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하의 생명과학 이야기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1)
바르셀로나행 비행기에 탑승하다
크고 작은 일정으로 바쁘게 보내다가 10월에 들어서자마자 한국을 거쳐 10월 15일 스페인의 바로셀로나로 향하는 항공기에 탑승하였다. 유럽으로 가는 소요시간은 지구 자전과의 관련된 시간이 더해져서 14시간 25분이 걸린단다. 긴 시간을 좁은 좌석에서 주리 틀고 앉아 버티다가 어둠이 깔린 20시 15분 바로셀로나공항에 도착하였다. 캄캄한 밤 시간에 바깥 풍경을 파악할 수 없었으나 도심과는 멀리 떨어진 시골들판에 자리잡은 공항인 것 같았다. 도착은 하였지만 이 도시에 관해 아는 것이 없는 자신의 무지에 자조[自嘲]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마라톤의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스타디움이 있다는 몬주익 언덕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을 벌리던 일본선수를 따돌리고 일등으로 스타디움에 뛰어 들어가 환호하는 군중에 두 손을 들어 응답하며 일등으로 골인한 후, 배를 깔고 바닥에 엎어져서 들것에 들려나가던 중계방송의 장면만이 필자의 뇌리속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가 바르셀로나였으니 말이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이튼날 아침 호텔의 모닝콜로 잠이 깬 후에 간단한 식사를 하고 관광버스에 올라탔으며, 스페인의 첫날의 관광은 필자에게는 금시초문인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라는 건축가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길이란다. 몰라도 이렇게 모르고 스페인에 왔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가이드의 가우디의 히스토리[history]를 들으며 늙으막에 스페인에 관해 제대로 공부할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들 긴 하였으나 빠르게 계속되는 가이드의 해설에서 유럽의 건축양식이며 미술사의 어휘들은 필자에겐 난해한 내용이라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가우디에 관해서 무지한 사람은 필자일뿐, 대부분의 다른 여행객은 이 천재 건축가를 알고 있었던 같다. 와이파이가 작동하는 공간이면 안토니 가우디를 검색해 보고 가이드에게서 들은 해설을 참고하며 세기의 천재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나의 뇌리 속에서 마치 동녘의 아침햇살처럼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딴 도시가 바르셀로나가 아니라 안토니 가우디의 도시라는 생각으로 바뀌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가이드가 그의 발자취를 밟으며 전설같은 가우디 이야기를 쉼돌릴 새도 없이 쏟아내니 짧은 시간에 쇄뇌되는 것을 어쩌랴?
안토니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
곳곳에 서려있는 안토니 가우디의 흔적에 놀라움으로 바라보는 관광객들로 꽉차있는 도시같았다. 부활로 하늘나라에 엄존[儼存]하고 있을 것을 확신하는 가우디는 천상[天上]을 향한 그의 염원을 펼쳐보인 작품이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ilia]대성당인 것 같다. 이태리나 프랑스 등 유럽의 대성당을 여러곳 둘러 봤지만 이건 다르구나하는 느낌이 단번에 들어온다. 성당 정문에서 고개를 거의 90˚각도로 제쳐야 겨우 보일까 말까한 여러 개의 탑[塔]이 하늘로 치솟아 있고 성당의 외벽 조각품들은 성경말씀, 그 자체인 것 같다. 예수의 탄생에서 부터 수난과 부활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한 작품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었다. 안토니 가우디의 생애를 검색해 봤다. 가우디는 1852년 6월 25일에 가난한 구리세공업자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폐병과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으면서 평생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사람이다. 다리도 절고 병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니 주위에서 고은 시선으로 바라봐 줄리가 없었으니 연애도 할 수 없었고, 결혼도 못하는 외롭고, 불우한 생애를 살다갔다.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는 그의 정확한 출생지는 밝여진 바 없으나 스페인의 동부도시인 타라고나 시에서 서북쪽으로 6km 떨어진 레우스(Reus)에서 출생하였거나, 아니면 레우스에서 2km 더 서쪽으로 위치한 리우돔즈(Riudoms) 둘 중에 하나일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확실한 그의 출생 기록에는 안토니 플라시드 길렘 가우디 이 코르네트(Antoni Placid Guillem Gaudi i Cornet)로 되어 있다. 영세(Baptism) 받은 날은 태어난 바로 다음 날이었고 영세는 레우스 성당에서 받았다. 그의 부친은 프란체스크 가우디 세라(Francesc Gaudi Serra)이고 모친의 이름은 안토니아 코르네트 베르트란(Antonia Cornet Bertran)이었다. 가우디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 다 타라고나의 쇠 공(Iron Works) 집안 출신들이다.
