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세속도시
하비 콕스 / 대한기독교서회 / 1998.12.31
현대문명과 세속화에 대한 신학적 전망을 밝힌 것으로서 세속도시의 정체 및 그 신학적 과제와 선교적 전략을 사회학적, 신학적인 측면에서 예의 분석, 새로운 교회의 모습과 기능을 ‘하나님의 전위대’로 부각시킨 콕스의 명저이다.
세속도시의 정체 및 그 신학적 과제와 선교적 전략을 사회학적, 신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한 하비 콕스의 명저로, 60년대 세속화 논쟁의 시발점이 된 이 책은 새로운 교회의 모습과 기능을 ‘하나님의 전위대’로 부각시키고 있다.

○ 목차
서론: 세속사회의 신기원
Ⅰ. 세속도시의 출현
제1장 세속화의 성서적 근거
세속화 대 세속주의
세속화의 차원
제2장 세속사회의 형체
무명성
기동성
제3장 세속도시의 모습
존 케네디와 실용주의
알버트 카뮈와 불경성
틸리히, 바르트와 그 세속형
제4장 교차문명적 전망의 세속도시
뉴델리와 인도
로마와 서부 유럽
프라하와 동부 유럽
보스턴과 미국
Ⅱ. 세속도시에서의 교회
제5장 사회변혁의 신학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세속도시
혁명신학
제6장 하나님의 아방가르드로서의 교회
교회의 선포적인 기능: 권력쟁취를 방송하다
교회의 봉사적 기능: 도시의 상처를 치유하다
교회의 코이노니아적인 기능: 인간 도시를 보이게 하다
제7장 문화적인 악령추방자로서의 교회
Ⅲ. 현대 도시생활관의 비신비화
제8장 세속도시에서의 일과 놀이
일하는 장소와 거처하는 장소의 분리
직장의 관료주의적 구조
종교와 일의 결별
제9장 성과 세속화
부족 근성의 유물
마을 미덕의 유물
제10장 교회와 세속대학교
Ⅳ. 신과 세속적 인간
제11장 신에 대하여 세속적 형식으로 말함
사회학적 문제로서 신에 대하여 말함
정치적 문제로서 신에 대하여 말함
신학적 문제로서 신에 대하여 말함

○ 저자소개 : 하비 콕스 (Harvey Cox)
1929년에 태어났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와 예일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하버드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2년 1년간 독일 베를린에서 거주하면서 동독 교회와 하버드대학 간의 연락 책임을 맡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기독학생운동(SCM)과 흑인민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보스턴 흑인 거주 지역에서 흑인해방과 민권운동을 위해 노력했다. 1965년 이후 하버드신학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쳤다.
1965년 출간한 『세속도시』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14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100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으며 독일 마부르크대학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개신교 신학 서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비 콕스는 또한 1988년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0세기 10대 신학자에 이름을 올리는 등 영향력 있는 신학자가 되었다. 『세속도시』 이후 콕스는 교회가 교회 체제보다 사람들의 신앙과 실천에 중심을 두어야 하며 사회 변화에 앞장서야 주장한다.
하비 콕스는 해방신학과 같은 제3세계 기독교 운동에 관심이 많으며, 종교 간 대화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2009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하비 콕스는 다양한 종교들을 함께 다루는 강의를 개설해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세속도시』(1965) 말고도 『신의 혁명과 인간의 책임 God’s Revolution and Man’s Responsibility』(1966), 『바보제 The Feast of Fools』(1966), 『영혼의 유혹 The Seduction of the Spirit』(1973), 『세속도시에서 종교 Religion in the Secular City』(1985),『하늘에서 내린 불 Fire from Heaven』(1994), 『예수, 하버드에 오다 When Jesus Came to Harvard』(2004), 『종교의 미래 The Future of Faith』(2009) , 『우리 인간의 종교들』 등 많은 책을 썼다.
– 역자 : 구덕관 외
○ 책 속으로
(하비콕스는 그의 책에서 세속신학자 반 페센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세속화란 ‘첫째는 인간의 이성과 언어를 지배해 오던 종교로부터, 둘째는 형이상학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속화는 세계에 대한 종교적 또는 유사 종교적 이해로부터 세계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모든 폐쇄적 세계관과 모든 초자연적 신화와 거룩한 상징들을 깨뜨려 버립니다.
