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시대의 불침번 : 정경모 자서전
정경모 / 한겨레출판사 / 2010.10.11
– 나는 한 번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소이다
40여 년간 일본에서 망명객으로서 문필 활동을 통한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지원해온 정경모의 『시대의 불침번』.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역사적 평양 방문을 결행하여 6ㆍ15남북공동성명의 초석이 된 4ㆍ2공동성명의 바탕을 다진 저자의 자서전이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에 맞서다가 1970년 일본으로 망명한 이후, 40여 년간 망명객으로 살아온 저자가 2년간에 걸쳐 온힘을 바쳐 직접 원고지 2,000여 매에 눌러쓴 것이다. 오직 붓 한 자루에 의지하여 시대에 맞섰던 고독한 삶의 응어리까지 풀어놓고 있다. 살아 있는 한국 현대사를 만나게 된다.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새로운 장면을 밝히는 1인 사관의 특별한 증언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한국 현대사를 전방위적으로 살펴본다.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한 역사적 방북에서의 김일성과의 만남 등에 얽힌 뒷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소이다.”, “~이외다.”, 그리고 “~소이까?’ 등으로 문장이 끝나는 특이한 구어체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옛이야기를 듣는 듯 감칠맛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시대의 불침번’은 저자의 오랜 동지인 황석영이 그에게 붙여준 별칭이다. 저자가 살아온 삶을 반영하고 있다.

○ 목차
추천글
우리 현대사가 잊을 수 없는 이름 _ 임재경
정경모 선생과 나 _ 황석영
머리글
1부 나는 조꼬만 봉사씨외다
2부 해방군이 몰고 온 전쟁
3부 서울의 이방인
4부 망명시대
5부 씨알의 힘으로
6부 미국과 일본의 본질을 묻다
7부 모든 통일은 선이다
8부 껍데기는 가라
9부 나는 원래 민족주의자 아니오이까
10부 아무 유한도 없소이다

○ 저자소개 : 정경모
저자 정경모 (鄭敬謨)는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 대학교 의학부, 서울대학교 의대에 다니다가 미국 에모리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미국 유학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주미대사 장면의 요청으로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 (GHQ)에 소환되어 문익환, 박형규 등과 함께 근무했다.
휴전회담 당시 통역업무를 맡는 등 한국에서 지내다 1970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40년간 망명객의 신분으로 문필활동을 통한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지원했다.
일본에서 1981년 한국문제 전문지 <씨알의 힘>을 발행했고, 1991년에는 일본의 평화와 조선의 통일을 생각하는 ‘씨알의 힘’ 모임을 발족하여 기관지 <씨알>을 펴내왔다.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역사적인 평양 방문을 결행하여, 6·15남북공동성명의 초석이 된 4·2공동성명의 계기를 마련했다.
요코하마에서 5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한 아내와 살아오다 2020년 가족들의 노력으로 한국 귀국이 거의 성사단계에 갔으나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로 무산되고 2021년 2월 16일 게이오대 유학 당시 하숙하던 요코하마시 히요시의 그 하숙집에서 부인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폐렴 합병증으로 영면에 든다.

○ 책 속으로
내가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을 맞이한 것은 미국 유학생으로 에모리 대학 대학원에서 연구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소이다. 식민지 시대에 경기중학을 나오고 일본으로 가서 게이오 대학 의학부에 있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잠시 서울대 의학부에 적을 두고 있었으나 1947년 8월 미국 유학길로 떠난 것인데, 에모리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화학 공부에 열중하고 있던 바로 그때 6·25전쟁이 터진 것이지요. 당시 주미대사가 4·19학생혁명 뒤 제2공화국 국무총리가 되는 장면 박사인데, 그분으로부터 워싱턴에서 긴급 전화가 걸려왔어요. “지금 우리 신생 대한민국이 공산군의 침략으로 존망지추 (存亡之秋)에 있는데 그렇게 한가하게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내서야 되겠는가. 이것은 프란체스카 부인의 특명이니만치 가타부타 잔소리 말고 곧 도쿄로 떠나 맥아더 사령부로 들어가라!”
