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열전
백이열전 (伯夷列傳)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나오는 첫 번째 열전.
백이 · 숙제에 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사마천의 서술로 구성되어 있다. 백이, 숙제가 정의로운 삶의 자세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극악무도한 도척과 같은 인물은 천수를 다하는 세상의 모순 속에서 선악정사(善惡正邪)를 바로 드러내고자 했던 사마천의 역사 철학이 담겨져 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군주의 두 아들이다. 둘은 왕위에 오르기를 원치 않았고 주문왕이 노인을 따뜻하게 모신다는 말을 듣고 그에 귀속하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이르고 보니 주문왕은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동쪽 은의 주왕을 치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백이·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들고 이의 부당함을 간했으나 무왕은 이를 듣지 않는다. 백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몸을 숨기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 마침내 굶어 죽는다.

○ 伯夷列傳 (백이열전)
무릇 학자들이 공부하는 서책은 비록 광범위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믿을 수 있는 기록은 단지 『육경(六經)』일 뿐이다.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은 비록 결손되어 완전하지 않다고는 하나, 우(虞)나 하(夏) 시대 때의 글을 보면 선양(禪讓)에 관한 일을 알 수 있다. 당요(唐堯)가 임금의 자리에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우순(虞舜)에게 양위했고, 우순이 양위할 때는 사악(四嶽)과 12목(牧)의 추천을 받아 하우(夏禹)를 일정한 자리에 올려 시험 삼아 십 수 년 동안 그 직을 수행하게 하고, 그 공적의 결과가 나타난 연후에야 정권을 넘겨주었다. 이는 천하는 귀중하고, 제왕이란 가장 중요한 법통이기 때문에 천하를 전하는 일은 이처럼 어렵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혹자는 말한다.
「요임금이 천하를 허유(許由)에게 전하려고 하자, 허유는 이를 받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치욕으로 느끼고 도망가 숨어버렸다. 이어서 하나라 때는 변수(卞隨)와 무광(務光)과 같은 은자가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은자들이 칭송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태사공이 말한다.
「내가 기산(箕山)에 올랐었는데, 그 산 위에는 허유의 무덤이 있다고 했다. 공자가 옛날 인자(仁者), 성인(聖人), 현인(賢人) 등을 차례로 열거하면서 오태백(吳太伯), 백이(伯夷)와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하게 말하고 있다. 나도 허유와 무광의 덕행이 고귀하다는 사실은 알고는 있다 하나 『시(詩)』와 『서(書)』에는 그들에 대해 조그만 기사도 나타나 있지 않으니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이, 숙제는 남의 지난날 저지른 잘못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으로부터 원망 받는 일이 드물었다.」
또 말씀하셨다.
「그들은 어짐을 구해 어짐을 얻었으니 구태어 원망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백이의 마음이 비통하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일시(軼詩)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왕의 두 아들이다. 고죽국 왕이 숙제를 그 후계로 세우려고 하다가 미처 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숙제가 왕위를 백이에게 양보하려고 하자 ‘부왕의 명이었다.’라고 말하면서 달아나 버렸다. 숙제도 역시 왕위에 오르는 일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고죽국의 국인들은 가운데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서백(西伯) 창(昌)이 노인들을 잘 공경한다는 소문을 들은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로 달려가 귀의하려고 했다. 이윽고 그들이 당도했을 때는 서백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서백 창을 받들어 문왕이라고 추존한 후에 나무로 만든 그의 신위를 병거에 싣고 군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나아가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려고 했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이 탄 수레를 끌던 말의 고삐를 붙잡고 출전을 만류하며 간했다.
「부친이 죽어 아직 장사도 지내고 않고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일으키니 이것을 하늘의 도리에 따른 효라 할 수 있습니까? 더욱이 신하된 자가 자신의 군주를 살해하려고 하는 행위를 인의(仁義)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무왕의 곁에 있던 군사들이 두 사람을 죽이려고 하자 태공 여상(呂尙)이 말했다.
「저 사람들은 의인이다!」
상보가 사람을 시켜 백이와 숙제를 부축하여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윽고 무왕이 상나라 주왕(紂王)의 폭정을 평정하자 천하는 모두 주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자신들이 주나라의 백성이 되었음을 치욕으로 여기고 인의(仁義)를 지켜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수양산(首陽山)⑫으로 들어가 산나물을 뜯어먹으며 배를 채워 연명했다. 이윽고 그들이 굶주림 끝에 죽으려고 할 때 노래 한 수를 지어 노래했는데 그 가사는 이러했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꺾어 먹자꾸나
폭력을 폭력으로 바꾸었으면서도
그 일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구나!
신농(神農), 우순(虞舜), 하우(夏禹)의
시대는 홀연이 지나가버렸으니
우리는 장차 어디에 의지해야 한단 말인가?
쇠잔한 우리의 운명이여!
아! 우리는 죽음뿐이로구나!
登彼西山兮(등피서산혜)
采其薇矣(채기미의)
以暴易暴兮(이폭이폭혜)
不知其非矣(부지기비의)
神農虞夏(신농우하)
忽焉沒兮(홀언몰혜)
我安適歸矣(아안적귀의)
于嗟徂兮(우차조혜)
命之衰矣(명지쇠의)
마침내 두 사람은 수양산에서 굶어죽고 말았다. 이 노래에서 두 사람은 원망하는 마음을 노래했는가? 아니면 원망하지 않는 마음을 노래했는가?
