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열정
산도르 마라이 저 / 솔 / 2016.5.27
헝가리 대문호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로 어린 시절부터 24년 동안 언제나 형제처럼 붙어 지냈던 두 친구가 헤어진 지 사십일년 만에 만나 하룻밤 동안에 나누는 대화를 시적인 문장으로 쓰고 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문장 속에 숨은 문제들 속으로 빠져들게 하며 저자는 사랑의 파괴적인 힘을 가차없이 묘사하고 있다.

○ 저자 소개 : 산도르 마라이
산도르 마라이는 1900년 독일과 헝가리 문화의 접합지이며, 1차 세계대전 후 체코에 귀속된 캇사에서 태어났다. 마라이의 아버지 집안은 작센에서 이주한 독일 계통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헝가리어와 더불어 독일어를 말하고 배웠다. 그리고 슬로바키아어도 약간 말할 수 있었으며, 당시 중부와 동부 유럽의 시민 계층에서 대부분 그랬듯이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가 대학 생활을 시작한 부다페스트는 당시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급진적인 변화의 징조가 뚜렷했다. 군주제에서 좌익공화국으로, 그리고 다시 우익 호르티 정부로의 변화. 마라이는 눈앞에서 “모든 것이 붕괴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헝가리를 떠나 라이프치히의 신문학 연구소에서 강좌를 수강한 다음,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으로 옮겨 『프랑크푸르트 신문』에 독일어로 기고하기 시작했다. 귀족의 작위를 받은 작센-메렌-헝가리 시민 가문에서 출생한 마라이는 독일과 헝가리 양국의 언어에 능통했다.
1923년 잠시 베를린에 체류한 후, 그는 같은 고향 출신의 젊은 부인과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크푸르트 신문』에 계속 기사를 쓰는 한편, 유랑민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당대의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을 읽는다. 그 가운데 그는 카프카·트라클·벤 등의 작품을 헝가리어로 번역한다. 카프카에 대한 헝가리 최초의 비평 역시 그의 손을 거쳐 1922년 『카샤우 신문』에 실린다. 1927년 그는 중동 여행기 『신들의 흔적을 좇아-여행 소설』을 출간한다.
그 후 그는 영영 잃어버린 조국애를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헝가리 말로 쓰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간다. 거기서 그의 왕성한 작가 활동이 시작된다. 서정시·산문·희곡 그리고 마라이의 장기라 할 수 있는 수상록 『가난한 이들의 학교』(1933), 『나라, 나라』(1945~1947) 등에서 그는 중부유럽의 상황을 선명한 필치로 절조 있게 논평하고, 타국에서뿐 아니라 헝가리에서도 드러나는 자신의 이중적인 이질감을 설명한다. 그리고 마라이는 『어느 시민의 고백』(1934)으로 성공을 거두어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당대의 저명한 한 비평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 고독한 작가의 커져가는 인기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글 밑바탕에 웅크린 존재론적인 문제들 때문이 아닐까!”
마라이는 당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영향을 미친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러한 성공을 뒤로하고 1948년, 고개를 쳐든 독재에 혐오를 느껴 헝가리를 떠난다. 게오르그 루카치가 그를 골수 보수주의자로 공격하면서 그는 숨막히는 질식감을 느낀 것이다. 처음에 그는 나폴리에 정착하지만, 1952년 뉴욕으로 이주한다. 그는 뉴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흥미 있는 도시,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아 애석하기 그지없다.” 마라이는 당시 미국 시민권이 있었지만 1968년에 이탈리아의 사례르노로 건너가 10년 이상 머무른다. 그러다가 다시 1979년 미합중국의 샌디에이고로 돌아간다.
이 무렵 역사·신화·성경에 관련된 주제를 비유적이고 함축적으로 다룬 소설들을 헝가리어로 집필한다. 마라이는 망명지에서뿐 아니라 헝가리에서도 전과 다름없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헝가리의 독재 정권은 그의 책들을 금지했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동시에 1943년에 시작한 일지를 1983년까지 계속 쓰는 한편(일지는 방대한 분량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31년에서 1947년 사이에 집필한 대하소설 『가렌의 업적』의 내용과 문체를 수정한다.