세속화는 또한 역사의 비운명화이기도 하다. 역사의 비운명화란 인간이 온 세상은 그의 양손에 맡겨졌다는 것과 인간 행위의 결과인 행운이나 진노에 대하여서는 핑계할 수 없이 되었다는 것을 발견함이다.
세속화는 인간의 관심을 저 세상으로부터 지금 이 세상으로의 돌림이다. —- 하비콕스의 세속도시 p.8
○ 세속도시 서평
『세속도시』는 1960년대 유럽과 미국의 신학계의 동향과 깊이 결부돼 있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자들과 신학자들이 대화했고, 미국에서는 케네디 시대가 열리고 흑인민권운동이 전개되면서 기독교의 세속화 논의가 활발했다.여기서 세속화란 과학의 발달로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쇠퇴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세속화를 신학적 논의 한 가운데로 들여 오는 데 결정적영향을 준 신학자는 본 회퍼였다. 나치 감옥에서 남긴 서신에서 본 회퍼는”우리는 완전히 무종교 시대를 향하고 있다. 그러면 종교없는 기독교는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본 회퍼의 비종교적 기독교 해석을 미국의 상황에서 재창출한 것이 ‘세속도시’라고 콕스 스스로 인정했다.
본 회퍼와 함께 콕스의 세속화 이해에 영향을 준 또 하나의 독일 신학자는 고가르텐이다. 고가르텐은 전후 독일의 신학계에서 세속화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제시했다. 고가르텐에 의하면 성서적신앙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계를 위한 책임을 고취한다. 이 책임은 세계가 신성시되는 것을 막고 피조물에 대한 우상숭배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데 놓여 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피조물에 예속된 노예상태로부터 구출해 하느님의 자녀로 성숙하게 만든다. 기독교 신앙은 이 세계를 우주적 순환의 운명에 맡겨진 자연의 마술동산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인간이 자유를 실현하는 역사의 개방된 지평으로 보게 한다. 세속화란 신성시된 자연과의 원시적 합일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지으신 세계를 자율성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역사로 경험하는 것, 곧 역사화라고 할 수 있다. 고가르텐으로부터 콕스는 서구의 자연과학, 민주주의적 정치제도 및 문화적 다원주의의 발생이 모두 세속화의 원동력인 성서적 신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배웠다. 콕스의 신학사상의 독특성은 세속화를 세속도시의 출현으로본다는 점에 있다. 콕스에게 도시란 여러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적극적인 상징으로 남아있다. 도시화는 세속화가 이뤄지는 정황을 말한다. 도시화는 도시만의 현상이 아니다.
농어촌 마저도 고도의 기동성, 경제적 집중, 그리고 대중매체의 영향과 같은 도시화의 그물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도시화란 인구밀도나 지정학적 상대와 같은 양적인 개념이라기 보다 전통이 붕괴되고 다양성이 지배하는 새로운 삶의 구조 의 출현을뜻한다. 콕스가 세속화를 도시화와 동일시하면서도 경계하는 것은 성서적 신앙의 근거를 상실하고 세속화가 낳은 개방성과 자유를 위협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세속주의 때문이다. 그러나 콕스는 기술지배에 의한 권력의 남용과 性의 상품화와 같은 세속주의 현상때문에 현대 기술도시가 실현하는 세속화의 해방적인 측면을 간과하려는 현대교회와 신학은 마을문화나 부족문화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콕스는 도시 아파트 거주자들은 고독하고 친숙한 인간관계를 원할 것이라 가정하고 도시인 가운데 마을의 친숙성의 회복을 설교하는 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친교 개념과 도시이전의 정신을 혼동한다고 꼬집는다. 익명성이 충분치 못한 마을의 불편함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사람들이 그들의 공간적인 이웃인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과 친근하게 사귀기를 원치않는 것을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할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도시인은 그가 선택한 친구만을 깊이 사귀면서도 이웃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人이 친구도 옆집 사람도 아닌 유대인 곧 원수관계에 있는 대상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세속 도시속의 교회는 종교, 인종, 이념, 계급의 차이와 차별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 하는 친교의 공동체로서 도시 이전의 교회보다 더 잘 기능할 수 있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의 신학자 답게 콕스는 공간적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상과 삶의 가능성에 개방적임을 주장하면서 현대 기술도시의 고도의 기동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특히 그는 도시인의 기동성이 사회변화와 밀접히 연관된 것에 확 인한다. 