어떤 사람은「천도는 무사(無私)해서 항상 착한 사람들 편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백이와 숙제는 선인이 아니란 말인가? 그들과 같이 인의와 고결한 덕행을 쌓았지만 굶어죽지 않았는가? 또한 공자는 70여 자기제자들 중 유독 안연(顔淵)만이 학문에 싫증을 내지 않았다고 천거했다. 그러나 안연도 가난해서 조강(糟糠)으로도 배를 불리지 못하다가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하늘이 선한 사람들에게 복을 내린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매일 죄 없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그 간을 꺼내어 회쳐서 먹으며 흉악무도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며 수천 명의 도당을 이끌고 천하를 횡행했던 도척(盜跖)이라는 도적은 종내는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그것은 도대체 도척이 행한 어떤 덕행에 의해서인가? 선한 사람이 비참하게 죽고 악인들이 천수를 누리다 죽은 일들은 하늘에 도가 없다는 지극히 크고 뚜렷한 사례들이다. 근자에 들어서서, 올바르지 않은 품행으로 정도를 걷지 않고, 오로지 사람이 꺼리고 금하는 일만 골라서 하면서도, 그 몸은 종신토록 인생을 즐기며 부귀와 영화를 대대로 이어 끊어지지 않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발을 내 딛을 때는 항상 조심해서 마른 땅만을 고르고, 자기의 생각을 말할 때는 몇 번이고 생각한 후에 행하고, 길을 갈 때는 지름길이나 좁은 길을 택하지 않으며, 공명정대하지 않은 일에는 결코 힘써 행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화를 입게 되는 경우가 말할 수 없이 많이 있는데 이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나는 이런 이치를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만약에 이런 것이 천도라고 한다면 과연 천도가 옳은가, 옳지 않은가?
공자가 말하기를 「道不同(도부동), 不相爲謀(불상위모)」라고 했는데, 그것은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따라 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로 말하기를 「만약 부귀가 구해서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비록 그것을 얻기 위한 일들이 채찍을 들고 행하는 천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 일을 하겠다. 그러나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쫓겠다.」라고 했다. 또한 「추운 겨울이 되어야만 송백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법이다.」라고 했다. 온 세상이 혼탁해졌을 때야 청렴한 선비들의 모습이 드러나는 법이며, 그것은 바로 세속의 사람들은 부귀를 중시여기고 청렴한 사람은 이처럼 부귀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다.
공자는「군자는 자기가 죽은 뒤에 그 이름이 칭송되지 않을까를 걱정한다.」라고 말했고, 가의(賈宜)는「탐욕스러운 사람은 재물 때문에 목숨을 잃고, 열사(烈士)는 명분 때문에 목숨을 바치며, 권세를 과시하는 사람은 그 권세 때문에 죽고, 일반 중인들은 자기의 목숨에만 매달린다.」라고 말했다. 또한 역경(易經)에는「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가 비추어주고, 같은 종류의 물건은 서로 감정으로 통한다. 또한 구름은 용을 따라 다니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라 일어난다. 그와 같이 성인이 나타나면 세상 만물이 모두 뚜렷이 그 모습을 드러나게 되어있다.」백이와 숙제가 비록 현인이기는 했지만 공자의 칭송을 듣고서야 그의 이름이 더욱 빛나게 되었고, 안연이 비록 학문을 즐겨하기는 했지만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서야 비로소 그의 덕행이 더욱 뚜렷해 졌다. 산으로 들어가 굴속에서 사는 은사들은 출세와 은퇴를 시의에 맞게 행하는데 그와 같은 사람들의 이름이 인멸(湮滅)되어 버린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시골의 벽진 곳에 살면서 덕행을 연마하여 이름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으로써 청운(靑雲) 거사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의 이름을 후세에까지 전할 수 있겠는가?

○ 사자성어
1) 불사이군(不事二君)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의 표상 백이·숙제.
대략 삼천년 전 주(周)나라의 무왕이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치고자 병사를 일으키니,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수양산에 들어가 나물만 캐어 먹다가 굶어 죽었다. 이후 백이·숙제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적 인물로 높이 받들어져 왔다.
.주나라의 곡식은 먹지 않겠다고 한 백이와 숙제
백이·숙제에 대한 본격적인 자료는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서 볼 수 있다.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들이었다. 고죽국의 왕은 아우인 숙제에게 뒤를 잇게 할 작정이었는데, 왕이 죽자 숙제는 왕위를 형 백이에게 양보하려고 했다. 그러자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이라면서 나라 밖으로 달아나고 숙제도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고죽국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중간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이 때 백이와 숙제는 서백창(西伯昌)이 늙은이를 잘 모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서 몸을 맡기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주나라에 이르렀을 때 서백창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의 아들 무왕(武王)은 선왕의 시호를 문왕(文王)이라 일컫고 나무로 만든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동쪽으로 은나라 주왕을 치려했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효孝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하 신분으로 군주를 죽이는 것을 인(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에 무왕 곁에 있던 신하들이 그들의 목을 베려고 하였는데, 태공 여상(呂尙)이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다”며 말렸다. 그 뒤 무왕이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자 천하 제후들은 주나라를 종주(宗主)로 삼았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만은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지조를 지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살다가 마침내 굶어 죽었다.