그때 유학생으로 미국에 건너간 이후 학비로 곤란을 겪을 때 참으로 기적적인 연유로 이승만 대통령의 알선을 통해 미국의 육영자금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프란체스카 부인과는 대사관 행낭 (파우치)을 통해 수시로 서신을 교환하고 있던 처지였어요. …
문 목사 얘기를 해놓고 새삼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 것은 맥아더 사령부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훗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게 되는 사람이 셋이었는데, 바로 문익환, 박형규, 그리고 나 정경모였고 셋이 모두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에요. 두 분은 목사님이시니까 물을 필요도 없으나, 나 자신도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한때 목사가 될 생각도 있었으니 지금은 비록 주일날이라고 해서 성경·찬송 옆에 끼고 예배당에 가는 식의 기독교인은 아니나마 정서의 바탕은 지금도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30~33쪽
그런데 이상스러워요. 팔십 평생을 살아온 지금 일생을 되돌아보면 열아홉 살 나이에 하숙집을 찾느라고 히요시 마을, 그 집 현관문을 연 그 순간, 내 인생역정의 전부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오이다. 예정론 그대로예요. 다음 날 또 갔어요. 아주머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딸하고 의논하니 괜찮다고 하니까 어느 날이고 이사를 오라 그러시더군요.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내일 이삿짐을 가지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집을 나왔소이다. 그 집 따님을 만나볼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외다. 그때 얼굴도 안 보고 문밖으로 나온 그 집 따님 지요코 (千代子)가 오늘까지 백년해로로 인생길을 같이 걸어온 현재의 아내이며, 나를 극진히 귀여워해주시던 아주머님이 장모님이셨던 것이외다.
그때 지요코가 살며시 내 어깨에다 머리를 얹더니 잠시 후부터 훌쩍거리기 시작합디다.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쓰라린 마음을 위로해줄 수가 있었겠소이까. 처음으로 지요코를 가슴에 안고 귀에다 대고 약속을 했소이다. 꼭 다시 돌아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요.
다음 날 집을 나서는데 도쿄 역까지 배웅하러 나가겠다던 지요코는 눈이 퉁퉁 부어 도저히 외출할 형편이 아니었소이다. 대문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도쿄 역으로 향한 것인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죠. 정말로 그날부터 5년 4개월 만인 1950년 11월 초 약속한 대로 돌아서 돌아서 태평양을 건너 히요시의 옛날 그 집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이오이다. 기적이란 이런 일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니겠소이까. – 81~85쪽
약속한 날 아사히신문사 식당에서 그분을 만났는데 투고란은 원래 정년이 가까운 노련한 기자가 담당하는 것이 상례이듯, 당시 40대이던 나보다 훨씬 연배가 위이고 퍽 세련된 용모의 인물이었소이다.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미 6년 전인 한일협정 당시 한국 학생들의 반대운동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또 협정 이후 일본으로부터 흘러 들어가는 정치자금이 한국 권력층에 어떠한 형태의 부패를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신문기자인 그분에게조차 놀라운 뉴스였던 것이외다. 비단 그분만이 아니라 일본 언론 전반에서 한국 문제는 흥밋거리가 아닌 시대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노릇이었지만 말이외다.
얘기 끝에 그분이 묻습디다. 투고문 이외에 써둔 원고는 없는가, 있으면 보여달라고 말이외다. 그래서 며칠 후 400자 원고지 100장가량의 원고를 가지고 다시 만났는데, 도노 씨가 원고를 훑어보고 그 자리에서 말을 건네주더이다. “이거면 됐다. 계속 써달라”고 말이외다.