그의 망명 생활은 고독과 쓸쓸함의 연속이었다. 스위스에서 1년, 이탈리아에서 2년, 그가 증오한 뉴욕에서 15년, 다시 이탈리아, 그리고 결코 안식처가 될 수 없었던 마지막 거주지 캘리포니아 해안의 샌디에이고. 그는 그곳에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낯설기만 한 타향에서의 고독이 때때로 유럽을 생각나게 하는 뉴욕에서의 상실감보다 견디기 쉬었다. 게다가 샌디에이고에서는 적은 수입으로 어떻게든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마라이는 헝가리 망명 인사들의 모임에도 전혀 참여하지 않고, 헝가리 문인협회가 정치적인 화해의 표시로 발송한 초대장도 거절한다. 그리고 헝가리에서 자신의 희곡이 상연되는 것과 작품이 출판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의 고독을 대변해주듯 수상록 『하늘과 땅』(1942)에는 이러한 문구가 있다. “파스칼·횔덜린·니체를 파괴했듯이, 고독은 사람을 파괴할 수 있다. 그러나 유혹한 다음 무덤 속에 내팽개치는 세상에 아첨하는 것보다는 이러한 실패, 붕괴가 사색하는 인간에게 더 어울린다. … 혼자 남아 대답하는 것…”
60년 이상 생을 함께한 부인이 죽었을 때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녀와 완전히 하나다. …그녀는 마치 독립된 개체가 아닌 것 같다. … 그녀는 아름답다. 사멸의 아름다움은 청춘의 도도한 아름다움이나 완벽한 여성미보다 때때로 더 설득력이 있다.”
이렇듯 자신과 완벽하게 합일한 인간의 사멸에 대한 관찰은 동시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신중한 준비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부인에 이어 의붓아들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완전히 혼자 남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상황을 반어적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나는 지루하지 않다.” 그러고 나서 그는 권총을 산 다음 경찰 강좌에서 무기 다루는 법을 배운다.
그의 고향은 그때까지 그를 계급의 적, 배반자로 칭했으며, 거의 40년 동안 그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와 그의 작품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는 추호의 의심 없이 말했다. “어디로 떠밀려 가든지, 나는 항상 헝가리 작가일 것이다.”
그는 젊은 날 한때 독일어로 글을 쓴 적이 있었으며, 영어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지구상에서 잘해야 천만 명 남짓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소수 민족의 언어에서 가능한 최대의 것을 얻어내는 데 자신의 사명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에게는 독일어 번역들이 그의 예술의 한 가닥 빛을 전해주어 참으로 다행이다. 그는 지극히 아름다운 문장들로 시적인 깊이를 창조했다. 그 때문에 씌어진 지 60~7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소설들은 선명함과 생명력, 슬픔과 사랑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1988년 ‘전환기’가 예고되었을 때, 부다페스트의 출판사 세 곳에서 그의 대작을 출판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갑자기 깨어난 이러한 관심이 그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는 러시아 군대가 완전히 물러나고 자유로운 민주선거가 실행된 다음에야 자신의 작품을 출판할 수 있다고 고집했다.
“문인협회라는 사람들이 집으로 전화해서 나와 내 책들의 기념비를 만들겠다고 한다. … 모든 기념비 공동의 운명은 개들이 발치에 오줌을 눈다는 것이다.”
그는 어떠한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전환기가 새로운 답변을 요구하기 직전인 1989년, 세상과 완전히 격리되었을 뿐 아니라 더 이상 글도 쓸 수 없게 된 마라이는 샌디에이고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89세의 그는 거의 한 세기를 헤아리는 자신의 삶을 권총으로 마감했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자유로운 정신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그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을 무려 41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기다린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부인처럼 자신의 유골을 태평양에 뿌려달라고 했다.