예를 들어서 북미 흑인 해방운동은 흑인 노동자들이 농업지대인 남부에서 산업중심지로 이동한 것과 흑인 청년들이 군복무를 경험한 것이 결부돼 있다.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이스라엘 예언사상의 정점도 국가가 붕괴되고 민족이 유 배되는 시기에 이뤄졌다. 구약성서의 유대인들이나 신약성서의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유랑하고 집이 없었을 때 그들의 소명을 이루었다는 것은 역사와 시간의 주인이신 성서의 하느님의 기동성과 결부돼있다. 따라서 이동하는 도시인은 이동하지 않는 이들보다 하느님을 우상으로 격하시키는 유혹을 덜 받는다. 왜냐하면 이동하는 사람들은 마을이나 국가를 우상화 하지 않고 기존의 정치적, 경제적 제도와 구조를 변화시키는데 능동적이고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고도의 기동성을 가진 현대도시 속에서 교회는 마을문화에서 비롯된 가족 중심의 교구체제라는 낡은 제도적인 함정에 빠져 있다고 콕스는 비판한다. 교구중심의 교회가 급속히 분화돼 가고 있는산업도시의 경향에 역행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선교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분화돼야 한다. 산업현장, 병원, 학교, 그리고 소외지역에서선교의 공동체가 형성돼야 한다. 그리하여 아직도 도시생활속에 남아 있는 부족적이고 마을문화적인 편견과 억압의 잔재를 말끔히 씻어내는 목회와 선교가 오늘날 문화적인 의미에서 귀신을 추방하는 예언자적인 교회로 거듭나는 지름길이라고 콕스는 역설한다.
콕스의 ‘세속도시’는 기독교의 하느님에 대해 종교적이 아닌 세속적인 형식으로 얘기하려 한다.
*하느님에 대한 얘기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라는 부족이나 마을의 문화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여러 神중의 하나로 경험한다. 종족적인 요소를 지니는 일부 구약성서의 하느님 이해는 진정한 의미의 유일神 이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대체로 구약성서의 하느님인 야웨는 여러 神의 지배자, 곧 만군의 主로 묘사된다. 종교의 형이상학의 마술로부터 해방된 현대 도시인이야말로 부족과 마을 문화속에 살던 사람들과는 달리 종족적으로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하느님을 경험한다. 또한 세속적인 형식으로 하느님을 얘기한다는 것은 현대 도시인이 여전히 종교적인 물음을 자신의 궁극적인 관심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멈추게 한다.
콕스가 보기에 현대인은 종교에 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녀, 직업, 장래 희망으로 부터 사회 정의와 세계 평화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관심한다. 그러므로 콕스는 신학의 기능을 종교나 교회에 국한시키지 않고 오늘의 세계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간해방을 위한 하느님의 혁명에 세속인간이 참여하도록 초청하는데까지 확대한다. _ 朴鍾天 (監神大 교수, 신학)
○ 독자의 평 1
오해도 많고 말도 많았던 책이다. 필자와 같은 전통 보수주의 교단에서는 거부감을 표시한다. 보수교단의 거부감은 책 속에서 저자가 교리에 함몰되어 현실을 외면하는 부적응을 질타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세속도시가 교회의 지향할 바라는 잠재적 의도 자체에 대한 거부이기도 한다. 보수교단에서 ‘세속화’는 저자가 주장하는 보편적 도시의 개념이 아닌 타락과 매치시키는 오해 때문이다.
하비콕스는 세속도시의 형체에서 익명성과 기동성으로 정의 한다. 더 나아가 세속도시의 모습을 실용주의 불경성이란 단어로 풀어낸다. 그동안 도시를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의 개념으로 정의한 반면 콕스는 철학적의미를 부여하여 보편에서 개체로의 변혁으로 이해 한다. 익명성과 기동성, 실용성과 불경성은 성과 속의 이분법적 구분을 거부하고 기술도시로의 변모를 꾀한 결과다.
세속화는 비신화이며, 교리적 교회가 실용적 교회 즉 봉사적 교회로의 탈바꿈을 요구 받는다. 교리적 교회는 정통과 권위에 의해 지배 된다. 세속도시는 기술도시로 권위가 아닌 기술이 지배하고 모든 것이 평등하다. 평등은 기술로 만들어진 고속도로를 통해 이동성이 보장되고, 익명성의 출현으로 계급체계가 무너진다. 콕스는 9장 성과 세속화에서 왕관을 쓴 여성의 이미지 (미인대회)에서 중세의 왕이 쓴 왕관을 채용한다. 심지어 그는 “기독교 이전 시대의 농업여신 제사의 유물’ (225쪽)이라고 까지 말한다. 그녀는 인간의 욕망을 표출하는 상징인 것이다. 보수교단이 세속화를 거부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이기도 하다.
