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 칸딘스키의 예술론
바실리 칸딘스키 / 열화당 / 2021.11.25
열화당 미술 시리즈. 열화당 미술 시리즈는 미술의 대중화를 꿈꾼다. 일반인들이 미술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된 시리즈이다.

○ 목차
초판 서문
제2판 서문
일반론
- 서론
- 운동
- 정신적 전환
- 피라미드
회화론
- 색채의 작용
- 형태언어와 색채언어
- 이론
- 예술작품과 예술가
결론
부록1 칸딘스키 산문시
부록2 칸딘스키 평전
바실리 칸딘스키 연보
개정판을 내면서
역자후기

○ 저자소개 :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1866 ~ 1944)는 모스크바 출생으로,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률, 정치, 경제를 전공했다.
서른 살에 도르파트 대학 교수직을 사양하고, 뮌헨으로 옮겨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추상미술의 선구자로서 그는, ‘팔랑스’ ‘청기사’ 등의 그룹을 결성했고, 1912년 예술연감 『청기사』를 간행했다.
1922년부터 1933년까지 바우하우스 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점·선·면』 『회고』 『음향』 등이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20세기 미술의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다.
오늘날 그는 추상미술의 창시자이며 대표적 이론가로 이해되고 있다. 프란츠 마르크 등과 뮌헨에서 ‘청기사파’로 알려진 미술가 단체를 설립했다. 그 이후 그의 예술은 대상으로부터 점점 더 자유로워졌으며, 1910년에 제작한 첫 번째 수채 추상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이론에서 끊임없이 음악과의 상관성을 추구했다. 그리고 음악에서 그렇듯이, 화성법과 음조에 의해 영향을 받는 매체로 이루어진 각각의 기록에서 칸딘스키는 다양한 음영의 상호작용을 통한 색채의 순수한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고갱은 “무엇이나 순수한 색채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했다. 칸딘스키는 가장 먼저 이를 깨달았으며, 미술가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예술은 많은 점에서 종교와 유사하다.” ― 바실리 칸딘스키
- 역자 : 권영필
1941년생으로, 서울대 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파리 3대학에서 미술사를 수학, 독일 쾰른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중앙아시아학회와 한국미술사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영남대, 고려대 교수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로 정년퇴임했다. 그 후 상지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임했다. 현재 아시아뮤지엄연구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실크로드 미술』(1997), 『미적 상상력과 미술사학』(2000), 『렌투스 양식의 미술』(2002), 『왕십리 바람이 실크로드로 분다』(2006), 『문명의 충돌과 미술의 화해』(2011), 『실크로드의 에토스: 선하고 신나는 기풍』(2017)이 있고, 역서로 『중앙아시아 회화』(1978), 『돈황』(1995),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2003)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예술가란 무엇인가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릇 예술가의 임무라는 것은 형식을 지배하는 데에 있지 않고, 내용에 적합한 형식을 만드는 데 있기 때문이다.
○ 독자의 평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읽고
(이 시대의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것들)
- 서론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책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제목부터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 했다.
일반적으로 제목으로 그 작품에 대한 첫인상을 그리는 것이 대부분일 것 같다. 나도 역시 어떤 작품을 접하게 되는 경우에 제목을 보거나 듣고, 그 작품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미지를 먼저 구축시
킨다. 이번에 과제물로 인해서 접하게 된 러시아 출신의 화가 칸딘스키의 책 역시 책제목을 보았을 때 떠오르는 인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술에서는 정신적인 면, 그러니까 영혼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예술이 꼭 갖춰야 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테크닉적인 예술가가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생각을 가지고 펼쳐든 책은 솔직히 부족한 내 자신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내용이 너무나 많았다.
칸딘스키가 화가 출신이라서 그런지 주로 예를 회화적인 면에 결부시켜 많이 설명하고 있었다. 같은 예술분야이면서도 미술에는 별로 아는 지식이 많지 않아서 몇 번을 되풀이해서 읽어도 내용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내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예술, 즉 무용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해보고자 했다. 물론 잘 모르는 것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일단은 먼저 무용에 있어서의 예술적인 가치나 정신적인 가치, 그리고 예술을 창조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인식해야 할 점을 배워보고자 했다.