○ 책 속으로
‘이제’ 그는 말한다.
‘그림을 다시 걸 수 있네.’
‘알았어요.’ 유모가 말한다.
‘다 부질없는 일이지.’ 장군은 말한다.
‘알고 있어요.’
‘잘자게. 니니.’
‘안녕히 주무세요.’
유모는 키발을 딛고,뼈만 앙상한 주름살 투성이의 누르스름한 작은 손으로 장군의 이마에 성호를 긋는다. 그들은 서로 입을 맞춘다. 어설프고 짧은 기이한 입맞춤이다. 본 사람이 있다면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입맞춤이 그렇듯이 이것도 하나의 대답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물음에 대한 어설프고 다정한 대답.— p.276
아버지는 인류를 둘로 가른는 존재의 이원성에 대해 알고 계셨지. 아버지도 한 여인을 만나 다시없이 사랑했지만, 그 옆에서 끝내 고독하셨네. 두 분이 서로 다른 기질과 삶의 리듬을 가지 두 부류의 인간이었기 때문이지.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변화를 겪든 언제나 ‘다른 사람’을 찾기 때문일세. …..삶의 가장 큰 비밀과 최대의 선물은 ‘비슷한 성향’의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일세.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네. 그 이유는 자연이 술수와 힘을 사용해 그러한 만남을 방해하는 대 있을 걸세. 서로 영원히 희구하는, 대립된 성향의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긴장이 세계 창조와 삶의 개혁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p.223
나는 이것이 알고 싶네. 기만, 사랑, 악행, 우정이니 하는 나머지 것들은 그저 다 말이고 거짓 형상에 지나지 않네. 이 문제 앞에서 그런 것들은 의미가 없어. 나는 다만 이 한가지 관심밖에는 없네. 자네들 관계가 실제로 어떠했으며, 또 다른 세세한 일들도 전혀 알고 싶지 않아. ‘왜’와 ‘어떻게’에는 관심이 없어. 한 남자와 한 여자, 두 사람 사이에 ‘왜’와 ‘어떻게’는 어쨌든 한탄스러울 정도로 천편일률적일세. 처음부터 끝까지 경멸스러울 정도로 간단하지. ‘그 때문에’ ‘그렇게’ 이지. 이것은 진실일세. 끝에 가서 자질구레하게 묻는 것은 의미가 없어. 그러나 근본적인 것, 진실은 알아야 하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목숨을 부지했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사십일 년이란 세월을 견디었겠나?— p.261
나는 다만 이 한 가지 관심밖에는 없네. 자네들 관계가 실제로 어떠했으며, 또 다른 세세한 일들도 전혀 알고 싶지 않아. ‘왜’와 ‘어떻게’에는 관심이 없어. 한 남자와 한 여자, 두 사람 사이에 ‘왜’와 ‘어떻게’는 어쨌든 한탄스러울 정도로 천편일률적일세. 처음부터 끝까지 경멸스러울 정도로 간단하지. 그것이 가능했고 일어날 수 있었으니, ‘그 때문에’ ‘그렇게’ 이지. 이것은 진실일세. 끝에 가서 자질구레하게 묻는 것은 의미가 없어. 그러나 근본적인 것, 진실은 알아야 하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목숨을 부지했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사십일 년이란 세월을 견디었겠나? 그렇지 않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자네를 기다렸겠나?— p.261
“자네가 떠난 다음”
긴장을 조성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끝내고 이제 편하게 잡담을 하는 사람들처럼 장군은 친밀하게 말한다.
“우리는 자네가 돌아올 거라고 오랫동안 믿었네. 여기 있던 사람 모두 자네를 기다렸어. 다들 자네 친구였지. 자네는 좀 괴짜였어. 말이 과했다면 용서하게. 자네에게 음악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네. 자네가 왜 떠났는지 아무도 몰랐어. 하지만 우리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진짜 군인인 우리와는 달리 자네에게는 모든 게 더 힘들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어.
