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나혜석의 고백 : 여자도 사람이외다
나혜석 / 이다북스 / 2022.5.19
‘책 한 권의 운명은 저자보다 더 위대하다’라는 말이 있다. 시대를 움직인 책은 당대를 뛰어넘어 이후 역사의 시금석이자 버팀목으로 자리한다. 이에 이다북스는 우리 시대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숨어 있는 명저를 ‘이다의 이유’ 시리즈로 출간한다. “여자도 사람이외다”라고 외치며 여성을 넘어 주체적이며 독립적인 존재로 살고자 했던 나혜석. 이것이 ‘이다의 이유 03’ 『나혜석의 고백』을 펴내는 이유다.
○ 목차
들어가는 글
1장 __ 우리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이상적 부인
잡감(雜感)-혼인론, 여권론
잡감-K언니에게 여(與)함
2장 __ 더 단단히 살아갈 길
모(母) 된 감상기
백결 선생에게 답합
생활 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
3장 __ 나를 잊고 어찌 살 수 있으랴
우애결혼, 시험 결혼
나를 잊지 않는 행복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4장 __ 여자도 다 같은 사람이외다
이혼 고백서
5장 __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신생활에 들면서
구미 여성을 보고 반도 여성에게
독신 여성의 정조론
영미 부인 참정권 운동자 회견기
○ 저자소개 : 나혜석 (Na Hye-seok, 晶月 羅蕙錫)
정월 나혜석 (晶月 羅蕙錫, 1896∼1948)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부 나기정과 모 최시의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 딸로는 둘째로 태어난다. 부 나기정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개화 관료였다. 나혜석의 초명은 아지(兒只)였고, 진명여학교 입학 시 명순(明順)으로 불렸으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때는 혜석으로 개명한다. 1913년 3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시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 선과 보통과 1학년에 입학한다.
1914년 12월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제3호에 최초의 글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고, 오빠 경석의 친구인 최승구와 연애 관계를 맺는다. 1915년 아버지의 결혼 강요로 여주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1년간 근무하여 학비를 마련하고, 11월 복학하면서 고등사법과 1학년으로 전입했으나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 12월 아버지가 사망하고, 애인 최승구는 결핵에 걸려 귀국하여 요양을 한다. 1916년 최승구가 사망한 뒤 오빠 경석의 강력한 권유로 김우영과 교제를 시작한다. 1918년 3월 [여자계] 제2호에 나혜석의 대표작이자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하고, ‘H.S.’라는 필명으로 시 「광(光)」을 발표한다.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귀국하여 모교인 진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건강이 안 좋아 그만두고, 집에서 그림 공부를 한다. 9월 [여자계] 제3호에 『회생한 손녀에게」를 발표한다.
1919년 3월 박인덕 한신준려 한황애 시덕한 김마리아 등과 3한1운동에 여학생 참가를 의논하고, 개성과 평양으로 가서 자금 모금과 만세 운동 확산을 위해 이정자 한박충애와 만나 의논한다. 이화학당 학생들이 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풀려난다.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고 그와 함께 전남 고흥군에 있는 최승구의 묘지에 찾아가 비석을 세우고 돌아온다. 1921년 임신 9개월의 몸으로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유화 개인전람회를 연다. 4월 첫딸을 낳고, 7월 [신가정] 창간호에 「규원」을 발표한다. 9월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고, 1922년 3월 여자 야학 설립을 주도한다. 6월 조선총독부 주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유채수채화 분야에 출품한 「봄」, 「농가」가 입선한다.
1923년 1월 첫딸을 임신하여 낳고 돌이 될 때까지의 심리적·육체적 변화를 솔직히 기록한 「모(母) 된 감상기」를 발표한다. 6월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봉황성의 남문」이 4등, 「봉황산」이 입선한다. 이후 해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를 출품하여 입선하며,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天后宮)」이 특선, 「지나정(支那町)」이 입선한다. 1926년 4월 [조선문단]에 『원한』을 발표한다.
1927년 만주 안동현 살림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동래 시집에서 지내다가, 6월 남편과 함께 구미 여행길에 오른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파리에 도착한다. 스위스한벨기에한네덜란드 등을 여행하고, 법률 공부를 위해 남편이 베를린으로 간 사이 파리에서 야수파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 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한다. 10월 천도교 도령(道令)으로 파리에 온 최린을 만나 예술을 논하고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연애 관계를 맺는다. 1929년 귀국하여 9월 수원에서 ‘구미 사생화 전람회’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연다. 1930년 김우영이 서울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파리 시절 최린과의 연애에 관한 소문이 나서 남편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결국은 이혼한다.
