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하의 생명과학 이야기
DNA에 새겨진 혈통과 인류의 발자취(3)
잉크방울을 물속에 떨어뜨리면 이내 사방으로 흩어져 퍼지게 된다. 이처럼 자연계의 모든 물질은 최대한 무질서해지려는 자발적 경향을 가지며 이를 물리학에선 ‘엔트로피(무질서도) 최대의 법칙’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처럼 복잡하거나 질서정연한 것을 싫어하는 자연의 본성에 정면으로 맞선 존재가 바로 60조개 이상의 세포가 모여 이룬 인간의 몸이라고 과학자들은 지적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연상태에서 단 1초라도 버티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특성이 어떻게 대대손손 수 백만년 동안 어버이를 닮은 자손의 형태로 전해지는가 하는 점이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이미 그의 저서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러한 유전현상의 超안정성에 대해 “물리학적으로 이 같은 현상은 절대온도(영하 2백73도)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서울大의대 徐廷瑄 교수는 “게놈이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염색체 한 세트(인간의 경우 46개)를 의미한다”며, “바로 이것이 물리학자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던 수수께끼에 대한 열쇠”라고 설명했다.
DNA생명의 본질은 신체의 주요부분을 구성하며 효소라는 형태로 각종 대사과정을 주관하는 단백질이란 물질이다. 단백질은 다시 20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아미노산, 즉 궁극적인 개체 자체의 구성물질을 합성하도록 지시하는 것이 바로 게놈안에 든 유전물질인 DNA라는 것이다. 현미경으로 겨우 보일까말까 하는 세포의 핵안에는 모두 46개의 염색체가 들어있으며, 이들은 총길이 1.5m, 폭 20억분의 1m라는 놀랄 만큼 가늘고 긴 이중나선 구조의 DNA가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이다. 이렇게 긴 인간의 DNA는 A.G.C.T라는 네 종류의 염기가 무려 30억개 이상 모여 구성되며, 그 배열순서에 따라 ‘A-A-A’면 ‘리신’식으로 3개의 염기가 하나의 아미노산을 합성하게 된다. 결국 A.G.C.T라는 단지 네 개의 벽돌이 서로 적절히 어우러져 인간의 키와 피부색은 물론 맹장의 위치, 지능, 심지어는 “서부영화를 좋아한다”거나 “김치를 잘 먹는다”는 식으로 그 사람의 성격과 입맛까지 관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게놈이란 총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규정하는 거대한 조물주의 설계도인 셈이다.
DNA로 범인색출
골치 아프게 DNA에 관한 단편적이고 기본적인 상식적인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이에 관한 이해 여하를 막론하고 DNA는 현대를 사는 인류의 일상생활에 너무나 가깝게 와 있다. 역사 인류학자들이 인류의 발자취를 자연과 문화 속에서 증거를 찾아 고증하느라고 동분서주하는 가운데서 과학자들은 엉뚱하게도 인간의 DNA속에서 인류이동의 발자취를 해독해 냈으니 경천동지[驚天動地] 할 일이 아닌가?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DNA를 통해 혈통을 찾아 주는 업체가 속속 생겨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집집마다 간직하고 있는 족보에 관한 신뢰 때문인지 DNA분석을 통한 조상찾기는 아직까지 인기가 미미하다. 그보다는 수사기관에서 범인 색출을 위한 DNA 활용은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것 같다. 한국에서 DNA를 통해 범인을 검거한 특이한 사례가 있다. Y염색체가 범인 검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례가 있다. 2008년 7월 경북 김천의 한 술집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사건 당일 오후 50대 여주인을 성폭행한 후 흉기로 찔러 죽이고 사라졌다. 