그들이 굶주리며 읊었다는 노래가 ‘채미가'(採薇歌)이다.
저 서산西山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神農), 우(虞), 하(夏)나라 때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 뿐, 우리의 운명도 다했구나.
.공자와 맹자가 인정한 현인(賢人)이자 성인(聖人)
백이와 숙제는 왕조의 교체기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과 지조를 지킨 인물로서 이후 동양 문화에서 널리 추숭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 중에서 백이와 숙제를 언급한 최초의 인물로 공자가 있다. 그는 백이와 숙제를 “옛날의 현인이시다”라고 하며 높이 평가하였다. 어질 인(仁)은 유가儒家에서의 가장 높은 덕목인데, 공자는 백이와 숙제야 말로 “인을 구하여 인을 얻은 이들”이라고 높이 받들었다. 공자를 계승한 맹자도 역시 백이와 숙제를 높였는데, “백이는 성(聖)중에서도 청(淸)한 자”라고 하였다. 즉 성인 중에서도 맑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맹자는 성인을 몇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공자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백이를 성인으로 칭하였던 것이다.
.백이·숙제의 은둔은 옳았는가?
백이와 숙제에 대해서는 공자와 맹자의 평처럼 긍정적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나라에서 나는 곡식을 안 먹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내세웠던 백이와 숙제였지만, 후세에 ‘고사리 또한 주나라에서 난 풀이었다’라며 결국 주나라의 풀을 먹고 연명했으니 그들의 절개는 완벽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백이와 숙제 또한 문왕에게 귀의했던 점을 지적하며 은나라 주왕의 폭정을 피해 문왕에게 의탁하고자 했던 만큼 그들도 주나라를 도와 은나라 토벌에 참여했어야 옳다는 비판이 있었다. 백이와 숙제의 은둔과 죽음의 행적에 대해서는 이처럼 시대에 따라, 정세에 따라, 이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평가되면서 상찬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백이·숙제의 이야기는 유교적 이념 논쟁의 핵심에 놓인 무거운 주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세상을 등지고 고사리로 연명하다
민화에 그려진 백이·숙제의 이미지는 비장함보다는 여유로운 흥취가 느껴지는 점이 특징이다. 낙천적이고 해학적인 민화 특유의 미의식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개인소장 <수양채미도>는 고사인물도 8폭 병풍 중의 하나이다. 그림에서 한 사람은 손에 고사리를 들고 서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바위에 기대어 앉아 그를 쳐다보고 있다. 이들을 둘러싼 산수는 매우 웅장하다. 화면의 왼쪽에는 깎아지른 절벽과 거기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가 그려졌으며 원경에는 산 능선이 첩첩이 이어져 깊은 산 속임이 암시되어 있다. 각 경물의 비례와 연결성이 미숙하여 어색한 구성을 보이지만, 굴곡진 필선으로 바위와 절벽을 정의하여 선염 처리하고 다양한 나무를 섬세하게 표현한 묘사력은 높이 평가된다.
이에 비해 선문대박물관 소장의 ‘수양채미도’는 간략화되고 도식화된 전형적인 민화풍의 그림이다. 두 인물은 화면 중앙의 산 능선에 앉아 있는데 두 손을 입에 대고 있는 모습은 나물을 먹고 연명했던 그들의 자취를 부각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가회민화박물관의 <채미수양산도>는 갈필의 선묘에 연한 녹색을 선염하여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화면의 상단 중앙부 언덕 위에 백이와 숙제가 앉아 있고, 앞에는 고사리를 캐어 담은 바구니가 놓여 있다. 인물의 자세는 엉거주춤하여 어색하고, 붓 가는 대로 자유롭게 묘사한 인상이 짙다. 산수 배경은 크게 근경과 원경으로 나뉘는데, 그 사이는 상서로운 구름이 자욱하여 흡사 신선의 세계를 그린 듯하다. 불로장생의 신선 세계에 대한 동경은 민화에 있어서 주요 키워드이다. 백이·숙제가 신선으로 그려진 듯한 인상이다.
.신선처럼 그려진 백이·숙제
‘수양산도’에 인물은 그려져 있지 않다. 화면 중앙에 붉은 띠를 맨 커다란 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어 고사리를 캐어 연명했던 백이와 숙제의 고결한 지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위로 상서로운 구름이 자욱하다. 수묵만을 사용하였으되 다채로운 형태와 다양한 묘법으로 인해 산수의 표현에 변화가 풍부하다. 그림 상단에 적힌 제시의 내용도 흥미롭다.
“산은 푸르고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호적에 없으니, 의로움을 안고 어찌 돌아가리오? 봉황은 청렴하여 조를 먹지 않고 고사리를 뜯었다네.”
주나라 백성 되기를 거부하며 주나라 곡식(粟)은 먹지 않겠다던 백이·숙제는 여기서 봉황에 비유되었다. 봉황은 신령스러운 상상의 동물로서 천리를 날아 아무리 배가 고파도 조를 쪼아 먹지 않는다는 고고한 처신으로 인해 청렴하고 고귀한 군자·성인을 상징한다. 그러고 보니 바구니만 덩그러니 남겨진 그림 속의 수양산에 신비감이 감돈다.