이렇게 해서 내 책 『어느 한국인의 감회』(ある韓?人のこころ, 朝日新聞社, 1972)가 세상에 나오게 되는 것인데, 그때가 바로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직후인 1972년 9월이었소이다.- 187~188쪽
‘케넌 설계도’는 다음과 같은 것인데, 간단히 말해서 조선반도에서 만주에 이르는 일본의 구식민지는 다시 한 번 일본에게 통치를 맡기는 편이 미국에는 이득이라는 것이 그 내용으로 되어 있소이다.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생각한다면 일본의 영향력과 제반 활동이 조선에서 만주에 이르는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에 대해 미국이 반대할 이유가 없게 될 날은 반드시 올 것인데, 그날은 우리 예상보다 더 빠를 수도 있다. 이 지역에 대한 소련의 압력을 완화하고 저지하기 위해서는 이것만이 현실적인 유일한 방도인 까닭이다. 힘의 균형을 이용한다는 구상은 미국의 외교정책상 새로운 것은 아니며, 현재의 국제 정세에 비추어 이와 같은 정책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다시 한 번 이러한 정책을 채용하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바람직하다는 것이 우리 (국무부 정책기획본부)의 일치된 견해이다.”
케넌이 작성한 이 ‘설계도’는 그가 본부장으로 있던 국무부 정책기획본부 제13호 파일 상자에서 내가 늘 말하는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처음 찾아낸 것으로, 발견하자마자 즉시 내게로 보내 온 것이 1985년 가을이었소이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의 재판인 이 문서를 읽고 내가 얼마나 놀라고 또 분개했겠는지 짐작이 갈 것이나, 더 부아가 터지는 것은 그 후 근 20년 동안이나 글로 또는 말로 소리 높여 떠들어대며 이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려고 안간힘을 다 했소이다만―내 역부족 탓이겠으나―여기에 관심을 품어주는 사람을 발견할 수가 없었소이다. 내가 아는 한 일본인 학자들이 서술한 조선 문제에 관한 책 중에서 ‘케넌 설계도’를 언급한 것은 하나도 없었소이다. – 329~330쪽

문익환 목사 일행이 평양을 떠난 것이 1989년 4월 2일 오후였는데, 그날 아침 문 목사가 기자단 앞에서 낭독하신 선언문이 오늘 우리가 ‘4·2남북공동성명’이라고 부르는 것이오이다. 이 성명문은 27일서부터 30일까지 나흘 동안에 걸친 김 주석과 문 목사 사이의 회담을 담은 것이었고 9개 항목에 걸친 상당히 장문의 것이지만, 알맹이만을 뽑아서 요약한다면 다음 세 가지의 항목이 아닐까 하오이다.
①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니만치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일체이다.
②통일에 관한 남북 간 대화의 창구는 널리 개방되어야 하며, 당국자들 사이의 독점에 맡기지 않는다.
③통일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질진대 연방제는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경로인데 이의 실시는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
이 문서를 작성하느라고 나와 안병수 (훗날 안경호로 확인) 동지는 31일 밤을 꼬박 새웠지요. 통일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가 누구에게 먹히우지 않는 공존의 원칙에서” 이룩되어야 한다는 표현은 아마 김 주석의 말투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겠으므로 나는 약간 미소를 머금으면서 안병수 동지의 원안을 수락한 표현이었고 (제4항), “남북 쌍방은 문화적 정신적인 공통성과 민족으로서의 동질성을 재확인한다”는 부분 (전문)은 내 제안을 안병수 동지가 받아들여 삽입된 표현이었소이다.