경찰은 피해자 몸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타액을 발견해 유전자 정보를 확보했다. 그러나 용의선상에 올라있는 사람들 중에서 DNA가 일치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수사가 답보상태에 빠질 무렵, 의외의 곳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당시 유전자 분석을 맡았던 국과수는 “범인의 성씨가 魏씨일 가능성이 크다”고 알려왔다. 2008년 통계청 기준 우리나라에서 위씨 성을 가진 인구는 2만8675명이었다. 이 중 남성, 경북 지역, 사건 현장을 중심으로 한정하면 범위는 더 좁혀질 수밖에 없다. 수사팀은 사건 현장 근처에 사는 위씨 성을 가진 남성들을 대상으로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범행 현장에서 채취한 DNA와 일치하는 40대 남성을 찾아내서 범행을 자백하게 할 수 있었다. 남자들에게만 있는 Y염색체를 통한 성씨 추정이 이뤄진 다른 또 한 가지 사례로 2007년 대전에서 벌어진 다방 여종업원 살인사건이다. 국과수[국립과할수사연구소]는 당시 범죄 현장에 남은 DNA와 국과수가 보유하고 있던 1,000여명의 DNA를 대조한 결과 범인의 Y염색체가 오씨 성을 가진 남자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오씨 집성촌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재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경찰은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점퍼 속에서 안약을 발견해 병원 처방전 기록을 뒤지던 중이었다. 수사 대상이 2,000여명으로 너무 많았던 상황에서 범인의 성씨를 알게 되면서 수사에 큰 진전이 이뤄졌고 사건 발생 80여일 만에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다. 그는 예상대로 오씨였다. 2012년 청주 해장국집 살인사건, 2014년 경북 칠곡 낙동강변 살인사건 등도 Y염색체를 통한 성씨 추정이 범인 검거에 도움을 준 경우다. 원래 Y염색체 분석은 성범죄 증거 분석을 위해 등장했다. 2000년대 DNA 분석 기술이 발달하고 관련 데이터베이스가 쌓이면서 Y염색체와 성씨를 연결할 수 있게 됐다. 해외에서도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Y염색체 분석이 꼭 범죄 수사에만 쓰이는 건 아니다. 2013년 한 남성은 골프장 예정 부지에 있는 묘가 자신의 조상묘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국과수에 Y염색체 분석을 의뢰하기도 했다. 원래 Y염색체 분석은 성범죄 증거 분석을 위해 등장했다. 서울대 법의학의 권위자 이숭덕 교수는 “피해자 DNA와 범인 DNA가 혼합돼 검출되는 성범죄 관련 증거물의 경우 Y염색체 분석이 특히 유용하다”고 했다. 2000년대 DNA 분석 기술이 발달하고 관련 데이터베이스가 쌓이면서 Y염색체와 성씨를 연결할 수 있게 됐다. 해외에서도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보조 증거로의 DNA
그런데 Y염색체를 통한 성씨 분석엔 한계가 있다. 유전자를 분석해서 유추한 성씨와 실제 범인의 성씨가 일치하는 건 60% 정도뿐이라고 한다. 조상 중에 원래 성씨가 아닌 조상이 끼어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이씨 가문이 조선시대 전주 이씨 족보를 사들여 성을 바꿨거나 배우자가 외도를 통해 다른 성씨의 아들을 낳았거나 다른 성씨 아이를 입양했을 경우, 후손들에겐 당연히 전주 이씨 Y염색체가 없다. 또 현행법상 본관별로 DNA 정보를 관리할 수 없기 때문에 본관이 다양하고 인구도 많은 김·이·박 등 성씨에서 Y염색체 성씨 추정 기법은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DNA로 범인을 특정하는 것을 윤리적인 차원에서 경계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크다. 국과수 관계자는 “성씨가 같지만 Y염색체가 다를 수 있고 성씨는 다르지만 Y염색체가 같을 가능성이 상존한다”며 “다른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는 강압수사가 될 수 있는 만큼 보조 증거로만 채택해야 한다”고 했다. 경찰에서도 성씨 추정은 공식적 수사 방법은 아니다. 한 경찰 관계자는 “경찰 전체에 알려진 방법이라기보다는 현장 수사를 하는 일부 경찰만 알음알음 정보를 아는 정도”라고 했다.