2)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
“하늘의 도는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저 저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폭악한 방법으로 포악함을 반복한 무왕은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神農), 우(虞), 하(夏)나라 시대는 홀연히 사라졌으니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아! 나는 떠나련다, 운명이 쇠했으니.”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백성이 된 것을 탄식하며 부른 노래이다.
백이와 숙제는 상나라 제후국의 왕자들로,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을 응징하려 하자 불충이라는 명분으로 반대했다.
주 무왕이 그러한 반대를 부릅쓰고 상나라를 치자 백이와 숙제는 명분이 통하지 않는 혼탁한 세상과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며 살았다.
위의 노래는 그들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지은 것으로, 결기 어린 도저한 정신세계를 상징한다.
사마천은 이 두 인물에 의탁하여 사기 전체의 의도를 말하려 했다.
그는 어진 덕망을 쌓고도 끝내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의 문명을 슬퍼하며,
정의로운 자가 망하고 불의한 자가 흥하는 현실 세계의 냉혹성과 그 속에서 겪는 인간 운명의 비극성을 성찰했다.
이는 다시 하늘의 도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으니…
.사마천이 쓴 역사서 사기의 ‘백이열전’에 ‘天道, 是邪非邪'(천도, 시야비야)란 말은 “하늘의 도가 과연 맞는 것인가?, 틀린 것인가?”라는 뜻으로 이책을 쓴 사마천이 하늘을 향해 탄식하는 외침이다.
과거 중국 고죽국 국왕의 두 아들이였고, 충절과 지조를 갖추고 한없이 착한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으며, 공자의 70문도중 학문을 좋아하고 어질기로 이름난 안연 역시 너무 가난하여 32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춘추시대 말기의 포악한 도적인‘도척’은 사람의 살을 회쳐 먹을 정도로 악독하였으나 천수를 다 누렸다.
사마천은 이를 두고 착한 사람은 하늘이 보답한다는 사실에 강한 의심과 회의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하늘이 신상필벌하지 않았지만 역사를 통해 그들은 상과 벌은 받은 것이다.
백이, 숙제 그리고 안연은 역사에 길이 남는 어진이가 되었고, 포악한 도적인 도척은 2,000년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도적으로 회자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역사의 심판이다.
비록 지금 당장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이 권세와 부를 누리고 호화롭게 잘 사는 것 같고,
정당하고 자기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가 오히려 고통받는 것 같지만 우리들의 역사는 분명히 정의의 편이다.
우리는 편법과 요행이 아닌 정도로서 이 어려움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3) 부기미(附驥尾)
.부기미(附驥尾 – 附:붙을 부, 驥:천리마 기, 尾:꼬리 미)
“천리마의 꼬리에 붙다. 곧 명마의 꼬리에 붙으면 멀리 갈 수가 있다는 말로 훌륭한 인물에 붙좇아 그 덕분에 출세하거나 일을 성취한다는 뜻”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의 열전(列傳) 맨 앞대목엔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올라있고 이 대목의 마지막엔 이렇게 적혀있다.
“구름이 용을 따르고 바람이 호랑이를 따르듯 성인(聖人)이 세상에 나타나고야 만물도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백이 숙제는 賢人(현인)임에는 틀림없으나 孔子(공자)가 그들을 찬양함으로써 더욱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顔淵(안연)도 학문에 충실했지만 공자의 驥尾(기미)에 붙음으로써(附驥尾) 그 품행이 더욱 더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함께 동굴에 숨어 사는 선비라도 나아가고 들어감에 따라 때의 이로움과 이롭지 못한 것이 있으니, 그 이름이 묻혀 칭송되지 못하는 수가 많은 것은 슬픈 일이다. 촌구석에 살면서 품행을 닦고 이름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덕있는 명사를 만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름을 후세에 전할 수가 있겠는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영향력있는 인물이 손을 들어주지 않으면 초야에 묻혀 후세에 이름을 전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前漢(전한)말기의 사람인 張敞(장창)도 이렇게 쓰고 있다.
“파리는 열 걸음 거리밖에 날지 못하지만 천리마 같은 발 빠른 말의 꼬리에 붙으면 천리길도 쉽게 갈 수 있다. 그러면서도 말에게는 조금도 폐를 끼치지 않고 파리는 다른 것들을 훨씬 멀리 떼어놓을 수가 있다.”
여기서는 큰 인물의 힘을 빌려 출세하고 또 능력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ㅡ《史記》後漢書
4)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는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고 해석.
사기 백이열전에서 사마천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날씨가 추워져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서, 세상이 혼탁할수록 청렴한 선비와 진정성 있는 마음이 눈에 띄는 법이라고 강조하였다. 부귀를 중하게 여기는 속인의 처사와 부귀를 가볍게 여기는 청렴한 선비의 처사는 그 대비가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5) 거세혼탁 청사내현(擧世混濁 淸士乃見)
사마천은 바르고 정의로운 인물들이 정당한 대우는커녕 박해받거나 불행하게 삶을 마치는 것에 대해 깊은 연민과 안타까움을 표했다. 사마천은 ‘백이열전’에서 착한 자와 어진 자가 곤경에 처하고 재앙을 만나 허덕이는 현상을 하늘의 도, 즉 ‘천도(天道)’라는 표현에 빗대 심각하게 토로한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을 베푼다는 것이 어찌 이 모양인가? 도척(盜跖)은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생간을 회로 쳐서 먹었다. 포악하고 잔인하며 오만방자하게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천하를 휘저으며 돌아다녔으나 오래도록 잘 살다가 죽었다. 이 자는 무슨 덕을 추구했기에 그럴 수 있었나?