가우디의 불우한 삶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관절염을 앓는 안토니 가우디는 그의 나이또래들과는 함께 어울릴 수 가 없었다고 한다. 통증으로 걷지를 못하는 가우디를 항상 남들이 그를 안아서 날라다 주거나 아니면 당나귀를 타고 집밖을 나가 다녔다고 한다. 어릴 적에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한 가우디는 밤낮 집에만 붙어 있었던 관계로 그의 주변에 산재한 많은 자연에 대한 관찰과 연구 그리고 그것을 디자인하고 그릴 여유있는 자유시간을 많이 얻었을 것으로 후세사람들은 추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가우디가 어릴 적에 연마한 자연에 대환 관찰력과 자연을 분석하는 힘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그가 펼쳐 보인 건축 등 걸작품에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1873년에서부터 1877년까지 안토니 가우디는 건축사 자격증을 얻기 위하여 바셀로나의 에스콜라 테크니카 수페리오르 다키텍츄라(Escola Tecnica Superior d’Arquitectura)라는 학교에서 연수를 하였다. 건축사 교육 전 과정에서 그는 중간 성적이었지만 제도 연습(Trial Drawing)에서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얻었다. 가우디는 5년간의 건축사 교육 과정을 마친 다음 1878년에 건축사 자격증을 얻었다. 건축학교의 엘리에스 로겐트(Elies Rogent) 교수는 가우디의 졸업장에 서명을 하며 가우디에 대한 평을 하기를 그가 한 미친놈을 발견했던지 아니면 하나의 천재를 만들었던지 둘 중에 하나라는 표현을 하였다고 한다. 바셀로나의 신임 건축사로 나선 가우디는 즉시로 도안하고 설계하는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그를 배출시킨 건축하교와는 늘상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지독히 열열한 카톨릭 신자이었던 가우디는 그의 마지막 사업으로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ilia)에 그의 모든 정력을 기울였다. “라사그라다 파밀리아”란 성 가정 또는 홀리 패밀리(The Holy Family)라는 뜻이다.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짓는 그의 원래 플랜은 18개의 탑을 새우기로 하였다. 18개 탑을 새우기로 한 것은 12개 탑은 12사도들을 위한 것이고 4복음 사도를 위한 4개의 탑, 그리고 나머지 2탑은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가우디의 죽음
1918년부터는 자신이 평생동안 건축해온 성가정(성가족) 대성당 건설에 매진했지만 재정 문제로 인해 끝을 보지 못하고 1926년 6월 7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 지나가던 노면 전차에 부딪혀 치명상을 당했다. 그러나 운전수는 지저분한 거지꼴의 노숙인으로 생각하고 그를 길 옆에 팽개치고 노면 전차를 몰고 가버렸다. 사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고자 택시를 찾았지만 남루한 행색의 이 노인에게 동정심을 발휘할만한 운전기사들이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역시 노숙인으로 생각한 기사들은 그냥 지나쳐 3번의 승차 거부 끝에 4번째로 잡은 택시 운전수가 겨우 운전했지만 병원도 2곳이나 진료 거부를 당해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무상 병원에 놔두고 가버렸다고 한다. 문제는 신분을 증명하는 것인데 병원에서 방치된 채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가우디는 병원 간호사에게 이름을 말하자 병원 관계자들이 그제서야 경악을 하며 그 유명한 가우디를 알아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병원관계자들이 서둘러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급히 연락했다고 한다. 연락받고 달려온 가우디의 친지들이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말했지만 가우디는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이 거지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게 하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게 낫다”라며 그대로 빈민 병원에 남았고 결국 1926년 6월 10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죽게 만든 노면 전차 운전수는 파직과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승차를 거부한 택시 운전수 3명도 불구속 입건되었다. 