법원에서도 Y염색체 관련 수사 내용은 참고할 뿐 결정적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다. 2004년 거제에서 발생한 다방 여종업원 살인사건이 그랬다. 당시 검찰은 피해자 손톱 밑에서 발견된 Y염색체와 일치하는 남성을 범인으로 기소했다. 1심 법원은 “용의자 가운데 피고인의 Y염색체가 유일하게 피해자에게서 추출된 것과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2심 법원은 “한국 남자 중 피고인만이 사건 현장과 동일한 Y염색체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판결도 2심 법원과 같았다. 국과수도 성(姓)을 지목하는 걸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자칫 특정 성씨를 범죄자로 몬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과수 관계자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이고 제한적인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며 “일반 사건보다는 DNA 외에는 단서가 없는 장기 미제 사건 등에 적용해 볼 만하다”고 했다. 작년 말 [2015] 현재 국과수는 범죄 현장에서 채취한 8만7000건, 강력범 피의자 4만8000건의 DNA를 보관하고 있으며, 검찰은 수감 중인 범죄자 10만여건의 DNA를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범인 검거와 수사 등을 위해 DNA 채취 대상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인권침해 등의 이유로 채취 대상을 오히려 제한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과학자들은 3만년 전 멸종한 네안데르탈인 화석의 이빨 근조직을 분석했다. 그 결과 네안데르탈인과 현재 인간과 해부학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가진 크로마뇽인 사이에 근친교배가 일어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는 50만년 전 같은 조상을 두고 있는 사이로 밝혀졌다. 이처럼 말이 없는 죽은 자들의 과거는 어떻게 밝히는 것일까?
DNA 고고학
죽은 자의 화석에서 인류의 발달사를 밝혀낸 주인공은 ‘DNA 고고학’이다. DNA 고고학은 유물, 유적 등의 DNA를 분석해 옛 인류의 삶을 복원하는 학문이다. DNA를 분석하면 생물 간의 연관관계를 밝힐 수 있다. “네가 내 자식이 맞느냐?”라는 질문에 ‘친자감별법’이란 유전자 검사를 사용한다. 친자감별법은 얼마나 염기서열이 닮아있는지 확인해 혈연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DNA 고고학도 동일한 원리를 이용한다. 질문이 “당신이 내 조상이 맞나요?”로 바뀌기는 하지만 DNA 고고학이 태동한 것은 불과 20여 년 전이다. 1984년 미국 캘리포니아대 앨런 윌슨은 죽은 생물체에서도 DNA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140년 전 멸종한 얼룩말 사촌같이 생긴 ‘콰거’의 사체에서 DNA를 얻어낸 것이다. 그 뒤 고고학자들은 과거 인류 정보가 담긴 DNA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 것이다. 고고학(考古學, Archaeology)은 물질과 동·식물, 인류가 지난 시대에 남긴 흔적을 찾아내고 이들의 말없는 역사를 밝히는 학문으로 사회과학의 일종인데 디엔에이(DNA) 안에 고고학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기나긴 시간의 진화 역사를 전하는 과학 뉴스에서 유전체(게놈)라는 말을 자주 보게 됐다. 유전체 고고학이니 디엔에이 연대측정이니 하는 두 말의 낯선 조합은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예컨대 이런 의미다. 개와 늑대의 디엔에이 염기서열을 비교해 보자. 서로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으니, 이제 디엔에이에 그만큼 차이를 새겨 넣은 시간을 계산할 수 있다. 두 종은 공통조상에서 갈라진 이래 수만년 동안 서로 멀어지며 진화했다는게 유전체 분석에서 제시된다. 현재의 정보에서 먼 과거를 짐작할 수 있다니, 디엔에이는 말 그대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분자시계’로 불릴 만하다. 이런 DNA 고고학은 1960년대 이래 발전해 왔다. 이전까지 화석 물질을 분석해 시간을 발굴했다면, 이젠 화석없이 현재의 DNA 차이만을 분석해도 거기에 숨은 진화의 계보와 시간을 캐낼 수 있다는 것이다. 현생인류인 ‘최초의 아담과 이브’가 아프리카에서 나와 각지로 퍼졌다는 인류 진화의 큰 줄거리는 현재 인류의 DNA를 비교하고 추적해 찾아낸 DANA 고고학의 성과로 꼽힌다.
박광하(전 여주대신고 교감, 전 수원계명고 교장)
38khpark@hanmail.net
필자 박광하 선생은 고려대학교 생물학과를 마친 후에 평생을 생물과학 강의와 교육에 헌신하여 왔다. 20여년 전 호주로 이주하여 시드니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