사마천은 공자의 말을 끌어다 “날이 추워진 뒤라야 소나무와 전나무의 푸르름을 실감하고(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ㆍ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세상이 어지럽고 더러워져야 깨끗한 선비가 드러나는 것인가(거세혼탁ㆍ擧世混濁, 청사내현ㆍ淸士乃見)”라는 독백을 덧붙이고 있다.

○ 백이열전(伯夷列傳) 개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백이·숙제는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두 아들이다. 아버지는 아우인 숙제를 후사(後嗣)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아버지가 죽게 되자 숙제는 형 백이에게 양위(讓位)하려고 했다. 그러자 백이는,
“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아버님의 명이다.” 하고 끝내 국외로 도망가 버렸다. 숙제도 또한 제위에 오르기를 즐겨하지 않아 도망해 버렸으므로 고죽국 사람들은 중자(中子)를 군주로 세웠다.
그 후 백이·숙제는 서백 창(西伯昌)이 노인을 따뜻하게 모신다는 말을 듣고 거기에 귀속하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이르고 보니 서백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부왕(父王)의 목주(木主)를 받들어 문왕(文王)이라 칭하고 동쪽은 은(殷)의 주왕(紂王)을 치려 하고 있었다. 백이·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들고 간하였다.
“부왕의 장례도 치르기 전에 전쟁을 하려고 하니 이 어찌 효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의 몸으로 군주를 시살(弑殺)하려고 하시는데, 이 어찌 인(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무왕의 좌우에 있는 신하들이 이 두 사람을 베려고 하였으나 태공망(太空望)이, “이 이야말로 의인(義人)이다.”하고 부축하여 데려 가게 하였다.
무왕이 은의 난을 평정하니 천하의 사람들은 우러러보게 되었다. 그러나 백이·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주(周)의 녹봉을 먹으려 하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 먹으며 연명하다가 끝내 굶어 죽게 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다.
“오늘도 저 서산(西山)에 올라 고사리를 캤노라.
폭력으로 폭력을 보답하고도 그 그릇됨을 모르는 무왕. 신농(神農)·순(舜)·우(禹)의 호시절은
홀연히 사라졌구나. 이제 우린 어디로 가야 하나, 아아 가자, 죽음의 길로. 쇠잔한 나의 운명이여!”
이렇게 해서 끝내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이것으로 보아 과연 두 사람의 마음가운데에는 원한이 없었을까?
어떤 사람은 말했다. “천도(天道)는 공평 무사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
하지만 백이·숙제와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인가. 그들은 이와 같이 인과 덕을 쌓고 청렴 고결하게 살다가 이렇게 굶어 죽었다.
또한 공자의 고제 칠십인(高弟 七十人) 가운데 중니(仲尼)는 오직 안연(顔淵)만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추상(推賞)했다. 그러나 회(回)는 가끔 쌀뒤주가 비어 있었으며, 지게미나 쌀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요절했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도대체 어찌된 셈일까?
한편 도척은 날마다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간(肝)을 회치는 등, 포악 방자하여 수천 사람의 도당을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으나 천수(天壽)를 다하고 죽었다. 이것은 그가 어떤 덕행을 쌓았단 말인가?
이러한 것은 가장 현저한 예라 하겠지만 근세에 이르러서도 소행(素行)이 도(道)를 벗어나 오로지 악행만을 저지르고도 종신(終身)토록 일락(逸樂)하여, 부귀가 자손 대대로 끊이지 않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정당한 땅을 골라서 딛고 정당한 발언을 해야 할 때만 말을 하며, 항상 큰 길을 걸으며 공명 정대한 이유가 없으면 발분(發憤)하지 않고, 시종 근직(謹直)하게 행동하면서도 오히려 재화를 당하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나는 매우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천도라는 것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고.
공자는 이에 답하여 말한다. “도를 같이하지 않는 사람끼리는 서로 상의하지 않는다.”라고.
이것은 곧 각각 자기 의사(意思)에 따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또 이런 말도 했다.
“부귀라는 것이 뜻대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마부와 같은 천한 직업이라 할지라도 나는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해도 얻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도를 행하고 덕을 쌓겠다.”
또한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차가운 계절이 되어서야 소나무·잣나무가 푸르러 조락(凋落)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세상이 모두 혼란 오탁(汚濁)할 때라야 청렴한 선비가 드러나게 된다. 이것은 곧 세속 사람이 부귀를 그렇게 중하게 여기는데 청렴한 선비는 그 부귀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공자의 말과 같이 ‘군자는 세상을 마친 후에도 이름이 칭송되지 못함을 부끄러이 여기는’ 것이다.