자네는 잠시 스쳐 지나간다고 생각한 것이 우리에게는 소명이었고, 자네에게 위장이었던 것이 우리에게는 운명이었어. 자네가 이 위장의 껍질을 벗어 던졌을 때, 우리는 놀라지 않았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자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 아니면 소식이라도 전하든지. 우리 중 몇몇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솔직히 말해,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네.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고. 자네가 기억하는 연대의 몇 사람도 그랬네.”
“나는 별로 기억나지 않네.”
손님은 무관심하게 말한다.
“그래, 자네는 많…”자네가 떠난 다음”
긴장을 조성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끝내고 이제 편하게 잡담을 하는 사람들처럼 장군은 친밀하게 말한다.
“우리는 자네가 돌아올 거라고 오랫동안 믿었네. 여기 있던 사람 모두 자네를 기다렸어. 다들 자네 친구였지. 자네는 좀 괴짜였어. 말이 과했다면 용서하게. 자네에게 음악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네. 자네가 왜 떠났는지 아무도 몰랐어. 하지만 우리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진짜 군인인 우리와는 달리 자네에게는 모든 게 더 힘들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어.
자네는 잠시 스쳐 지나간다고 생각한 것이 우리에게는 소명이었고, 자네에게 위장이었던 것이 우리에게는 운명이었어. 자네가 이 위장의 껍질을 벗어 던졌을 때, 우리는 놀라지 않았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자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 아니면 소식이라도 전하든지. 우리 중 몇몇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솔직히 말해,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네.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고. 자네가 기억하는 연대의 몇 사람도 그랬네.”
“나는 별로 기억나지 않네.”
손님은 무관심하게 말한다.
“그래, 자네는 많은 일을 겪었지. 저기 바깥 세상에서. 거기에서는 쉽게 잊어버리지.”
“아닐세.”
상대방은 말한다.
“세상은 아무것도 아닐세. 중요한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네. 나이가 든 훗날에서야, 나는 그것을 깨달았네. 사소한 것든 존재하지 않아. 그런 것은 꿈처럼 그냥 던져버릴 수 있어. 연대는 기억나지 않네.”
그는 고집스럽게 말한다. — p.121
“자네가 떠난 다음”
긴장을 조성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끝내고 이제 편하게 잡담을 하는 사람들처럼 장군은 친밀하게 말한다.
“우리는 자네가 돌아올 거라고 오랫동안 믿었네. 여기 있던 사람 모두 자네를 기다렸어. 다들 자네 친구였지. 자네는 좀 괴짜였어. 말이 과했다면 용서하게. 자네에게 음악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네. 자네가 왜 떠났는지 아무도 몰랐어. 하지만 우리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진짜 군인인 우리와는 달리 자네에게는 모든 게 더 힘들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어.
자네는 잠시 스쳐 지나간다고 생각한 것이 우리에게는 소명이었고, 자네에게 위장이었던 것이 우리에게는 운명이었어. 자네가 이 위장의 껍질을 벗어 던졌을 때, 우리는 놀라지 않았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자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 아니면 소식이라도 전하든지. 우리 중 몇몇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솔직히 말해,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네.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고. 자네가 기억하는 연대의 몇 사람도 그랬네.”
“나는 별로 기억나지 않네.”
손님은 무관심하게 말한다.
“그래, 자네는 많…”자네가 떠난 다음”
긴장을 조성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끝내고 이제 편하게 잡담을 하는 사람들처럼 장군은 친밀하게 말한다.
“우리는 자네가 돌아올 거라고 오랫동안 믿었네. 여기 있던 사람 모두 자네를 기다렸어. 다들 자네 친구였지. 자네는 좀 괴짜였어. 말이 과했다면 용서하게. 자네에게 음악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네. 자네가 왜 떠났는지 아무도 몰랐어. 하지만 우리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진짜 군인인 우리와는 달리 자네에게는 모든 게 더 힘들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어.