- 본론
1.예술가의 정신세계
예술가라면 먼저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무용을 하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예술을 실행하는 모든 분야의 예술가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어야 하는 생각이라고 보는데, 그 이유는 어떻게 보면 너무 간단하다.
칸딘스키도 여기서 말하고 있듯이 답습하는 예술은 내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정신이 결여된 모방일 뿐이라는 것이다. 모방이 아닌 예술, 그러기 위해서는 예술을 창조하는 자신만의 잣대가 되어주는 예술관이 있어야 할 것이고, 그 예술관은 늘 새로운 창조를 일으킬 수 있는 독특하고, 작가나 예술가의 개성이 짙게 묻어 나오는 정신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서론의 시작을 보면 “모든 예술작품은 그 시대의 아들이며, 때로는 우리 감정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은 그 시대만이 보여주는 예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정말 예술이라는 것이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문학분야와 같은 예술작품들은 글로써 그 시대의 상황과 작가 자신의 정신을 표현한다. 그리고 음악이나 무용도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목소리로 시대를 반영한다. 그리고 그 반영하는 소리에는 예술가들의 사상, 즉 정신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책에는 르네상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나오고 있지 않지만, 칸딘스키는 르네상스에 대한 반감이 있는 것 같다. 그리스, 로마의 시개로 돌아가 다시 그 시대의 문화를 부흥하려고 했던 르네상스는 그저 답습에 지나지 않을 뿐 정신적인 면은 결여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예술가들은 그 시대의 모습을 새롭게 표현하는 창조적인 예술을 지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술을 추구하고 있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적인 모습을 자신의 정신세계와 연결시켜서 만들어 내는 예술이 진정한 예술, 즉 정신세계가 묻어나는 예술이라고 인정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도 공감을 하는 부분이 많다. 무용과 연결시켜본다면, 그리고 무용 중에서도 내가 전공을 하고 있는 발레와 연관지어서 본다면, 발레는 사실 창조보다는 전통을 고수하는 예술 쪽에 가깝다. 다른 차원의 의미일 수도 있지만, 발레는 전통발레(classic ballet)라고 하여 하나의 만들어진 작품을 수세기 동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물론 나도 이런 고전작품을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우리는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서 대중을 포기하는 예술을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딱딱한 몸짓과 그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된 춤과 스토리가 발레를 대중적으로 끌어올리기보다는 많은 대중들에게 어렵고, 지루한 춤으로 인식시켜 버린 것이다. 물론 클래식발레가 안 좋다거나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예술세계를 갖기 위해서는 우리도 무언가 변화가 필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반대적인 움직임으로 최근에는 이런 형식에서 탈피해서 무용분야에서도 현대적인 요소를 많이 가미한 춤이 나오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모던 발레인데, 여기에서는 주제가 주로 시대적인 문제점에 대한 문제제기 등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 많고 동작에 있어서도 육체의 아름다운 선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움직임, 몸을 찌그리거나 형식을 탈피한 움직임으로 새로운 아름다움(美)을 추구해 나간다.
그리고 단순하고 동화적인 권선징악이라는 유형의 스토리에서 벗어나 그 시대가 내포하고 있는 정신세계를 보여줌으로써 관객과 정신적인 유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아니 나부터가 먼저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무용을 시작한 후로 춤을 내 일상처럼 여기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너무 어렸을 적엔 내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고 있긴 하지만, 예술이란 개념조차도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조금 자라서 나만의 예술관을 말한다면 전적으로 나만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예술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서적인 순화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사회와 동떨어진 예술보다는 생활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예술이 더 좋은 예술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대중적인 예술가가 되기를 원한다. 내가 말하는 대중적인 예술가라는 것은 돈이나 명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력해서 만든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삶의 활기를 불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대중적인 예술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예술가들이 예술을 하는 목적과도 일치된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다른 사람들에게 내 춤을 통해서 무언가를 얻어가길 바란다. 내가 추구하는 예술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공감을 얻지 못하고 오로지 나만을 위한 춤이 된다면 나는 너무나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도 예술은 그 시대의 아들이라는 말을 했듯이 내 춤을 통해서 이 시대와 함께 호흡하고, 살아있는 정신세계를 관객과 함께 하는 것이 예술가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내가 예술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언젠가 정말 내가 스스로 내 작품을 안무하고, 표현한다면 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보다는 많은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그런 발레를 만들고 싶다.