1965년에 출간된 책이다. 벌서 반세기가 지난 구시대적 유물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세속도시 논쟁은 좀처럼 사그러 들지 않았고, 오히려 커지고 있다. 심지어 그토록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던 보수교단에서도 겉으로는 세속화를 부인하면서 교회 안의 프로그램과 신자의 삶에는 보편화 되었다. 기술과 이동성, 익명성과 불경성을 대형교회는 모두 가지고 있다. 교리와 상관 없이 세속화를 이미 침투했으며 거부할 수 없는 삶의 패턴이 되었다. 저자의 관점이 이후 다소 변하기는 했지만 세속도시란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고 논의가 필요한 주제다.
○ 독자의 평 2
본회퍼와 고가르텐의 의견을 수용한 하버드의 종교학자 하비콕스의 ‘세속도시’ 는 현재 우리에게 (특히 기독교인) 매우 충격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그것은 현재의 세속적 도시적 상황은 우리가 터부시 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 성서적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 긍정적으로 것이라는 것이다. 세속화 되면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점들 가령 전통적인 가족 윤리가 무너지고 도시 중심적인 사회가 되고 하는 등의 상황들은 심각하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세속도시’의 저자 하비콕스는 성경과 역사적 배경에서 이것은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뜨거운 감자임에 분명하다. 그가 이러한 그의 의견을 주장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증거가 있고, 무엇보다 내게 감동을 주었던 그의 마음이 있다. 그는 우리가 지금 세속도시화 시대를 살면서도 과거의 부족적, 마을적 관습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판단의 잣대 속에서는 사실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케케묵은 부족, 마을 시대의 율법은 현재에 끼어 맞추기 힘든 퍼즐이니까 말이다. 그가 이러한 설명에서 말하는 것은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을 죄악으로 인한 삶의 포기 상태에서 회복케 하는 것이다. 모두가 율법적 관습에 걸리고 넘어지지만 쉽게 은폐하는 능력이 있는 강자 보다는 약자가 더욱 드러날 것이고 결국 약자들은 그들의 삶에서 더욱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이미 한계 수위를 넘어 버린 세속화에 대한 거부 보다는 본질적으로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해방이다. 세속된 사회에서도 율법의 족쇄 때문에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그러나 하비콕스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그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항상 책임을 전제로 둔다. 우리는 세상의 자유를 누리면서 또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비콕스의 놀라운 통찰력에 먼저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그가 세속화와 도시화를 절대적으로 주장한 것과, 상대적인 개념을 많이 사용한 것 등은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위험하다. 그러나 확대 해석이 결코 아니라면 강조하건대 나는 그의 논지에서 사회적 책임과 의미를 읽었다. 사람들은 정말 모순적이고 자기합리화적인 기질이 강한 것 같다. 그래서 자신 스스로가 충분히 세속적임에도 세속화에 왈가왈부 손가락질을 헤대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세속화의 개념 중에 보다 중한 세속화와 넘겨 봐 줄만한 세속화가 존재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구름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종교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들보는 보지 않고 타인의 눈 속의 티만을 끄집어 내어서 율법으로 단죄한다. 이러한 점을 하비콕스는 날카롭게 바라본 듯 하다. 그러나 아직 하비콕스의 의견은 다양한 많은 해석을 받기에 적당하고 시간을 거치면서 재검토 되어져야 한다. 하비콕스의 앞서가는 지성에 발 느린 우리가 수없이 제동을 걸어 지체함을 낳는다 해도 방법은 없다. 그의 놀라운 통찰력에 감탄을 보내면서도 아직은 유보적인 태도로 좀더 고심하는 자세가 우리에겐 필요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의 의견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은 필요하겠다.
– 인상 깊은 구절
신화와 율법의 속박에서 빠져나와 자유를 누린다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 자기 자신의 책임을 걸머지는 인격자들이다.
