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두 문화
C.P. 스노우 / 사이언스북스 / 2007.5.24

인류문화의 영원한 두 함수인 과학문화와 인문문화를 조명함으로써, 이 둘의 조화가 얼마나 중요한 미래적 과제인가를 보여주고, 심각하리만큼 급속해져가고 있는 지식 전문화의 속도에 매몰된 현대인들에게 문화적 보편성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1959년에 5월 7일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전통적인 연례 리드 강연의 내용을 엮은 것이다.
강연의 내용을 1부로 싣고, 2부는 4년 뒤인 1963년의 시점에서 앞의 강연과 관련하여 그때까지 제출된 논평과 반응, 비판들을 지은이가 직접 정리하고 해명하고 추가한 글을 실었다.
또 마지막 3부에는 90년대의 시점에서 스노의 강연을 바라본 스테판 콜리니의 해제가 실려 있다.
○ 목차
옮긴이 서문
제2판에 붙이는 서문
Ⅰ. 두 문화와 과학혁명 – 1959년도 리드 강연
Ⅱ. 두 문화 : 그 후의 고찰
Ⅲ. 스테판 콜리니의 해제
참고문헌
옮긴이 해제

○ 저자소개 : C.P. 스노우
찰스 퍼시 스노 남작(Charles Percy Snow, Baron Snow, Kt., CBE, 1905년 10월 15일 ~ 1980년 7월 1일)은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화학자, 소설가, 영문학자이다.
라이체스터 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트 칼리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특별연구원으로 종사하였다. 공업기술부 차관과 상원의원을 역임했으며, 1980년 7월 작고했다. 저서로는 『항해 중의 죽음』, 『이방인과 동포 (전12권)』등이 있다.
잉글랜드 레스터셔주의 레스터에서 태어난 찰스 스노는 레스터 대학교에 진학한 후 화학을 전공하였으나, 2년 만에 전공을 물리학으로 바꾸어서 졸업하여, 물리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크라이스트 칼리지에서 수학하였고, 이곳에서 분광학에 대한 연구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수학자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와 친분을 쌓기도 했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는 영국 노동연금부의 기술고문으로 일하였고, 이 시기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이었기 때문에 나치 독일의 첩보기관인 게슈타포에서 찰스 스노를 영국 내에서 활동하는 주요 인사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인 블랙 북에 등재하고 예의주시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후 찰스 스노는 독학으로 영문학을 공부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소설 시리즈인 《괴짜들과 형제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 사이의 교류를 촉구하기 위하여 《두 문화》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한다.
1980년 7월 1일에 런던의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 역자 : 오영환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거쳐 네덜란드 라이덴 (Leiden) 국립대학교 철학대학원을 졸업 (Drs. Phil.)하고,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브리디시 카운슬 펠로우 (1983~1984),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객원 교수 (Visiting Fellow, 1991~1992), 일본 교토대학교 초빙 교수 (1993),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1972~1997) 등을 역입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명예 교수, 한국화이트헤드학회 고문, 미국 학술 전문지 Process Studies의 International Advisory Board 자문 위원 (1994~현재)이다.
주요 저서와 역서로 『문화의 전략』, 『과학과 근대세계』, 『과정과 실재-유기체적 세계관의 구상-』, 『열린 사고와 철학』, 『관념의 모험』, 『두 문화』,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 『교육의 목적』, 『화이트헤드와의 대화』, 『과학과 근대세계』가 있고 공저한 책으로는 『과학과 형이상학』, 공역한 책으로는 『열린 사고와 철학』, 『사고의 양태』가 있다. 제4회 서울철학상과 2006년·2007년 대한민국 학술원 기초학문육성 “우수도서”상을 받았다.
○ 추천평
현대 문명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에 존재하는 심각한 단절. 그 단절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해결책은 무엇인가. _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