자네는 잠시 스쳐 지나간다고 생각한 것이 우리에게는 소명이었고, 자네에게 위장이었던 것이 우리에게는 운명이었어. 자네가 이 위장의 껍질을 벗어 던졌을 때, 우리는 놀라지 않았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자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 아니면 소식이라도 전하든지. 우리 중 몇몇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솔직히 말해,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네.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고. 자네가 기억하는 연대의 몇 사람도 그랬네.”
“나는 별로 기억나지 않네.”
손님은 무관심하게 말한다.
“그래, 자네는 많은 일을 겪었지. 저기 바깥 세상에서. 거기에서는 쉽게 잊어버리지.”
“아닐세.”
상대방은 말한다.
“세상은 아무것도 아닐세. 중요한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네. 나이가 든 훗날에서야, 나는 그것을 깨달았네. 사소한 것든 존재하지 않아. 그런 것은 꿈처럼 그냥 던져버릴 수 있어. 연대는 기억나지 않네.”
그는 고집스럽게 말한다. — p.121
○ 출판사 서평
어린 시절부터 24년 동안 거의 언제나 형제처럼 붙어 지냈던 두 친구가 헤어진 지 41년 만에 만나 하룻밤 동안에 나누는 대화가 소설의 내용을 이룬다. 그러나 이 간단해 보이는 소설의 배후에는 삶과 운명, 사랑과 진실에 대한 마라이의 깊은 인식과 성찰이 자리하고 있다.
존재의 심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간의 본성과 심성을 정확하게 꿰뚫고 묘사한 문학은 예로부터 시공의 제약을 뛰어넘어 많은 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힘을 발휘했다. 주인공 헨릭은 어느 날, 쌍둥이 형제처럼 지낸 절친한 친구와 사랑하는 아내에게 기만당한 것을 안다. 존재를 뿌리까지 송두리째 뒤흔드는 이 갑작스러운 사건은 결국 세 사람의 인생을 파괴한다.
친구 콘라드는 말 한마디 없이 세상의 다른 끝으로 종적을 감추고, 삶의 양지 쪽에서 부족함 없는 삶을 영위하던 헨릭은 배신감과 절망에 휩쓸려 고독으로 칩거한다. 그리고 한 집에 살면서도 가혹하게 8년 동안 침묵을 지키는 남편과 비겁하게 도주한 연인 사이에서 헨릭의 아름다운 부인 크리스티나는 결국 죽음을 택한다. 그러나 헨릭, 노 장군은 살아서 친구를 기다린다. 오로지 이 기다림 때문에 그는 분노와 절망, 고독 속에서도 오랜 세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는 보이는 현실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 즉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마침내 죽음을 앞둔 인생의 황혼에서 콘라드가 돌아오고, 헨릭의 독백이나 다름없는 대화를 통해 41년 전 서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세 사람을 파괴한 드라마가 서서히 우리 앞에 펼쳐진다. 마라이는 오묘하게 결합한 수정의 한 면 한 면을 보여주듯이, 짧고 응축된 언어로 비밀에 덮여 있던 지난 사건을 불러낸다.
동시에 그는 사랑과 정열, 우정과 신의, 진실과 거짓, 자긍심에 대한 문제를 냉정하고 단호하게 끝까지 파고든다. 성찰과 사건은 서로 맞물려 긴장을 고조시키고 사건의 깊이를 더하면서 사랑과 증오, 배반과 분노의 교향곡을 엮어낸다. 이와 같이 삶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끝까지 추적하면서도 극적 긴장을 유지하고 독자를 사로잡는 뛰어난 기교에서 마라이의 높은 예술성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왜 그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런 비극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과연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마라이는 사랑과 우정이 빚어낸 비극의 원인과 비극 앞에 선 인간의 혼란과 갈등을 파헤치기 위해서 인간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여러 가지 존재론적인 문제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예와 신의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고 현실의 삶에 충실한 부류와, 현실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정신과 예술을 좇는, 삶의 다른 기슭에 선 부류, 두 부류로 인류를 가르는 인간 존재의 이원성, 운명과 삶과의 관계, 타고난 본성이나 성격이 삶에서 하는 역할의 문제 등이 집약적으로 전개된다.