○ 독자의 평 3
도시문화의 발생과 전통적 종교의 붕괴는 우리시대의 중요한 두 가지 표지이며 이 두 가지 사건과 밀접히 관련돼 있는데 첫째, 도시화는 사람이 같이 살아가는 일에 변화를 가져오며, 둘째, 현 형태의 도시화는 종교적 세계관의 파멸로부터 솟아나는 과학 및 기술 발전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세속화 역시 도시화와 대등한 획기적인 운동으로서 인간 공동생활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변화가 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이제 인간의 사명과 책임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세계는 인간의 도시가 되고, 인간들의 도시는 전 세계를 포괄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가져온 것의 이름이 곧 세속화이다. 세속화란? 세속 신학자 반 퍼센 (C. A. Van Perasen)은 말하기를, 첫째는 인간의 이성과 언어를 지배해 오던 종교로부터, 둘째는 형이상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속화는 세계에 대한 종교적 또는 유사 종교적 이해로부터 세계를 풀어놓는 것이며, 모든 폐쇄적 세계관을 헤쳐 버림이며, 모든 초자연적 신화와 거룩한 상징들을 깨뜨려 버림이다. 즉 세속화는 인간의 관심을 저 세상으로부터 이때 이 세상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세속사회의 세대는 전혀 종교가 없는 시대이다. 세속화의 정신은 이 땅의 모든 구석구석에 재빨리 퍼져들 어가고 있다. 세속화는 우리에게 항상 부딪쳐 온다. 우리는 세속화를 (세속성을) 사랑하도록 배워야 한다. 만일 우리가 현시대를 이해하고 같이 통한다면…
또한 우리는 본회퍼가 말한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세속적인 형태로 말하고, 성서적 개념을 비종교적으로 해석하도록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교와 형이상학이 세력을 다시 잡을 날이 오겠거니 하는 기대로 기독교의 종교적 형이상적 개정판에 매어 달리는 일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며 종교와 형이상학은 영원히 소멸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 독자의 평 4 : 하비콕스, 『세속도시』 요약
거룩한 ‘신’을 세속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는 없는가? 우리는 흔히 ‘세속’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거의 예외 없이 성속의 구별로서 영원보다 일시적인 곳, 피안적인 차원보다는 현세적 실재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세속’은 허망하고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세속화’된 세계를 ‘종교적’으로 강화함으로서 이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미혹하는 세계관에서 자신을 자체 ‘격리’하기도 하고, 다른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이 그러한 세계관에 물들지 않도록 신앙적 ‘저항’운동을 결속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비콕스는 이런 ‘상식적’ 견해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세속화는 계속 밀어닥친다. 만일 우리가 현시대를 이해하고 또 그것과 의사소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현시대의 끊임없는 ‘세속성’에 대항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우리 시대의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운동들을 ‘종교적’으로 강화함으로서 우리의 종교에 매달리는 것은 결국 지는 싸움이기에 하비콕스는 새로운 전략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신’을 왜 세속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는 없겠는가?” 에 대한 응답, 그가 『세속도시』를 집필한 이유이다.
따라서 세속화를 향한 하비콕스의 시선은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매우 긍정적이며, 더 나아가 세속화의 시선을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시대에 대한 정치적, 신학적 응답으로 매우 적실하다고 역설한다. 미리 앞질러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 ‘세속화’란 종교적, 형이상학적 속박에서 인간이 해방되는 과정이며, 나아가 인간의 관심을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즉 내세에서 현세로 그리고 과거나 미래로부터 시작이 아닌 ‘지금, 여기의 삶의 자리’로 향하도록 만드는 인간의 성숙과정이자, 신의 선물로서 주어진 삶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가 일명 “세속적 기독교” 혹은 “사신신학”의 흐름 속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주장했던 세속화된 응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그가 세속화가 피해야 할 불길한 ‘저주’가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획기적 ‘기회’라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제시한 ‘세속도시의 도래, 즉 우리가 마주하게 된 새로운 형태의 인간 공동체의 도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의미라는 종교를 믿는 세속인