이후 나혜석은 실의를 딛고 그림 작업에 몰두하여 계속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서 좋은 평가를 얻는다. 1932년 금강산 해금강에서 제13회 제국미술원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다가 불의의 화재로 10여 점밖에 건지지 못해 충격을 크게 받는다. 1933년 생계와 그림 활동을 위해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사’를 열고 운영한다. 1934년 김우영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생활과 심경을 솔직하게 서술한 『이혼 고백장』([삼천리], 1934. 8∼9)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 관념을 비판함으로써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수덕사·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가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인, 언론인으로 파격적인 작품과 사회 비판적 주장을 통해 봉건적 제도와 인습이라는 금기에 도전했다.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남기며 가부장제 타파와 여성 의식화에 주춧돌을 놓았다.
– 편자 : 조일동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후 여러 출판사에 몸담았으며, 현재 이다북스에서 출판 기획을 맡고 있다. 에세이집 『마흔의 봄』을 썼으며, 『나혜석의 고백』 『나운규의 말』 등을 엮었다.
○ 책 속으로
다행히 누가 먼저 밟아 놓은 발자국을 따라 길을 찾게 되었소마는 그 사람도 몇 군데 헛디딘 자국이 있는 것을 보니 이 두터운 눈을 한 번 밟기도 시리거든, 그 사람은 길을 찾느라고 방황하기에 얼음도 밟게 되고 구렁이에도 빠지게 되었으니, 아마도 그 사람의 발은 꽁꽁 얼었을 것 같소. 동동 구르며 울지나 아니했는지 몹시 동정이 납디다.
그러나 그 발자국을 따라 반쯤 올라가서 그 사람의 간 길과 나 가고 싶은 길이 다르오그려. 나도 그 사람과 같이 두렵게 깔린 눈을 푹푹 디디어야만 하게 되었소. 차디찬 눈이 종아리에 가 닿을 때에는 선득선득하고 몸에 소름이 쭉쭉 끼칩디다. — p.25
최후로 씨께 요망하는 바는 나도 신여자로 자처한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신인이라고 해주는 것을 별로 영광으로 알지 않는다 함이외다. 나는 사상가도 아니요, 교육가도 아니요, 예술가도 아니요, 종교가도 아니외다. 다만 사람의 탈을 썼고, 여성으로 태어났으며, 사랑으로 살아갈 도리만 찾을 뿐이외다. 혹 다른 때 인연을 맺게 되더라도 명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씨여 사상적 방황이란 그다지 못된 일이오니까? 방황해야만 할 때 방황하지 말라는 것은 못된 일이 아니오니까? 그다지 조바심을 하여 걱정할 것이야 무엇 있으리까? 방황도 아니 하고 고정부터 하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화석의 그림자나 아닐까요? — p.81
누구보다 먼저 여자 자신이 자기 일신이 땅 위에 있는 것을 자각해야 하겠습니다. 자기 자신에 과로한 것을 가히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계획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고, 동시에 남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조선 여자는 너무 오랫동안 자기에 대한 제일 중요한 것을 잃고 살아왔습니다. 즉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생명이 있다.’ 하는 것을 억제하고 왔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제 숨소리를 들어보시오. ‘여자도 사람이다.’ 하는 자부심이 이상스럽게 전신에 흐르리다. 이렇게 여자의 눈이 뜨일 동시에 지금까지의 자기가 불행했고 불쌍했던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pp.88~89
요사이 남녀 문제를 통틀어 말하는 중에 여자는 남자에게 밥을 얻어먹으니 남자와 평등이 아니요, 해방이 없고, 자유가 없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이는 오직 남자가 벌어 오는 것만 큰 자랑으로 알 뿐이요. 남자가 벌도록 옷을 해 입히고, 음식을 해 먹이고, 정신상 위로를 주어 그만한 활동을 하게 하는 여자의 힘을 고맙게 여기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반감을 일으키기보다 여자 자신이 반성해야겠지만 의식주에 대한 남녀 간의 문제는 오직 곁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조소거리밖에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 가정 살림살이가 좀체 개량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이와 같이 남자가 자기만 일하는 줄 알고 자기만 잘난 줄 알며, 따라서 여자를 위해 주지 않고 고맙게 여겨 주지 않는 가운데 불평이 생기고 다툼이 생기며, 남편은 어디까지든지 강자요 우월한 자이며, 부인은 어디까지든지 약자요 열등한 자가 되고 보니 여기에 무슨 살아가는 맛을 볼 수 있겠습니까. 오직 남자 그 사람만 잘못이라 할 수 없고, 여자 그 사람만 불쌍하다고 할 수 없으니, 사회제도가 그릇되었고 교육 그것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 pp.90~91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남의 정조를 유린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깨물어 부수는 일이 적지 않소이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 p.179
다수는 펼치기 전에 굽히게 된다. 여하히 누르든지 미혹하든지 분지르든지 하더라도 한뜻으로 살려고만 하면 되지 않는가. 겨울에 얼어붙은 개천을 보라. 그 더럽게 흐르던 물이 어떻게 이렇게 희고 아름답게 얼어붙는가. 이것은 확실히 그 본체는 순정과 미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으로 보아 진보해 가는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떨어진 물이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떨어진 유혹의 길이 깊으면 깊어질수록 더 심각한, 더 복잡한 현실을 엿보는 고로 이 의미로 보아 이러한 사람은 미혹에 처하면 처할수록 외면으로는 비록 고통스러울지언정 내막은 풍부한 감정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 p.191
○ 출판사 서평
- “여자도 사람이외다” 주체적인 인간이고자 했던 나혜석
1922년 「모(母) 된 감상기」에서 나혜석은 어머니가 되는 과정과 심정을 말하며 여성 고유의 경험을 처음으로 공론화했다. 이 글은 모성의 가치를 언급하고 옹호하면서도 출산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뒷전으로 미뤄야 하는 여성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고, 여성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 글을 지면에 실린 후 비난이 쏟아졌지만, 나혜석은 굽히지 않았다.
