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무 목사의 주일묵상
성도의 질문
주여, 묻는다는 것은 떠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가까이 가고 싶어,
당신의 옷자락을 그저 붙드는 일입니다.
왜입니까, 어찌하여입니까, 언제까지입니까.
성도의 입술에서 나오는 이 물음들은
불신의 칼끝이 아니라, 목마른 사슴의 울음입니다.
시편의 다윗도, 밤마다 베개를 적시며 물었습니다. “주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욥도, 재 가운데 앉아 무너진 삶의 잿더미 속에서 하늘을 향해 따져 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로, 하박국은 탄식으로, 도마는 손끝으로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아무 기대도 없다면 누가 하늘을 향해 울겠습니까.
아무 사랑도 없다면 누가 응답을 기다리겠습니까.
질문은 신앙의 균열이 아니라 신앙의 숨결입니다.
의심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드는 것,
답을 모르면서도 기도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주님, 우리의 질문을 꾸짖지 마옵소서.
연약한 마음의 떨림을 불신으로 판단하지 마옵소서.
오히려 물음 속에서 당신의 더 깊은 뜻을 배우게 하시고,
침묵 속에서도 당신의 임재를 듣게 하소서.
그러기에 오늘도 나는 묻습니다.
왜 이 길입니까, 왜 이 눈물입니까, 왜 아직도 기다려야 합니까.
그리고 질문 끝에 나는 다시 고백합니다.
“주여, 답을 다 알지 못해도 당신을 신뢰합니다.”
성도의 질문은 불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가장 정직한 사랑의 언어입니다.
믿음은 모든 답을 아는 것이 아니라, 답이 없어도 하나님 곁에 머무는 일입니다.
양심 없는 역사관의 문제
역사는 과연 진실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가. 인간은 오래전부터 역사를 기록해 왔지만, 그 기록은 언제나 불완전하였다. 어떤 사건은 확대되었고, 어떤 인물은 의도적으로 지워졌다. 승리한 자의 언어는 찬란하게 남았으나 패배한 자의 침묵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이 한 문장은 역사의 본질적 한계를 예리하게 드러낸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왜곡과 축소, 과장과 누락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현상이었다. 권력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을 선택했고, 불리한 진실은 감추거나 변형하였다. 왕조는 정통성을 위해 기록을 손질했고, 혁명은 이전 시대를 악으로 규정하며 새로운 서사를 만들었다. 식민지 시대의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강대국은 정복을 문명화로 포장했고, 피지배 민족의 고통은 주변부로 밀려났다. 기록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진실은 아니었던 거다.
그러나 더 답답한 것은, 역사의 왜곡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조차 또 다른 해석의 경쟁 속에 놓인다는 점이다. 인간은 과거를 현재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시대적 가치관, 정치적 이해관계, 이념과 감정이 개입되면서 역사는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따라서 완전한 객관은 사실상 존재하기 어렵다. 사료를 모은다 해도 선택의 문제가 남고, 해석을 시도하는 순간 이미 주관은 스며든다. 그래서 역사를 연구하는 일은 진실을 완벽히 소유하는 작업이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도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고독한 노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를 외면할 수 없다. 역사의 유추와 성찰은 때로 거추장스럽고 피곤하다. 과거의 논쟁은 끝이 없고, 진영마다 다른 기억을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를 잃은 사회는 방향 감각을 잃는다. 기억을 잃은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듯, 역사의식을 잃은 공동체 역시 쉽게 선동과 망각의 먹이가 된다. 과거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회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전쟁의 비극을 잊으면 다시 증오가 자라나고, 독재의 상처를 잊으면 자유는 쉽게 훼손된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역사를 주장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서로 다른 기록을 끊임없이 대조하고 질문하는 태도에 있다. 역사는 단순한 암기 과목이 아니라 인간 양심의 거울이다. 어떤 기록이 침묵했는지, 누구의 목소리가 배제되었는지 살피는 작업이야말로 성숙한 역사 의식의 출발점이다. 역사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모두 제한된 시야 속에서 과거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불완전한 기록 사이에서 진실의 조각들을 더듬으며 살아간다. 답답하고 혼란스럽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은 단지 과거를 위한 일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책임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기억 위에 건강한 사회는 세워질 수 없다. 결국 역사의 가치는 완벽한 사실의 독점이 아니라, 진실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성찰하려는 인간의 양심 속에서 살아 있는 것이다.

한상무 목사
(시드니생명나눔교회, smhan21@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