세속 대도시에 사는 세속은 그 나름의 사회적 형태 (shape)와 더불어 존재양식 (style)을 가진다. 사회적 형태를 말하자면,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을 고도로 구별하여 간섭받지 않으려는 ‘익명성 보장’과 어느 한 곳에 고정되거나 정착하지 않는 ‘이동적 방랑’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율성이 극도로 보장된 사회적 형태에서 세속인의 존재양식은 더 이상 ‘신이 있다, 없다’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즉 시대는 이제 ‘신’의 있음과 없음의 여부가 결코 심각한 문제나 주제로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나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찾는 현대인들에게는 ‘의미라는 신’은 있을지언정, ‘기독교의 신’을 위치지우는 것은 그닥 큰 의미가 없는 일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하비콕스가 제시하는 세속인의 존재양식은 그것이 성취하는 결과에 따라 판단하는 ‘실용주의’와 초현실적인 실재의 소멸을 뜻하는 ‘불경성’이란 양식 (style)이다. 실용주의는 간단하다. 과거에 달리 세속화된 도시인은 더 이상 신비한 것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정력과 지능의 적용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별로 관심을 않는다. 그에게 있어 세계는 신화적이지도 않고, 더 나아가 하나의 통합된 형이상학적 체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입맛따라 일련의 문제에 적실할 ‘계획’이 제시되면 그만인 세계이다. 불경성 또한 실용주의에 연장 이외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세속인을 불경하다고 부르는 것은 그가 신성모독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지극히 ‘비종교적’ 성격을 띄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세상을 어떤 다른 세계의 눈 (신화적 세계관, 형이상학적 세계관)으로 보지 않고 그냥 그 자체의 눈으로 본다. 즉 세속인은 그가 찾는 어떤 의미도 이 세상 자체 안에서 발견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낀다. 불경스러운 인간이 만약 종교를 믿는다면, 그저 ‘의미라는 종교’를 믿을 뿐이지, 다른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2. 세속화 : 인간화 작업을 위한 신의 역사적 개입
그렇다면 새로운 형태의 세속인에게 필요한 신학적 응답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양식을 제거하고, 세속도시 시대에 적절한 언어를 회복하는 것이다. 세속도시는 더 이상 초현실적인 신화적 언어도, 체계적 정합성을 지닌 형이상학 언어세계를 요구하지 않는다. 때문에 밀려오는 세속화란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방법은 그 파도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를 타는 법은 배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세속화’를 ‘세속주의’와 구별하며 세속화의 본의를 성서적 근거를 통해 논증한다. 세속주의를 극복하되 세속화는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간략히 구별해보자면 세속화의 근본 구성요소가 새로운 세계를 향한 ‘해방’이라면, 세속주의는 폐쇄된 세계를 유지하려는 ‘고착’된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발전하는 역사화 과정 속에서 폐쇄되고, 고착된 이데올리기를 넘어 생생하게 살아있는 세속화된 현실을 살아내야 한다. 저자는 이를 성서적 근거를 통해 논증하며 훌륭하게 보충한다. 즉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래는 언제나 세속화의 차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드러내며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라는 성숙함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는 것이고 그 근거를 다음 서술에 나타나듯, 성서의 세계관에 결코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번째 예로,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구체적 현실의 이야기속에서 드러난 것이다. 바빌로니아인들이 태양과 달, 별들이 반신적인 존재들이며 신들이 지닌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히브리인들은 그것들의 종교적 지위를 완전히 거부한다. 즉 성숙한 세속인들은 자연을 숭배하지도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돌보고 이용하도록 했다 (자연의 탈주술화). 둘째로, 출애굽의 이야기는 정치의 비신성화의 역할로서 종교적으로 합법화된 독재군주로부터 벗어나 성숙한 세속인들로 하여금 역사와 사회변화의 실천자가 되도록 했다 (정치의 비신성화). 마지막 셋째로, 시내산의 언약에 나타난 우상숭배 금지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든 숭배해서 안된다는 것을 가리켰다 (가치의 속화-상대화). 이는 세속인들로 하여금 시대의 민족적, 인종적, 문화적 우상숭배라는 행위에 빠지지 않도록 해줬다. 즉 그것은 허무주의에 깊은 바다에 빠지지 않고서, 모든 문화 산물과 온갖 가치체계의 덧없음과 상대성을 알아차리게 해준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은 이질적인 정치와 문화가 공존하는 세속화된 세상에서 그들이 성숙함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책임감 있는 청지기로서 그 자격을 갖추도록 요구한다. 바로 이것이 세속도시에서 신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이다. 신없는 시대에, 신과 함께 하는 방식은 이제 세속화된 세계 한복판에서 숨어계신 하나님의 요청, 즉 새로운 역사의 현실을 일궈내길 요구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식으로 제자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세속-도시는 ‘성숙’과 ‘책임’을 예시한다. 세속화란 한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어린아이 같은 의존을 제거함을 뜻하고, 도시화란 인간의 상호성이라는 패턴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적실한 상징을 회복해야함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행위에 뒤따른 인간의 응답이 세속도시를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정당한 행위인 것이다.