결국 택시 운전수 3명과 그의 치료를 거부했던 병원은 막대한 배상금을 가우디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장례식은 1926년 6월 13일 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유해는 패밀리아 대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원자 구엘과의 만남
어린 시절부터 건축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가우디는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바르셀로나 건축학교에 입학했다. 건축에 대한 재능은 번득였지만, 그는 학창 시절 디자인 경연대회에서 번번이 낙선했다. 가우디를 비롯하여 아인슈타인 등 인류를 대표하는 천재들의 사례를 보면 천재성과 학창 시절 학교 성적과는 인연이 없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가우디는 건축사 자격을 취득하고 바르셀로나에서 개업을 했지만 이름도 없는 신참내기 건축사에게 일감을 주는 고객은 없었다. 사무실에서 파리를 날리며 시간을 죽이기에는 그의 정렬이 너무 뜨거웠던 것 같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로 독창적인 진열대를 만들어 만국박람회에 출품했는데, 이것이 센세이션을 일으킬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이 진열대가 질긴 인연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가우디가 출품한 기발한 작품을 본 스페인의 유명 섬유회사 회장이자 백작이며 바르셀로나 시의원과 에스파냐 국회의원을 지낸 재력가 에우세비오 구엘(1846~1918)이 가우디를 주목한 것이다. 가우디가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후원자 에우세비오 구엘을 만났기 때문이다. 구엘은 말하자면 스페인의 메디치 가문이나 다름없었다. [메디치가문은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이태리 피렌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던 가문이다. 메디치가는 세 명의 교황과 피렌체의 통치자를 배출하였으며, 나중에는 혼인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 왕실의 일원까지 되었다. 다른 귀족 가문들처럼 그들도 자기네 도시 정부를 지배하였다는 가문이다.] 가우디는 자신의 후원자 구엘을 위해 구엘 저택을 설계했고, 이 저택은 1886년에 착공하여 1889년에 완공되었다. 가우디가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건축가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구엘 공원의 설계를 통해서다. 환상적이면서도 정확한 구조, 기이한 듯 하면서도 약간은 그로테스크한 그의 특성이 이 작품에서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구엘 공원은 198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채식주의자였으며, 연로한 아버지와 조카딸과 함께 살았던 가우디는 괴짜로 통했다. 건축물에서 관능미가 느껴지기도 했고, 과도한 신앙심에 푹 절은 괴퍅한 성격 등은 당대의 문화계 코드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미친 사람의 정신 착란’, ‘술 취한 사람의 작품’, ‘건축계의 이단아’ 혹은 ‘건축의 광인(狂人)’이라는 혹평이 난무하는가 하면 한편에선 ‘건축 분야의 시인’, 혹은 ‘금세기 최고의 건축가’, ‘20세기의 가장 빛나는 천재’라는 극찬을 들었다. 그만큼 그의 작품세계는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는 성당을 지었고, 부자들을 위해서는 대저택을 설계했다. 그는 건축가로서 이런 말을 남겼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독창적이다”(다음호에 계속)
박광하(전 여주대신고 교감, 전 수원계명고 교장)
38khpark@hanmail.net
필자 박광하 선생은 고려대학교 생물학과를 마친 후에 평생을 생물과학 강의와 교육에 헌신하여 왔다. 20여년 전 호주로 이주하여 시드니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