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바웬사 자서전 : 희망의 길 (상•하)
레흐 바웬사 / 희성출판사 / 1988.6.1

– 바웬사의 자서전 <희망의 길>을 보면 1983년 3월 22일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1983년 3월 22일 바웬사는 솔리다리티의 투사 6명이 재판받는 것을 방청하기 위해 코스잘린의 군사재판소로 가던 중이었다.
(…)
방청객들에 대한 의례적인 신분증 확인이 있는 가운데 군인들이 바웬사가 탄 차를 정지시켰다.
5분 후면 재판이 시작될 것을 알고 있는 바웬사는 마음이 급해졌고, 상부로부터 명령을 받고 있는 군인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둘 사이에 법과 법 실행에 관한 논박이 30분간 있고 나서 다른 명령이 전해져 와 바웬사는 재판소로 갈 수 있게 된다.
재판소 건물 앞에 이르자 군중이 몰려들어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낸다.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재판관이 바웬사를 영접한다.
그 재판관은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기는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재판소로 들어오는데 어떤 장애물이 있었는지 군인들이 막고 서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잠시 후 재판은 시작됐다. 과연 희망이란 거기에도 있었던 것이다.”
○ 목차
희망의 길 (상)
희망의 길 (하)

○ 저자소개 : 레흐 바웬사
레흐 바웬사(Lech Wałęsa, 1943.9.29.~)는 폴란드의 노동운동 지도자 출신의 정치인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돼 1990~1995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이다.
폴란드 최초의 자유 노동조합인 자유노조연대를 이끌며 폴란드 노동자들의 자유를 위해 싸운 공로로 198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 자신이 조선소의 노동자였던 레흐 바웬사가 이끌었던 노동운동은 임금 인상과 같은 경제 문제를 넘어서서 폴란드의 자유와 민주화를 위한 투쟁으로 발전했다.
이는 공산권에서 일어난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민주화 운동으로,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그가 세운 자유노조연대에는 1천만 명이 가입했다. 레흐 바웬사는 노동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1989년 폴란드 최초의 민주적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나치에게 희생당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바웬사는 초등학교와 직업학교 교육만 받고 1967년 그단스크에 있는 레닌조선소에 전기공으로 취직했다. 바웬사가 정치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968년 프랑스의 학생대봉기 때문이었다. 그 영향으로 1970년 폴란드에서 파업이 시작될 때 파업의 지휘역을 맡기에 이른다.
즉 1970년 식량파업 때 공산당 정권이 시위대에 발포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반정부 노동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그로부터 10년간 감찰, 재고용, 또 감찰, 해고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바웬사는 노동조합의 활동을 구축해가기 시작했다.
1980년 레닌조선소의 식료품값 인상 항의 시위 당시 파업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바웬사는 경영진과의 협상에서 요구사항을 관철시켰다. 고무된 인근 지역 노동자들도 합세해 ‘공장간 파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얼마 뒤 이 위원회는 자유노조 ‘연대’ (Solidarność = 솔리다리티)로 이름을 바꾸고 전국 노동조직으로 탈바꿈했다.
1980년 8월 총파업이 폴란드 전역을 뒤흔들어놓았고, 솔리다리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폴란들 국민들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500여 일 간은 ‘폴란드의 봄’이라 불리었다. 폴란드 당국은 1981년 12월 계엄령이 선포, ‘연대’는 불법화됐고 바웬사는 재판절차 없이 11개월 동안 구금당한 후 계속 격리된 생활을 했다.