아무튼 4·2공동성명은 그로부터 11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날의 동지 문익환 목사의 발자취를 따라 평양을 방문하고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후 발표된 6·15공동성명으로 직결되고, 또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 때의 10·4공동성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통일을 지향하는 남북공동성명의 시발점은 문 목사의 평양 방문이었음이 자명한 사실이라 하겠지요. – 397~399쪽
그러니까 그게 아마 참여정부가 들어선 2003년쯤의 일이었겠는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계시던 박형규 목사께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오셨소이다. 박 목사는 나보다 한 살이 위이시고 말하자면 형님뻘 되시는 분인데, 사는 곳 영사관으로 출두하면 아무 소리 안 하고 여권을 발급해줄 터이니 한번 고국 여행을 하라는 말씀이셨소이다. 그래서 국적이 한국인 아내와 같이 요코하마 영사관으로 여권을 받으러 출두하지 않았겠소이까.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다음 날 다시 한 번 오라고 취조관이 그럽디다. 하라는 대로 또 한 번 출두했소이다. 그랬더니 자기들이 미리 작성해두었던 서류를 내밀면서 서명을 하라고 그럽디다. 서명하면 여권을 내주겠다는 것이지요. 그 서류는 ‘자수서’라고 되어 있고, 평양에 간 것은 실정법을 어긴 범죄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러저러하게 행동할 것을 서약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소이다.
‘자수서’라는 것은 간첩에게 쓰는 말일 터이고 내가 스스로 간첩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인데, 이건 보통 ‘준법서약서’보다도 더 고약한 내용이 아니오이까. 여기에다가 서명을 한다면 스스로 자기 존재를 짓밟는 것이며, 또 문 목사가 취한 행동을 범죄행위였다고 인정하는 것이 되지 않겠소이까. 아무리 초야에 묻혀 사는 이름 없는 필부라 할망정 삼군 (三軍)의 힘으로서도 빼앗을 수 없는 뜻[志]이 있다는 말이 있소이다.(『논어』) 나는 그것을 취조관에게 돌려주고 밖으로 나왔는데 무슨 영문인지 영사가 손수 운전하는 자기 차에다 나를 태워 역까지 바래다주었으며, 영사관 직원들이 모두 나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배웅해주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소이다.
이듬해 꽃철이 되어 나는 아내와 더불어 근처 다마가와 강변 큰 둑으로 벚꽃 구경을 갔소이다. 둑에는 2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꽉 메우도록 벚나무가 서 있어 철마다 화려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꽃구경으로는 맞춤한 곳이오이다. 화창한 봄날이었고, 둑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마가와의 맑은 물이 흐르고 있으며, 또 상류 쪽으로 멀리 단자와 산맥의 수려한 산봉우리들이 서 있는 풍경이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다가오더이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한강의 푸른 물결과 어릴 적 뛰놀던 양말산의 아지랑이 낀 넓은 벌판이 머리에 떠오릅디다. 그 순간 나는 나란히 서서 다마가와의 풍경을 보고 있던 지요코에게 말했소이다.
“여보 여보, 난 한국에는 안 가. 여기서 죽어 당신하고 같이 일본 땅 흙이 되는 거야.” – 520~522쪽

○ 출판사 서평
우리 현대사가 잊을 수 없는 이름, 정경모 …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새로운 국면을 밝히는 1인 사관의 특별한 기록!
– 『찢겨진 산하』의 저자, 마지막 재일 망명객 정경모의 자서전
“유한은 없소이다.”
지난 1970년 일본 망명 이후 40년 동안 한국땅을 밟지 못하고 있는 여든일곱의 노 망명객 정경모 선생이 2년에 걸쳐 직접 원고지 2000매에 꼭꼭 눌러쓴 자서전 『시대의 불침번』의 마지막 문장이다.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과 미국 유학, 맥아더 사령부 (GHQ) 직원으로서 판문점 휴전 회담 참여, 일본 망명, 문필 활동을 통한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 지원, 1989년 역사적인 문익환 목사와의 방북 등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현장에 직접 ‘서 있었고’, 민주화 이후 ‘자수서’ 작성 거부로 한국 방문이 무산되어 일본 땅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겠다고 결심한 ‘살아 있는 한국 현대사, 정경모 선생’의 삶이 자서전 『시대의 불침번』을 통해 세상에 선보인다.
