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단상
신호등 없는 학교
신호등이나 중앙선, 교통 표지판이 전혀 없는 도시들이 있다. 뉴질랜드 중소도시는 대부분 교차로에조차 신호등이 없는데, 단 한 가지 원칙은 오른쪽에서 진입하는 차에 무조건 양보한다는 것이다.(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
최근에는 독일, 영국, 덴마크 같은 유럽의 제법 큰 도시에서도 이 실험을 하고 있다고 한다. 독일의 마킹카 시내 진입로에는 ‘교통 표지판 없음’이란 푯말이 걸려 있고, 시내에는 신호등은 물론 도로의 중앙분리선조차 없다고 한다. 아무런 신호도 없는 도로 위를 차들이 서두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달린다. 인구가 4만 5천 명이나 되는 네덜란드 드라체텐 시에서도 교통신호를 절반 이상 없앴더니 오히려 교통사고가 훨씬 줄었다고 한다.
이 프로젝트 창시자의 한 사람인 한스 모더맨은 “교통신호를 없애면 무엇보다 운전자가 책임감을 갖고 사려 깊게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도로 위에 규칙이 많을수록 우리의 사회의식과 책임감은 줄어든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규칙이 아닌 내면의 규칙에 따른 질서가 더 고차원의 질서를 낳는 법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도시에는 신호등과 도로 표지판의 종류가 갈수록 늘어나고 규칙도 복잡해지고 있다. 도로의 신호 가지 수만 6백 가지가 넘는다는 조사 결과가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실제 교통신호 중 70%는 운전자에 의해 거의 무시되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특히 신호가 지나치게 많으면 운전자들은 수시로 신호 위반의 경계를 넘나들거나 주어진 조건에서 최대한 빨리 가고자 서두르게 되면서 오히려 사고의 위험이 커진다고 한다.
교통신호 없는 도로 시스템의 원리는 운전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대신에 더 책임감 있게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도로에서 신호등이 사라지면 사고가 빈발하고 도로가 막혀버릴 것 같지만 실험 결과는 결코 그렇지 않다. 신호가 잘 갖춰진 도로에서는 오히려 신호에만 신경을 쓰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기 위해 작은 신호위반 행위를 일삼게 되지만 도로 상황이 불확실해지면 더 조심하면서 주위를 잘 살피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통 전문가들은 신호 없는 도로에 회의적이었고, 특히 신호(규칙)에 익숙한 독일인에게 무신호 시스템은 작은 마을에서나 가능할 것이라고 봤지만, 1만 4천여 명이 사는 봄멧 시에서도 점차 차도와 인도의 구분을 없앴더니 사고가 줄어들고 교통 흐름이 나아지고 있다고 한다. 교통지옥으로 유명한 런던도 이 시스템에 관심을 갖고 킹스톤 지역에서 제한적인 무신호 실험에 착수했다고 하니, 머지않아 유럽의 신호등 회사는 다 망하지 않을까 싶다.(제주도에는 최근 한적한 도로에도 신호등이 곳곳에 설치되었는데, 제주도민들은 신호등 업체와 지자체 간의 유착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모든 교통신호는 사실상 운전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잔소리인 셈이다. 규칙 덕분에 질서가 생겨나는 측면이 있지만, 그 규칙 때문에 오히려 범법과 무질서가 생겨나기도 한다. 횡단보도가 없다면 애초에 무단횡단도 없을 것이고, 보행자와 운전자는 그만큼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물론 차와 사람들의 통행이 끊이지 않는 도심에서는 어렵겠지만, 비교적 한산한 곳에서는 그 편이 서로에게 편할 것이다.
이러한 도로의 상황을 학교에 적용시켜볼 수 있다. 일반학교는 마치 신호등(주로 빨간 신호등)과 온갖 표시판들로 빽빽한 도로와도 같다. 여학교는 더한 편이다. 양말 색깔, 머리핀 모양까지도 규제하는 것은 어찌 보면 오히려 위반을 부추기기 위한 작전 같기도 하다. 이런 작은 위반을 부추기는 시스템은 고도의 통제 전략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작은 위반사항들에 끊임없이 신경을 쓰도록 만듦으로써 규율에 복종하는 심성을 기르고, 작은 위반을 범함으로써 오히려 내면에 자기검열 시스템이 강화된다.
아이들이 머리를 규정보다 1센티를 더 기르거나 숨어서 담배를 좀 핀다고 해서 학교의 통제 시스템이 흔들릴 일은 없다. 그런 위반은 오히려 체제유지에 도움이 될 뿐이다. 작은 일탈을 통해 아이들은 위장된 해방감을 느끼면서 내면으로는 통제체제에 길들여진다.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반란, 곧 반체제를 도모하는 꿈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되고, 기껏해야 체제 주변부에서 얼쩡거리는 신세가 될 뿐이다.
신호등이 사라진 도로처럼 잔소리 없는 학교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우리가 진정으로 아이들이 책임감을 갖고 자율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라는지 스스로 한번 반문해볼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보다 학교의 규모가 작아져야 할 것이다. 대도시의 도심에서 신호등을 없앨 수는 없듯이, 한정된 공간에 수천 명이 우글거리는 대규모 학교에는 외부에서 강제되는 규칙이 없을 수 없다. 다만 그런 경우라 해도 신호가 불필요하게 많으면 오히려 소통이 어려워진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아이들을 길들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서로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신호만 두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현병호(민들레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