○ 언론소개
1983년 노벨상위원회는 시상발표문에서 바웬사가 극심한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면서 노동자들의 자체적인 기구결성권을 얻어 내기 위해 헌신한 공로로 평화상을 시상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바웬사의 이 같은 헌신이 UN에 의해 규정된 기본권인 보편적 결사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보다 광범위한 운동으로 볼 때 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또 바웬사는 그의 조국의 문제들을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협상과 협력을 통해 해결하려는 결의를 보여주었으며 전 세계인의 평화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대변한 인물이었다고 극찬했다. (<가톨릭신문>, 1983.10.16.)
바웬사는 1980년 자유노조운동을 주도, 3년째 연속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가 1983년에 비로소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로써 바웬사는 소련의 안드레이 사하로프 이래 동구권에서는 2번째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됐다. 폴란드인으로서는 최초의 수상자였다.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의 에길 아즈비크 위원장은 평화상을 수여하면서 바웬사를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소련의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 역대 수상자들과 함께 ‘인권의 승리자’라고 칭찬했다. 특히 바웬사가 동구권에서는 처음으로 자유노조를 결성, 투쟁했지만 폭력만은 배제했다고 격찬하기도 했다.
바웬사는 그다니스크의 자택에서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이번 노벨평화상은 폴란드 국민 전체에 수여된 것이며 전 세계가 자유노조의 이상과 투쟁을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였다”고 말했다.
바웬사는 귀국이 불허될 것을 우려, 부인 다누타를 노르웨이 오슬로의 시상식에 대신 보내야 했다. 12월 10일 수상식장에서 바웬사는 다누타가 대독한 짤막한 수상 연설을 통해 불법화된 폴란드 자유노조의 수백만 노동자들의 환희와 희망을 전달했다.
“상반된 이해관계가 있더라도 증오와 유혈사태가 아닌 참된 화해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질 때 이 세계를 보다 밝은 길로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길이야말로 곧 인류의 고귀한 이상인 연대의식이라는 도덕적인 힘을 고양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수상의 영광을 그동안 함께 투쟁을 벌여온 그다니스크의 노동자들에게 돌린다.”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바웬사에게 축하 전문을 보냈다. 교황은 전문에서 노벨평화상이 “진실한 대화와 상호협력의 평화적 방법을 통해 전 세계와 폴란드 사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려 한 의지와 노력에 의해 수여됐다”고 밝혔다.
폴란드 정부당국은 바웬사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해 당시 아무런 논평도 하지 않았으나, 관영보도기관들은 폴란드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선전공세의 일환이라면서 못마땅하다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한편 소련의 몰락이 가속화하면서 폴란드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정부는 바웬사 측과의 협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원탁회의’에서는 헌법 개정이 합의돼 자유노조의 합법화, 자유선거에 의한 상원 신설, 하원 460석 중 35%의 자유선거, 대통령제 신설 등이 결정됐다. 노조가 다시 합법화된 가운데 치러진 1989년 6월 총선에서 ‘연대’ 세력이 압승을 거뒀다. (상원에선 99%, 하원에선 허용된 의석 35%를 모두 차지) 집권당인 통일노동당(공산당)이 다수의 의석을 상실했다.
※1989년은 동유럽에서 동시다발로 혁명이 일어난 해다. 이번 혁명은 공산혁명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자유민주주의 혁명이었다.
이 해에 폴란드에선 자유노조의 결사체인 솔리다리티(Solidarity) 운동으로 비공산정권이 들어섰고, 동독과 서독을 가르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에서 민주화시위로 공산정권이 붕괴됐고, 중국에서도 텐안먼(天安門) 사태가 일어났다.
역사가들은 141년 전 1848년에 전 유럽에 동시다발로 일어난 ‘1848년 혁명'(Revolutions of 1848)에 빗대 이 해의 혁명운동을 ‘1989년 혁명'(Revolutions of 1989)이라고 명명한다. (…)
폴란드에서 공산정권이 붕괴되면서 그 여파는 동유럽 전체로 확산됐다.
바웬사는 공산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거부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1989년 9월 비공산 연립정권이 출범했다. 마조베츠키가 총리가 됐는데 공산진영 최초로 비공산주의자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폴란드 역사에서는 이 시점부터의 폴란드를 ‘제3공화국’이라고 부른다.
1990년에 이루어진 완전한 자유 지방선거에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유노조가 승리했고, 통일노동당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국방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자리까지 자유노조로 넘어갔다. 야루젤스키는 결국 자유노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대통령 임기를 리셋하는 헌법 수정에 동의하는 방식으로 대통령에서 퇴임했으며, 이에 따라 임기 5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수정이 이루어졌다.
수정된 헌법에 따라 1990년 11월에 치러진 첫 직선제 대선에서 바웬사는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다. 바웬사는 역사적인 ‘민주 폴란드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바웬사는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으나 경제정책의 실패로 1991년과 1993년 총선에서 참패하여 공산당의 후신인 사회민주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동거정부가 형성됐고 1995년 대선에서도 패배했다. 바웬사 이후 폴란드 정계는 우파인 ‘법과 정의(PiS)’와 ‘시민연단(PO)’이 양대 축으로 자리잡았다.
즉 2005년 (9월) 총선과 (10월) 대선에서 사회민주당은 군소정당으로 몰락하고 말았고, 이후에는 ‘법과 정의’와 시민연단이 정권을 주고받는 보수양당제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바웬사의 자서전 <희망의 길>을 보면 1983년 3월 22일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83년 3월 22일 바웬사는 솔리다리티의 투사 6명이 재판받는 것을 방청하기 위해 코스잘린의 군사재판소로 가던 중이었다.
(…)
방청객들에 대한 의례적인 신분증 확인이 있는 가운데 군인들이 바웬사가 탄 차를 정지시켰다. 5분 후면 재판이 시작될 것을 알고 있는 바웬사는 마음이 급해졌고, 상부로부터 명령을 받고 있는 군인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둘 사이에 법과 법 실행에 관한 논박이 30분간 있고 나서 다른 명령이 전해져 와 바웬사는 재판소로 갈 수 있게 된다.
재판소 건물 앞에 이르자 군중이 몰려들어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낸다.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재판관이 바웬사를 영접한다. 그 재판관은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기는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재판소로 들어오는데 어떤 장애물이 있었는지 군인들이 막고 서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잠시 후 재판은 시작됐다. 과연 희망이란 거기에도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