결국 마라이는 우리 인간들은 살면서 부딪치는 중요한 문제들에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전 생애로 대답한다고 결론짓는다. 긴 밤을 지새면서 지난 일을 돌이킨 다음 새벽녘, 일흔다섯 살의 노 장군은 말한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 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목숨을 바칠 정도로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분노와 배신감 때문에 죽게 내버려둔 그의 회한 어린 이런 고백에는 우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과 이 본성에서 비롯되는 운명에 대한 깊은 인식이 깔려 있다.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잘 모를 뿐 아니라, 안다 해도 대부분 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행동한다.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나머지 인생을 보내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었다는, 죽음을 앞둔 노인의 고백 앞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홍길복 목사의 세 번째 잡기장 (44) 중에서 _ 8월 5일자

헝가리의 문호 산도르 마라이 (Sandor Marai 1900 -1989)의 소설 ‘열정’ (Die Glut)를 읽으면서 밑줄친 귀절들에다 제 느낌을 첨부한 잡문입니다.
(열정, 산도르 마라이, 김인순역, 솔, 2016)
(1) 사랑하는 사람은 언젠가 잃게 마련입니다.
(2) 사람들은 이기심 없는 우정을 갈구하지만 그러나 세상에 이기심 없는 우정이란 없습니다.
(3) 예의바른 청중들은 알고 있습니다. 음악이란 사실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4) 그들은 서로 좋아했기 때문에, 한쪽이 가진 부, 다른 한쪽이 가진 가난을 서로 용서해 주었습니다.
(5) ‘인간에게서 무엇을 알고 싶으세요?’ ‘진실이요’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아니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은 알고 계시잖아요?’ ‘현실은 진실이 아닙니다’
(6) 세상에 사소한 것이란 없어! 십년, 이십년을 지나보면 사실 커다란 사건들은 사람의 내면을 하나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수있어!
(7) 끝이 가까이 오면 처음 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네.
(8) 일부를 주는데 받지않는 사람들은 전부를 달라고 그런 것이네.
(9) 현재의 자기와는 달라지고 싶어하는 것, 그건 가장 고통스런 소원이네.
(10) 참아야하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릴 사랑하지 않아도 참아야하네. 배반도, 신의를 지키지 않아도, 그리고 나보다 인품이나 지성이 뛰어난 사람을 보아도 참아야하네!
(11) 의도가 죄야! 모든 행위는 의도의 결과잖아!
(12) 외적인 힘은 인간관계를 조금도 변화시킬수가 없어요.
(13) 어느날 갑자기 닥치는 일이란 없습니다. 죽음 까지도.
(14) 세상만사는 답답할 정도로 되풀이되는 것이다.
(15) 단번에 늙지는 않아! 서서히 눈, 귀, 다리, 심장이 단계적으로 늙어가네. 그러다가 별안간 늙는게있어! 영혼이야!
(16) 차츰 세상이 이해되기 시작하면 그럼 죽을 때가 된 거야 !
(17) 이미 죽은 사람보다 더 오래 산 사람들은 다 배반자야! 목숨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은 범죄야 ! 형법서에는 없지만 우린 알아!
(18) 우린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질 모르면서 한 평생을 살다 가는거야 !
(19) 그런 체제 속에서는 존재하는 것 자체가 그 체제를 승인해주는 것이야 !
(20) ‘지나치게 오래 사는 것은 분별없는 짓이다’ – 마라이는 이런 글을 남기고 망명지 California 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생각을 깊게하도록 도와주는 소설이었습니다. 오늘도 뜻있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