애초 자서전 집필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는 선생은, 2년 동안 온힘을 다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정리하면서,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못다한 이야기, 잊고 있던 삶의 연결고리, 그리고 어떠한 배경도 없이 붓 하나에 의지해 시대에 맞섰던 고독했던 삶의 응어리까지, 자신의 인생 전모를 이 책을 통해 털어놓는다.
– 의학도에서 붓 하나로 세상과 맞서는 문필가가 되다
선생은 본래 의학 (게이오 의대, 서울대 의대)과 화학 (에모리 대학)을 공부하던 자연과학도였다. 하지만 20세기 한국사가 지나온 격변의 시대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미국 유학 중 발발한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당시 유엔대사였던 장면 박사의 긴급호출이 그를 역사의 현장에 끌어들여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 (GHQ)의 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판문점 휴전 회담에 통역관으로 참여하기도 하지만, 전쟁 후 미 사령부에 의해 ‘기피 인물’로 낙인찍히고, 이승만·박정희 독재 정권을 거부하며 일본으로의 망명을 선택한다.
어떠한 조직이나 배경도 없고, 일본 사회에 비판적이며 남과 북,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아웃사이더 재일 망명객이었던 그가 일본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신문사 독자 투고로 시작한 문필 활동 때문이었다. <아사히신문> 출판부에서 출간된 『어느 한국인의 감회』를 계기로 그는 일본의 대표적 진보 잡지〈세까이世界>의 필자로 활동하게 되었고, 김대중 납치 사건을 통해 급격히 관심이 커진 한국 정치 관련 전문가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뒤 나중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빌미가 된 단체 ‘한민통’의 기관지 <민족시보>의 주필로 열성적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조직 내 갈등으로 탈퇴하고, 1979년 비로소 선생의 문필 활동의 본거지가 될 사숙 ‘씨알의 힘’을 열어 잡지 <씨알의 힘>과 기관지 <씨알>을 펴내며 한국 민주화 운동을 외곽에서 지원한다.
정경모 선생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책 『찢겨진 산하』(1986) 역시 1983년 <씨알의 힘> 6월호에 발표했던 원고를 번역한 것이었다. 여운형과 김구, 장준하 등 한국 현대사의 주역이었던 세 인물이 저승의 구름 위에서 만나 정담을 나누는 독특한 형식을 취한 이 책은, 남북 분단의 과정을 강대국 간의 이데올로기 다툼이 아니라 친일 행위와 농지 소유관계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세력과 그것을 지키려는 세력 간의 현실적 갈등에 주목함으로써 해방 공간 역사에 대한 시각을 전면적으로 바꾸어 놓은 문제작이었다.
– 어떠한 역사책도 알려준 바 없는, 우리 현대사에 대한 생생한 증언
이 책 『시대의 불침번』은 단순한 자서전이라 하기엔, 정경모 선생이 겪은 삶이 너무나 비범하고, 그가 체험한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의 밀도가 높다. 책 제목으로 쓰인 ‘시대의 불침번’은 그의 오랜 동지이자 막역지우인 소설가 황석영이 그에게 붙여준 별칭인데, 그가 살아온 삶을 되짚어보자니, 그 의미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소이다” “~이외다” “~소이까?” 등의 종결어미로 끝나는 특이한 구어체로 서술되어, 마치 옛이야기를 듣는 듯 감칠맛 나는 가락 속에 담겨 있는 선생의 삶과 오직 그만이 알고 있는 우리 현대사의 장면들은 드라마틱하다. 1945년 9월 초 ‘해방군’ 미군을 맞으러 영등포 네거리로 플래카드를 써서 마중나간 이야기며, 미국 유학 중 이승만·프란체스카 여사와의 직접 서신 왕래를 통해 학비를 도움 받은 일, 훗날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던 문익환·박형규 목사와의 맥아더 사령부에서의 교유, 판문점 휴전 회담의 생생한 풍경, 4·19를 촉발한 3·15 부정 선거의 주동자 최인규 내무장관과의 인연, 울산석유화학단지 건설에 고문으로 참여했던 이야기,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대중과의 만남, 그리고 무엇보다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한 역사적인 방북·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에 얽힌 뒷이야기 등은 놀랍도록 생생하다.