한(漢)의 가자(賈子)는 ‘탐욕한 사람은 재물에 목숨을 걸고 의열(義烈)한 사람은 명예에 목숨을 걸고 권세욕이 강한 사람은 그것에 끌려 죽고 범용한 일반 사람은 그저 생명을 탐하고 아낄 뿐이다.’라고 했다. ‘같은 종류의 광명은 서로 비쳐주고, 같은 종류의 만물은 서로 구하고, 구름은 용을 따라 용솟음치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라 일어난다. 성인이 나타나 만물이 이를 우러러보는 것처럼’ 백이·숙제가 현인이기는 하지만 공자의 칭송을 얻음으로써 그 이름이 더욱더 드러났고, 안연은 독실한 선비이지만 공자의 덕으로 그 덕행이 더욱더 드러났다. 이와 같이 암굴(暗窟)에 숨어 사는 덕이 높은 선비가 그 진퇴에 시운이 맞았다 하더라도, 그 이름이 묻혀 칭송되지 못하는 수가 많은 것은 슬픈 일이다. 촌리(村里)에 살면서 행실을 닦고 이름을 떨치고자 하더라도 공자와 같은 성현의 덕으로 칭송되지 않는다면, 어찌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겠는가? <사기 열전>
-요점
.작자 : 사마천(司馬遷)
.갈래 : 열전
.성격 : 교훈적, 서사적
.주제 : 백이·숙제의 정의로운 삶

○ 이해와 감상
중국 주(周)나라의 전설적인 형제성인(兄弟聖人). 백(伯)과 숙(叔)은 장유(長幼)를 나타낸다. 본래는 은(殷)나라 고죽국(孤竹國:河北省 昌黎縣 부근)의 왕자이었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 서로 후계자가 되기를 사양하다가 끝내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떠났다. 그 무렵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멸하여 주왕조를 세우자, 두 사람은 무왕의 행위가 인의(仁義)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서우양산[首陽山]에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어먹고 지내다가 굶어죽었다. 유가(儒家)에서는 이들을 청절지사(淸節之士)로 크게 높였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나오는 백이·숙제에 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사마천의 서술로 구성되어 있다. 백이, 숙제가 정의로운 삶의 자세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극악무도한 도척과 같은 인물은 천수를 다하는 세상의 모순 속에서 선악정사(善惡正邪)를 바로 드러내고자 했던 사마천의 역사 철학이 담겨져 있다.
-이해와 감상1
서양에서는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처럼 동양에서는 사마천을 역사의 비조(鼻祖)로 부른다. 사마천은 궁형(宮刑)이라는 비참한 형벌을 당했으면서도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고, 올바른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는 일념에서 마침내 ‘사기’라는 불후의 명저를 내놓았다.
‘사기’의 구성은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열전’은 문호·학자·정치가·군인·자객·유협(遊俠)·해학가·관리·실업가 등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일생의 일을 기록한 전기이다. ‘열전’은 그 분량면에서도 방대할 뿐만 아니라 인물의 성격이나 활약상을 유려한 문체로 흥미진진하게 그려 주고 있어 문학적으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실린 백이·열전은 백이·숙제의 정의로운 삶의 자세를 보여 주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작가의 역사 철학적 관점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기도 한다. 폭력으로서 폭력을 치는 것은 자기 모순이 아니냐는 백이·숙제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무왕이 듣지 않았기 때문에 백이·숙제는 마침내 비극적으로 최후를 마쳤다. 뿐만 아니라 도척과 같은 극악 무도한 인물은 간악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천수를 다 했다. 바로 이 점에서 사마천은 천도(天道)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고뇌 끝에 사마천은 모순에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선악 정사(善惡正邪)를 바로 드러내어 후세 사람들의 감계(鑑戒)로 삼는 것이 바로 역사가의 할 일임을 깨닫고 마침내 역사 집필의 붓을 들었던 것이다.
-이해와 감상2
백(伯)과 숙(叔)은 형제의 서열을 나타낸다. 사마천(司馬遷)에 의하면 고죽군(孤竹君:고죽은 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 루룽 현[盧龍縣])의 아들이라고 한다. 고죽군은 막내아들인 숙제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그가 죽은 뒤 숙제는 이것이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여 맏형인 백이에게 양보했지만 백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나라를 떠나 서백(西伯) 문왕(文王)의 명성을 듣고 주나라로 갔다. 그곳에서는 이미 문왕이 죽고 아들인 무왕(武王)이 문왕의 위패(位牌)를 수레에 싣고 은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러 가려는 참이었다. 두 사람은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병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효이며 신하로서 군주를 치는 것은 불인(不仁)이다”라고 하며 말렸지만 무왕은 듣지 않고 출정해 은을 멸망시키고 주의 지배를 확립했다. 두 사람은 주의 녹(祿)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지금의 산시 성[山西省] 융지 현[永濟縣])에 숨어살며 고사리를 캐먹고 지내다 굶어죽었다.