○ ‘두 문화’ 개관
‘두 문화’는 영국의 과학자 겸 소설가 찰스 퍼시 스노우가 행한 영향력 있는 1959년 리드 강좌 (Rede Lecture)의 제목이다. 그 주제는 현대 사회의 두 문화 곧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의사소통 단절이 세계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이었다. 스노우는 교육받은 과학자이면서 성공적인 소설가로서 그 문제의 거론에 알맞은 자격이 있었다.
그 강좌는 5월 7일 케임브리지 대학교 본부 세니트 하우스에서 열렸고, 이내 《두 문화와 과학 혁명》으로 출판되었다. 그 강좌와 책은 스노우가 역시 “두 문화”라는 제목으로 1956년 10월 6일에 출판된 《뉴 스테이츠맨》 잡지에 실은 논문을 확장한 것이었다. 스노우의 강좌가 책으로 출판되자 대서양 양쪽에서 널리 읽히고 토론되었으며, 그는 마침내 《두 문화와 두 번째 시각: 두 문화와 과학 혁명의 확장판》(1964)을 또 다시 쓰게 되었다.
그러나 스노우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 없지 않았다. 예컨대, 문학평론가 프랭크 리비스는 《더 스펙테이터》에서 스노우를 조롱하고 그를 과학계의 PR 맨이라고 깎아내렸다. 그러나 《더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먼트》는 《두 문화와 과학 혁명》을 2차 대전 이후 서방세계의 대중적 담론에 영향을 미친 백 권의 책에 포함시켰다.
– 함축과 영향
“두 문화”는 두 입장 차이를 나타내는 간편한 표현으로서 보편적인 어휘에 포함되었다. 그 두 입장이란:
과학적 방법은 언어와 문화 속에 뿌리박혀 있다는 관점으로 인문학을 뒤덮고 더욱 더 구성주의적으로 가는 세계관, 그리고 관찰자는 편견없이 문화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자연을 관찰할 수 있다고 보는 과학적 관점.
그 표현은 현대 세계의 과학자와 인문학 지식인들 사이에서 벌어져 온 균열 또는 적대감이 감도는 몰이해를 나타내는, 애매하면서도 널리 퍼진 약호로서 살아 남았다.
두 입장의 이같은 양극화는 정말 20세기 후반 학계의 한 쟁점이었다. 스노우의 원래 주장은 수사학적 도구에 의존했다.
그의 골-간격-균열 주장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스노우는 이내 “인문학 지식인”과 “전통 문화”를 호환적으로 사용한다. 이같은 혼동은 “모든 ‘전통적’ 문화”에 “비과학적” 심지어 “반과학적” 경향이 있다는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갈릴레오, 코페르니쿠스, 데카르트, 보일, 뉴톤, 로크, 칸트: “모든 ‘전통적’ 문화” 속에서 이들보다 더 “전통적”인 사람이 있는가[?][2]
스노우 자신도 다시 생각해보고 2분법적 단정에서 약간 후퇴했다. 그의 1963년 책에서 그는 ‘제3 문화’의 중재 가능성에 대하여 좀 더 낙관적으로 말했다. 이 개념은 나중에 존 브록맨이 1995년 책 《제3 문화: 과학 혁명을 넘어서》에서 다시 꺼냈다. 스테판 콜리니 (Stefan Collini)는 《두 문화》 (1993)를 다시 인쇄할 때, 세월이 스노우가 주목했던 문화의 간격을 많이 줄였지만 모두 없애지는 못했다고 지적했다.
여러 학문 분야의 특성과 각 분야마다의 발달에 대한 이해가 더해갈수록 ‘두 문화’ 같은 단순한 2분법은 전보다 덜 그럴듯하게 들리게 되었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2003년 책 《고슴도치, 여우, 그리고 훈장님의 발진》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그 책은 변증법적 해석을 내세워, “두 문화”라고 하는 스노우의 개념은 과녁을 빗나갔을 뿐만 아니라 근시안적이고 해로운 시각이며, 아마 수십 년간 필요없는 담 쌓기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노우의 기본 시각은 아직도 유효한 바: 인문학자들은 과학을 많이 알지 못하고 열역학 제2법칙을 몰라도 아무렇지도 않은 한편, 과학자는 세익스피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정말이지 그의 연극을 많이 알지 못해도 아무렇지도 않다. 이같은 간격은 “두 문화”라는 간략한 기호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것은 스노우 경 덕택이다.