– 한반도 현대사에 대한 전방위적 시선
이러한 기록들이 한 개인이 겪은 특별한 체험담으로 끝나는 않는 것은, 선생의 개인사가 오랜 세월 다듬어온 역사적 안목과 관점 아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일본 유학과 미국 유학을 통해 언어만을 익힌 것이 아니라, 시대를 움직이는 거대한 흐름, 즉 국제정치의 역학 관계에 대해 일찍이 눈을 떠왔다. 게다가 오랜 문필 활동을 통한 자료 수집, 『한국전쟁의 기원』(선생이 이 책의 일본어판 역자이다)의 저자 브루스 커밍스, 동아시아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개번 맥코맥 호주국립대 명예 교수, 와다 하루끼, 전 이와나미서점의 야스에 료스케 사장 등과의 오랜 교류를 통해 ‘한반도의 근현대사에 대한 다자적 시점’을 가질 수 있었다.
선생은 미국과 일본의 패권 세력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국익’이 무엇인지 간파하고 있었고, 그 역사적 뿌리가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상호 승인한 1905년의 ‘태프트-가쓰라 밀약’에 있으며, 불행하게도 ‘미국과 일본의 거대한 커넥션’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오직 지성과 양심에 기대어, 스스로 선택한 야간부의 삶”
책 속에 소개되어 있지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관해 도쿄에서 열린 한 심포지움 (2006)에서 백낙청 교수는 정경모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가 있다.
“그는 평생을 한국의 민주화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헌신해오셨다. 그러고도 남한의 상당수 민주화 운동가들이 영달의 길에 오르고, 해외 통일운동가들 대다수 남북을 드나들며 예우를 즐기게 된 오늘까지 여전히 일본 땅에서 외롭게 당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고 계신다. 나는 이런 상황이 되도록 빨리 바뀌기를 충심으로 기원하지만 그의 완강한 고독이 불의와 굴종으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의 불명예를 씻어내는 데 크게 일조했다고 믿는다.”(523~524쪽)
마음만 달리 먹었다면 대한민국 땅에서 누구보다도 더 영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던 정경모 선생은 오직 “자신의 지성과 양심”에 따라 역사의 뒤안길을 걷는 ‘야간부’의 삶을 선택했다. 그 대신 역사의 뒤안길에 서서 ‘은폐된 역사’를 밝혀내고,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를 사람들을 향해 외치는 특별한 1인 사관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의 회유에 타협하지 않고 ‘완강한 고독’을 견뎌냄으로써, ‘우리 현대사가 잊을 수 없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 추천사
독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자란 명민한 자연과학도 정경모는 십대에서 삼십대 초반에 이르는 20년 동안 일본 유학 중 해방을 맞고, 미국 유학 중에는 6.25전쟁이 일어나 맥아더 사령부 (GHQ)의 직원으로서 판문점 휴전 회담에 참가하는 등 우리 현대사의 중요 현장들을 목격했다. 또한 1989년 국내 재야의 문익환 목사를 도와 평양 방문에 동반한 정경모의 행동은 남북 분단으로부터 평화 통일에 이르는 지평 위에서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역사 불침번의 금자탑이다. – 임재경 (언론인)
정경모 선생은 운명적으로 독립적이고 소수적인 국외자의 삶을 살아왔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농담으로 그를 ‘야간’이라고 부른다. 주간부가 주류의 넓은 길을 걷는 삶이라면 야간부는 역행하면서 뒤안길을 걸어야 하는 삶을 의미한다. 선생은 웃으면서 나의 농담을 받아들였다. 선생은 약삭빠르게 선택하고 처신했다면 얼마든지 순조롭게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선택의 순간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지성과 양심에 기대어 스스로 야간부의 삶을 뚜벅뚜벅 걸어왔다. – 황석영 (소설가)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