○ 백이·숙제(伯夷·叔齊)
중국은(殷)·주(周)나라 교체기인 BC 1100년 무렵의 전설적 성인(聖人) 형제. 백(伯)·숙(叔)은 장유(長幼)를 나타낸다. 사기(史記) <백이열전>에 의하면, 은나라 때의 고죽국(孤竹國)의 국군(國君) 아들로서, 아버지가 죽은 뒤 왕위를 사양하고, 함께 나라를 도망쳐 주나라의 서백창(西伯昌;文王)의 덕을 사모하여 주나라로 갔다. 그러나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아버지 문왕이 죽은 뒤, 즉시 은나라 주왕(紂王)을 친 것을 불효·불인(不仁)이라 하여 주나라의 조[粟]를 먹는 것을 거부하고,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여 고사리를 음식으로 삼았으나 결국 굶어서 죽었다고 한다. 김연수(출처 :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 참고: 도척 (?∼?)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설적인 대도적(大盜賊). 도척(盜蹠)이라고도 쓴다. 노(魯)나라의 현인(賢人) 유하혜(柳下惠)의 동생이었다는 설(說)에 따르면 춘추시대의 사람이지만, 실재인물이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성격이 포악하여 날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으며 사람의 간을 생으로 먹고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수천의 부하를 모아 천하를 횡행하고 여러 나라를 뒤흔들어 놓았다고 전한다. ‘장자(莊子)’의 ‘도척편’에 공자와 도척이 가공적으로 문답하고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몹시 악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 참고: 사기(史記)
중국 전한(前漢)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저서. 상고의 황제(黃帝)로부터 전한의 무제(武帝)까지 2천 수백 년에 걸친 통사이며, 역대왕조 편년사인 본기 12권, 연표 10권, 부문별 문화사 8권, 열국사인 세가(世家) 30권과 개인전기집인 열전 7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친 사마담(司馬談)의 유언을 받아 BC 104년 전후부터 편찬에 착수했다. 중도에 이릉(李陵)의 사건에 연루되어 궁형(宮刑)을 받았지만 그 굴욕을 극복하며 집필을 계속해 BC 91년 무렵 초고를 완성했다. 그때까지 중국에는 유교의 경전으로 중시한 《상서(尙書)》 《춘추》 《시전》 《주역》 《예기(禮記)》 및 춘추에서 전국시대에 걸친 사상가의 저작인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있었다. 어느 것이나 전문학자들이 전승하고 해설해 왔으나 고대에서 한나라까지의 통일된 역사서는 없었다. 사마천은 서로 대립하는 학자적 입장을 떠나 고래의 전적(典籍)을 충분히 이용해 첨가하고, 궁정에 보관된 남은 풍부한 사료와 넓은 견문을 바탕으로 본기·표·서·세가·열전 등 독특한 형식으로 종합적인 기술을 하는데 성공했다. 사마천은 중국 최초의 역사학자이고 또한 대표적인 중국역사가이다. 특히 그가 창시한 본기·열전 등과 같이 성질이 서로 다른 역사기술방법을 병용한 종합사형식을 기전체(紀傳體)라 한다. 이는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에 이어 이후 왕조의 관선정사(官選正史)의 표준이 되었다.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해 완성된 편년체와 함께 기전체는 중국 역사기술의 기본 형식이다. ㅡ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 사기열전 목차
- 백이열전
- 관·안 열전
- 노자·한비 열전
- 사마·양저 열전
- 손자·오기 열전
- 오자서 열전
- 증니제자 열전
- 상군 열전
- 소진 열전
- 장의 열전
- 저리자·감무 열전
- 양후 열전
- 백기·왕전 열전
- 맹자·순경 열전
- 맹상군 열전
- 평원군·우경 열전
- 위공자 열전
- 춘신군 열전
- 범수·채택 열전
- 악의 열전
- 염파·인상여 열전
- 전단 열전
- 노중련·추양 열전
- 굴원·가생 열전
- 여불위 열전
- 자객 열전
- 이사 열전
- 몽염 열전
- 장이·진여 열전
- 위표·팽월 열전
- 경포 열전
- 회음후 열전
- 한신·노관 열전
- 전담 열전
- 번·역·등·관 열전
- 장승상 열전
- 역생·육고 열전
- 부·근·괴성 열전
- 유경·숙손통 열전
- 계포·난포 열전
- 원앙·조조 열전
- 장석지·풍당 열전
- 만석·장숙 열전
- 전숙 열전
- 편작·창공 열전
- 오왕비 열전
- 위기·무안후 열전
- 한장유 열전
- 이장군 열전
- 흉노 열전
- 위장군·표기 열전
- 평진후·주보 열전
- 남월 열전
- 동월 열전
- 조선 열전
- 서남이 열전
- 사마상여 열전
- 회남·형산 열전
- 순리 열전
- 급·정 열전
- 유림 열전
- 혹리 열전
- 대원 열전
- 유협 열전
- 영행 열전
- 골계 열전
- 일자 열전
- 귀책 열전
- 화식 열전
- 태사공 자서

○ 저자소개 : 사마천(司馬遷)
BC 145경 중국 룽먼[龍門]~BC 85경.
중국의 천문관, 역관(曆官), 최초의 위대한 역사가. 2세기까지 중국에서 나온 역사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히는 사기(史記)의 저자이다.
-생애
그는 BC 140~110년 한(漢)의 조정에서 태사령(太史令)을 지낸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사령이란 천문관측, 달력의 개편, 국가 대사(大事)와 조정 의례(儀禮)의 기록 등을 맡는 직책이었다. 사마천은 젊어서 여러 지역을 여행한 뒤에 조정의 관리가 되었고, BC 111년 중국 남서부지방의 군사원정에 참여했다.
