는 자녀 위주로만 집안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설 자리조차 없다. 어느 아버지는 퇴근하고 돌아와 출출한 허기로 마침 거실 탁자에 놓여 있는 접시의 사과를 집어 먹었는데, 아내가 아이 먹을 것을 왜 건드리느냐며 신경질을 내더란다. 베란다에 가서 담배를 피우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는 생활비에 과외비 버느라고 뼈 빠지게 일하는데 그까짓 사과 몇 쪽 먹었다고 그런 구박을 당하다니…
이런 처량함은 누구의 책임인가. 그러나 그런 해프닝이 문제가 아니다. 대학까지 졸업한 고학력 아버지들이 자녀의 정신적 성장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는 처지를 더욱 슬프게 탄식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아버지들이 받은 교육의 부실함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교육의 피해자로서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그 폐해와 낭비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자. 가난만큼은 물려줄 수 없다고 이를 악물던 의지만큼 단단하게 머리띠를 졸라매자. 모든 교육을 외부에 위탁하고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생활 속에서는 스스로 자녀에게 뭔가를 전해줄 수 있는 능력과 시간이 고갈되기 마련이다. 그럴수록 더욱 바깥에 의존하고 비용은 자꾸 올라간다. 가족관계가 점점 도구화되는 가운데 모두 소외의 길을 내달린다. 만남의 접점이 희미해지면서 저마다의 일이나 공부 또는 놀이로 흩어질수록 가정 공동의 영역은 더욱 텅 비어 간다.
이제 아버지의 존재 가치를 탐색해보자.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그 사회적 또는 직업적 경험들이다. 이는 자녀들과의 대화에서 매우 중요한 컨텐츠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1학년 사회 교과서에는 ‘정경유착’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 학교의 교사보다 훨씬 생생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아버지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아이가 무엇을 배우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아버지들은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정경유착에 대해 열변을 토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귀가 시간이 늦어진다. 그 시간에 아이는 학원에서 그 개념을 암기하고 있다. 아이와 아버지가 집에서 정경유착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면 훨씬 효과적일 뿐 아니라, 술값과 학원비를 절감할 수도 있을텐데. 교과서를 한번 들춰보라. 경험 또는 사회적 학습을 통해 생생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내용들이 여러 과목에 걸쳐 실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그 정보나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 자신이 살아오면서 깨달은 지혜, 어떤 일을 수행하면서 얻은 느낌 등을 전해 줄 수 있다면 아버지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아버지는 조각가였다. 그는 어린 아들에게 돌기둥을 보여주며 ‘이것이 무엇으로 보이느냐’고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냥 돌덩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 돌로 여인을 조각한 다음 ‘이 돌덩이 속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숨어 있었단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 때부터 소크라테스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보든 ‘그 안에 깃든 무엇’을 꿰뚫어보는 습성과 능력을 길렀다고 한다. 이렇듯 아버지의 한 마디가 자녀의 자아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 속에서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가까운 선친들이 남긴 가르침이 가문의 기풍으로 면면히 이어져온 경우를 자신의 경험 또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아버지는 위대하다. 그의 인생과 정신은 자녀들이 자신의 삶을 빚어 가는데 소중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아버지들은 가정 안에 새로운 둥지를 트면서 배움의 보금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그 학습 생태계의 단란한 기운은 교육적 상상력을 복원해줄 것이다. 물론 간단하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들의 결단과 자기 혁신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기러기 아빠들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헌신과 고달픔을 생각하면 아주 요원한 일도 아니리라.
김찬호(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민들레 41호에 실린 칼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