이 칸딘스키의 책에서 3번째 큰 주제인 ‘정신적인 전환’에 대한 글을 읽고 느낀 점이다. 칸딘스키는 정신적인 전환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예술은 현실적인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위대성을 감지하게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의 정신적인 전환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 한번의 의문이 던져졌다. 너무나 어려운 말들로 적혀진 그의 글은 나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게 만들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엔 정신적인 전환이라는 것은 예술가들이 사실을 사실로 바라보는 시각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주제를 너무 어렵게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자신의 독특한 예술관만을 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예술작품은 아무리 무거운 주제라도 사실 그대로의 표현이기 때문에 관객도 자신만의 해석을 더할 수 있고, 그러면서 우리의 생활 가까이로 다가올 것이며, 그런 예술이야말로 위대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닐까?

- 이론편의 무용에 관한 글을 읽고…
여기의 칸딘스키의 책에서는 미술과 연관지어 예술의 가치나 방향을 설명해주고 있는데, ‘이론’ 부분에서 무용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나는 다른 것보다도 이 부분에서 설명되어지고 있는 무용에 관한 칸딘스키의 견해와 나와의 견해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칸딘스키는 무용을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운동의 완전한 내적 의미라고 표현했다. 그의 말대로 무용은 공시간적 무대예술이라고 흔히들 표현한다. 이러한 무용이 발생하게된 시발점은 성적인 요인이며, 다음으로 예배의 수단, 즉 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위해서 무용이 발생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무용은 그 시작 초기에는 충분한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발레가 이를 종식시켜 버렸다고 칸딘스키는 말하고 있는데, 그는 무용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다른 새로운 언어가 대체되어져 정신적인 영혼의 표현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술을 하던 그가 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니 당연히 무용 분야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이사도라 덩컨의 새로운 춤 현대무용이다.
당시의 시대상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한다면, 발레가 러시아로 건너가서 부흥이 일어나고, 발레의 인기는 그야말로 절정에 달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때에 발레의 정형화된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무용수가 바로 이사도라 덩컨이라는 여자 무용수였는데, 그녀는 소재에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움직임을 표방했다. 바로 이러한 그녀의 움직임이 여기서 칸딘스키가 말하고 있는 무용의 과도기인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예술에 있어서의 과도기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왜냐면 과도기라는 말이 혼란이라는 말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한 걸음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기에 따르는 고통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적인 요구에 부합되지 않은 것처럼 보여졌던 그녀의 춤은 현대에서는 인정받고 있는 부분이 상당히 크고, 발레와 더불어서 큰 양맥을 이루는 춤의 흐름이 되어지고 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발레가 현대무용을 따라가는 경향이 짙게 나타나고 있을 정도이다. 현대무용을 전공하는 무용가들이 인습적인 요소를 포기하면서 불협화음이라고 여겨졌던 요소들이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지니는 미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예술에 있어서는 정답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 당시까지는 정형화된 미가 최고라고 믿었었는데, 새로운 발상을 가진 예술가의 출현으로 인해서 새로운 춤이 나타나고 모방이라는 틀을 깨면서 정신적인 세계의 표출도 색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용에 있어서의 예술적인 정신가치는 무엇일까? 무용을 전공하는 많은 예비예술가들은 단순한 테크닉만을 강조하는 예술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 말의 의미는 정신세계가 결여된 영혼이 빠진 예술가가 되는 것을 늘 경계한다는 의미이다. 무용이라는 예술은 더욱이 그런 것이 더 심한 것 같다. 일단은 몸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면 관객에게 좋은 감동을 주는 것이 사실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연습을 통해서 기술적인 면을 보충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단순히 기술적인 춤만 잘 추는 무용수는 말 그대로 그저 한명의 기능이 좋은 무용수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작품을 통해서 자기의 영혼의 울림소리를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에 몰입해서 자기의 색을 담을 수 있고, 자기만의 예술적인 빛깔을 지닌 무용수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예술에서의 모방
칸딘스키는 그 시대에만 존재하다가 죽어버리는 예술을 경계한다. 그 이유로 그는 모방을 통한 단순한 창작활동은 정신세계가 결여되어져 있기 때문에 그 생명력이 짧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생명력을 제공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가 될 것이다.