BC 110년 황제가 국가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례인 봉선(封禪)을 거행하기 위해 타이 산[泰山]으로 갈 때 수행원의 자격으로 따라갔다. 그해 아버지가 죽었고, 의무적인 상례기간이 지난 후인 BC 10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BC 105년 무제(武帝)의 즉위가 한나라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중국 달력의 개편이 이루어지게 되어 사마천이 이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이었던, 중국 역사서의 집필에 착수했다. 역사서 집필에 대한 열망은 무제의 통치하에서 중국의 발전이 절정기에 달했으므로, 그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해서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겠다는 믿음으로 인해 한층 강해졌다. 그러나 역사서를 완성하기도 전에 당시 평판이 나쁘던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황제 비방혐의로 심문을 당했다. 무제가 그를 죽이기에는 아까운 인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마천 자신이 역사서를 완성하기 위해 처형의 연기를 간청했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처형되는 대신 궁형(宮刑:去勢刑)을 선고받았다. 훗날 무제의 화가 누그러지자 다시 황실의 총애를 받아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당한 치욕을 잊지 못한 채 은퇴해서 역사서 완성에 몰두했다.
-〈사기〉의 구성과 내용
〈사기〉는 그에게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준 책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많은 역사서가 있었으며, 궁정의 연대기 기록은 이미 이전의 황실에서는 관행으로 되어 있었다. 작은 제후국이었던 노(魯)의 〈춘추 春秋〉가 그러한 종류이다. 공자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은 기록된 사건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유교 경전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역사서인 〈사기〉가 이 위대한 경전 〈춘추〉와는 전혀 비교될 수조차 없으며, 자신은 공자와 같은 창작자가 아니라 단지 과거의 사실들을 전달하는 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한의 역사가로서 그의 뒤를 이은 반고(班固:32경~92)는 사마천이 여러 학파의 주장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도가사상에 몰두한 점을 비난했다. 그러나 반고 및 그의 동시대인들이 당연한 규범으로 받아들였던 유교적 도덕기준은 사마천의 시기에는 반고의 시대(1세기경)와 같은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자신과 동시대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학파를 절충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국교(國敎) 혹은 널리 통용되는 도덕적·정치적 기준이 아직은 유동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주술적·초자연적인 힘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내린 도덕적 평가는 어느 하나의 일관된 이론에 부합될 수 없었다.
〈사기〉에서 그의 주된 업적은 과거의 복잡한 사건들을 질서정연하게 기술했다는 점이다. 그가 서술한 과거의 사실들은 대부분 각자의 연대기를 따로 가지고 있던 많은 독립적인 제후국에서 유래하는, 서로 모순되는 자료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과거의 사실들을 이전의 역사가들처럼 단순히 연대순으로 정리하지 않고 5부분으로 분류하여 기술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5부분 가운데 본기(本紀)는 당시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왕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여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다. 표(表)는 연표(年表)인데 여러 독립적인 제후국들의 복잡한 역사를 명확하게 밝혀 어떤 시기에 각 제후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각 제후국의 상세한 역사는 세가(世家)에 기록되어 있다. 서(書)에는 행정의 중요한 측면들을 다루었다. 이들 부분으로부터 그가 유교의 도덕적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들보다는, 당시 점점 중앙집권화되고 있던 조정에서 새로운 정책을 추구하던 실제적·개혁지향적인 정치가들을 더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끝부분은 열전(列傳)으로 다양한 유형의 유명 인물들의 전기를 다루었다. 여기에 선정된 인물들은 여러 가지 유형의 행위에 있어서 본보기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열전에는 여러 이민족에 관한 사항도 포함되어 있는데, 중국과 이들 이민족 간의 관계는 무제 때 점점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사기〉는 뒷날 기타 왕조사(正史)의 모범이 되기는 했지만, 다른 정사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사기〉는 다루고 있는 시대가 훨씬 긴데, 사마천 이후의 역사가들은 이 책에서처럼 인류의 전역사를 다루려는 시도를 한 경우가 드물었다. 또한 책을 저술하기 위해 모은 자료도 훨씬 다양했다. 그는 진(秦)·한(漢)의 황실 문헌뿐만 아니라 그보다 이전에 나온 여러 역사서, 제후국들의 궁정 연대기, 경전이나 제자백가의 저술 등의 기록을 모았다. 심지어 역사적인 사실에 어느 정도 근거한 가공의 이야기까지도 자료로 이용했다. 이 책의 주제는 후기의 역사서들처럼 궁정 중심의 정치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훨씬 폭넓은 사회계층을 다루어 대부호·상인·협객·비적떼·배우·총신(寵臣)과 훌륭하거나 혹은 그렇지 못한 관리 등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그는 객관적인 역사를 구성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 역사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교훈적인 역사를 고집해 자신이 서술하고 있는 역사상의 인물들에게 도덕적인 평가를 내렸다. 또 다루고 있는 인물들을 특징에 따라 유형화해 어떤 인물의 본보기가 될 만한 행동을 한 장(章)에서 기록했는가 하면, 동일한 인물의 잘못된 행동을 다른 장에 기록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가 역사에서 이끌어낸 교훈은 다양한 것이었는데,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들도 많았다. 그러나 사료(史料)에 대한 그의 비판적 안목이야말로 훨씬 더 주목할 만하다. 그는 각 장의 끝부분에 예리한 비판적 논평을 첨가했다.
-영향
그는 역사가로서 뿐만 아니라 생동감있고 유연한 산문의 거장으로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후대의 작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초기 설화문학이나 소설에 미친 영향이 컸다. 그가 살던 시대 이래로 〈사기〉는 줄곧 중국 역사서의 걸작으로 인정받아왔으며, 훗날 중국 역사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은 물론이고 중국 문학적 전통의 영향을 받았던 여러 나라에서도 역사서의 모범으로 인식되어왔다. ㅡ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