– 철학적 화신
사이먼 크리칠리는 《대륙 철학: 짧은 개요》(2001, p. 49)에서 스노우의 강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시사했다:
[스노우]는 공동의 문화는 사라지고 두 다른 문화 곧 한편으로 과학자들이 대표하는 문화와 다른 한편 스노우가 말하는 “인문학 지식인들”이 대표하는 문화가 대두했다고 진단했다. 만일 전자가 과학과 기술과 산업에 의한 사회 개혁과 진보를 선호한다면, 인문학 지식인들은 고도 산업 사회에 대한 이해와 동조의 관점에서 스노우가 말하는 ‘자연 상태의 러다이트들’이다. 밀의 용어로는, 그 분파는 벤덤 파와 콜러리지 파의 사이다.
다시 말해서, 스노우가 말한 바는 19세기 중엽에 유행했던 논쟁을 다시 표면화시킨 것이라고 크리칠리는 지적했다. 크리칠리는 리비스가 논쟁에 기여한 바는 ‘악의에 찬 인신공격’이었고, 나아가 토머스 헨리 헉슬리와 매슈 아널드를 또한 인용하면서 그 논쟁은 ‘영국 문화사에서 잘 알려진 충돌'(ibid, p. 51)이라고 지적했다.
– 스노우 인용
1930년대 어느 날 고드프리 하디가 나에게 이렇게 말해서 좀 놀란 적이 있었다:
요즘 “지식인”이라는 말이 어떻게 쓰이는지 주목한 적 있소? 확실히 러더포드나 에딩턴이나 디락이나 아드리안이나 나를 포함하지 않는 새로운 정의가 있는 것 같소. 그거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소? 안그렇소?
전통 문화의 기준에 비추어 고등교육을 받았다고 여겨지고 과학자들의 무식함에 대하여 신이 나서 유감을 표명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나는 여러 번 참석했다. 한두 차례 당하고 나서, 나는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열역학 제2법칙을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반응은 싸늘했고 또 부정적이었다. 그때 나는 “당신은 세익스피어의 이 작품을 읽었습니까?”에 해당하는 과학자 입장의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다.
만일 내가 보다 더 쉬운 질문, 예컨대, “당신은 읽을 수 있습니까?”에 해당하는 질문, “당신에게 질량 또는 가속도는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다면, 고등교육을 받은 열 사람 가운데 불과 한 사람이 내가 자기와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라고 이제 나는 믿는다. 현대과학의 거대한 건축물이 이렇게 높아지는데, 서양에서 가장 머리좋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것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구석기 선조들의 수준이다.
기술은 […] 요물이다. 그것은 한편 당신에게 선물을 주고, 다른 한편 당신의 등을 찌른다.

○ 독자의 평
본 서는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문학작가인 C.P.스노우의 유명한 리드 강연을 토대로로 한 저서다.
저자는 과학혁명의 시대를 맞아서 두 문화 (인문학의 문학적 지식인과 자연과학의 과학자) 의 분극, 대립, 단절과 고정된 패턴으로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보고 두 문화의 간극을 없애기 위해서도 교육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저자는 과학자들의 무지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열역학 제2법칙을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것은 ‘당신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은 일이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맞먹는 과학의 질문이며, 더 간단히 ‘질량 혹은 가속도란 무엇인가?’ 역시 ‘당신은 읽을 줄 아는가?’라는 질문과 동등한 질문을 던진 사례를 들었다. 즉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단절과 분열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이것이 세계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1959년에 과학과 인문학의 통섭이나 융합을 주장하고 미래 과학혁명에 대한 교유개혁을 주장한 저자의 탁월한 통찰력에 대해 그럼 사회과학은 어떠냐, 학자들 간에 인문적 문화와 과학적 문화의 분열 논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판단과 미래를 보는 혜안은 지금도 바뀌지 않는 제도나 논쟁에만 편협된 그래서 여기서 깊은 함의 와 여적, 단편화의 문제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본다면 그 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필독서다.
역자가 제시한 본 서외 추천하는 ‘과학과 근대세계’, ‘어느 수학자의 변명’, ‘과학과 인간가치’ 등의 책들은 함께 읽어야 할 좋은 참고서적이 아닐 수 없다.
[밑줄치기]
ㅇ 그런데 우리는 사상이나 창조의 핵심을 이루는 최상의 기회를 태만 때문에 놓치고 있다. 두 주제, 두 규율, 두 문화 -두 은하계까지도- 의 충돌하는 지점은 반드시 창조의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이다. 정신 활동의 역사에서 어던 돌파구가 열린 것도 바로 이 점이었던 것이다. 이제야말로 이 기회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다만 두 ㅁ화에 대해서 서로 접촉하여 대화를 나누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기회는 말하자면 진공 상태 속에 있는 셈이다. 20세기의 과학이 20세기의 예술에 조금밖에 동화되지 못했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ㅇ 나는 여기서 거듭 나의 소신을 밝혀두고 싶다.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또 의사소통을 하지 않으려는 두 문화의 존재는 위험하다고 본다. 과학이 우리들의 운명을 크게 좌우하는, 즉 우리들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결정한다는 시대에 있어서는 단지 실제적인 견지에서만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위험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