3. 교회 : 성숙한 인간도시 건설, 변화의 선봉으로서 교회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와 신학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하시는 일에 발 맞추어 그와 함께 세속적인 방식으로 하나님나라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뛰어들고, 행동하는 사고여야 한다. 콕스는 이를 전통적인 선교의 3대 기능 (케리그마-선포, 디아코니아-봉사, 코이노니아-교제)를 사회-정치적인 범주로 재해석하면서, 성서근거에 이어 또 한번 전통의 근거로서 훌륭하게 재구성해낸다. 즉 세속도시에서 교회는 세속 세계를 재건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권세자들도 인간을 지배할 힘과 책임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선포’ (케리그마)하고, 도시의 완전함과 건강함을 위해 도시의 균열을 치료하는데 ‘봉사’ (디아코니아)하며, 상호작용하며 (코이노니아) 눈에 보이는 성숙한 인간의 도시를 만들어 나가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극히 공공신학적 담론과 같이 보이는 이러한 주장은 다양한 반대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계율과 전통보다 현실인식이 선행하는 저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전통이 아니라 철저히 ‘사회변화’를 통해서 도래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도시 세속인에게 필요한 것은 저자가 보기에 과거로부터 회귀가 아니라 다가오는 시대에 대한 적실하고, 실용적인 응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삼키고 있는 새로 출현한 기술적 현실에 어떻게 정치적으로 타협할 것인가에 대한 합당하고 적실한 지혜가 필요하지, 결코 사변적인 형이상학 신학논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세속도시 시대에는 ‘정치’가 형이상학을 대신해 신학의 언어가 된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세속적인 말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명확하며, 능동적이거나 생산적이여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그런 의미에서 신자와 비신자를 떠나 인간의 생활과 사고에 통일성과 의미를 가져다 주는 유일한 공공장소이다. 오늘날의 교회 선교는 정치적으로 재구성된다. 바로 여기, 다양한 세속도시의 문제를 단순히 개교회적인 방식이 아닌 학문적, 과학적 방식등 그 외 전문분야들을 특정한 인간 문제에 집중시킴으로서 통합하는 것이다. 이는 바꿔말하자면, 기존의 교회와 신학이 했던 모든 방식을 비종교화 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즉 우리의 교회와 신학의 언어가 했던 모든 종교적 색채를 편견없는 중립적 의미의 세속적 삶의 모습으로 성육화하는 것이다. 세속화의 해방은 추상적인 ‘종교언어’에 물든 어떤 미성숙한 맹목성과 편견을 버리게 하고, 오히려 구체적 인간의 정의와 문화의 성숙한 실현을 위한 책임 앞에 우리를 마주세운다. 그것은 비록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진 않지만, 언제나 우리가 마주하는 세속 도시, 이웃에게 신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통해 신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즉, 신을 말하는 것이 평범한 것이 되어버린 사회를 우회하면서, 신의 이름을 통상적으로 읖조리는 판에 박힌 역할을 오히려 버림으로서 ‘신 이야기’를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닌 가까이 있는 신으로 역설하는 전략을 택한다.
결론. 숨어계신 신과 세속적 인간
신이 없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숨어계신 하나님을 말할 수 있을까. 하비콕스는 말한다. 세속도시에 사는 인간을 신의 동반자, 즉 인간의 역사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임무를 지닌 협력자로 인정할 때 비로소 세속적인 방식으로 우리는 신에 대해 말하게 될 것이라고. 그렇다. 신은 세속적인 사건들 안에서, 그 자신을 우리에게 점차적으로 드러내신다. 의미라는 종교를 믿는 시대에 더 이상 ‘신’이라는 낡은 명칭들이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표류하고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하비콕스의 주장에 따라 낡은 명칭들에게 어설프게 완고한 집착하거나 아니면 불안스레 새로운 명칭들을 만들어 종합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밀려오는 미래의 사건들에 두팔을 벌려 응답하는 세속적 충실함으로 신의 새로운 이름이 회복되길 고대하는 편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길을 잃은 현대사회에 신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이 책, 세속도시는 그런 점에서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의미를 지니며 여전히 읽혀지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