1934년 잡지 [삼천리]에 실린 「이혼 고백서」는 「모(母) 된 감상기」에 대한 비난 수위를 훨씬 뛰어넘었다. 결혼에서 이혼에 이르게 된 과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 이 글에서 나혜석은 이혼 과정에서 남성들의 편협함을 보았고,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정조 관념을 강요하는 사회와 부딪쳤으며, 여성들이 현모양처라는 경직된 틀에 구속당하는 시대에 저항했다. 이 글로 인해 나혜석은 가정과 사회에서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나혜석의 글은 당시 사회의 치부를 여지없이 보여주었고, 그로써 이어질 앞날을 충분히 읽었을 것이다. 「이혼 고백서」는 나혜석이 경직된 사회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었으며, 그 때문에 그가 얼마나 저항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더구나 그것은 나혜석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뜻을 기어이 세상에 내보였다.
- 「모 된 감상기」와 「이혼 고백서」를 비롯해
당시 신문과 잡지에서 찾아낸 나혜석의 삶과 꿈 『나혜석의 고백』
우리나라 여성 중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 신여성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유학길에 오르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일본에서 서양 유화를 배웠고 국내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미술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나혜석의 재능은 그림에만 머물지 않았다. 1918년에 조혼과 가부장제 등 여성에게 불리한 관습을 비판한 소설 『경희』를 발표하며 작가로서도 남다른 재능을 키웠다.
나혜석은 화가와 작가이기 전에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여성이자 여성의 권리를 찾고자 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나혜석은 가부장적인 사회제도와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침묵하지 않았으며, 그런 현실을 누구보다 강하게 비판하고 저항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따가운 시선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여성에게 억압적인 사회와 맞서 싸웠다. 그 싸움은 인형이 아닌, 여성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살고자 한 바람이자 실천이었다.
나혜석은 시대를 뛰어넘었고, 지금 우리 앞에 살아 돌아왔다. 사회는 나혜석을 고립과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결과적으로 나혜석의 저항과 도전은 시대를 앞서가는 용기로 되돌아왔다.
- 우리는 나혜석에게서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왜 다시 “여자도 사람이외다”를 외치는가?
사람과 시대가 바뀌고 사회제도와 의식이 새로워졌음에도 나혜석의 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빛을 발한다. 경직되고 왜곡된 사회에 대한 나혜석의 외침과 저항이 결코 당대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나혜석이 산 시대를 지난날의 일로 가벼이 넘기기에는 오늘 우리의 현실이 나혜석의 시대와 다르고, 나혜석이 꿈꾼 날들이 온전히 자리잡고 있는가?
나혜석의 글들을 되짚어 보고, 글로써 나혜석의 삶을 돌아보며, 나혜석의 정신을 다시 읽는 것은 나혜석의 남다른 삶을 호기심으로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시간은 흘렀으나 그 시대와 다르지 않고, 나혜석과 같은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혜석의 글들에서 우리는 여성을 넘어 주체적이며 독립적인 존재를 읽고 함께 길을 찾는다. “여자도 사람이외다”는 100년 전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주체적이며 독립적인 존재로서 짊어져야 할 삶이다. 여자도 사람이며, 누구나 사람이다. 이것이 이다북스에서 나혜석의 글들을 모아 ‘이다의 이유’로 펴내는 이유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