그에 글을 읽어보면 극도로 모방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이 표현의 제한이 없듯이 모방은 어떻게 보면 어느 정도의 필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모방을 통한 더 수준 높은 창조는 가능한 것이 아닐까? 내가 말하는 모방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세계의 모방이 아니라 여러 작품을 모방해봄으로써 더 새로운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의미의 모방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다. 남의 예술품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색을 덧칠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나도 안무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기때문에 많은 동작을 만들어 보는 연습을 많이 한다. 그런데 어릴때는 남의 동작을 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한다는 생각에 모방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하지만 훌륭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방해 보는 것을 통해서 나는 한단계 더 향상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사람의 안무의도를 밟아 봄으로써 나는 나만의 방향과 색을 정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나에 생각이니까 틀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 무용의 무대구성이다. 그는 음악과 회화의 높은 수준에 놓여져 있는 미래의 무용이 갖고 있는 세 번째 요소로서 무대구성을 들었는데, 사실 무대구성이 무용의 군무안무에 있어서는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가 되어준다.
무대의 공간구성에서 나오는 변화나 움직임들에 의해서 작품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 것인지는 무대에서 행하는 예술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예술적인 표현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무대구성의 전환을 통해서 거기서 탈피하기도 하며, 자신의 의도나 생각을 무대공간의 연출을 통해서 표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대공간의 구성에 있어서 가지게 되는 또 한가지의 의미는 수(數)에 의한 표현이다. 공간을 구성한다는 것은 무용에 있어서는 협동을 의미한다. 서로 약속된 움직임이라는 말인데, 자신의 춤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호흡도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요소가 우리의 지금의 춤을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존재시켜준다고 그는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저번에 연극작품을 보았을 때 느낀 것인데 한명의 배우가 나와서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극을 이끌때의 무대구성은 왠지 모르게 나로 하여금 공간이 넓다는 느낌을 받게 하였다. 분명이 소극장이였는데, 배우 한명이 무대를 사용하는 모습이 꽤 크다는 생각을 받게 했다. 아마도 그 배우가 혼자서 그 공간을 채워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캣츠라는 뮤직컬을 보았을 때는 춤과 노래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배우들때문에 공간이 가득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또 분장실이라는 작품에서도 여러 배우들의 자리 배치가 객석의 위치에 따라서 보는 시각의 변화를 주었다. 그 연극을 보면서도 이런 방법으로도 관객의 시각을 바꾸어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참된 예술작품의 탄생은 예술가들의 수수께끼 같은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탄생되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예술작품이 탄생되어지면 그 작품은 하나의 독립된 생명의 실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칸딘스키는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그는 진정한 예술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작품은 다른 모든 실체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창조하는 능동적인 힘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특이한 것 한가지는 칸딘스키의 예술작품에 대한 가치평가의 방법이다. 그는 예술작품의 가치를 영혼의 진동을 일으키는 정도로 측정하였는데, 그는 영혼의 진동을 많이 줄 수 있는 작품이야말로 그 만큼의 예술성이 더해진다고 보았다.
영혼을 울릴 수 있는 작품은 영혼이 깃들여진 예술활동으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참 멋진 말인 것 같다.
영혼을 진동시킨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보면 내가 예술가라는 자부심을 갖게 만들어 주는 듯하다. 내 몸으로 표현되어지는 춤과 내가 만들어낸 작품이 사람들로 하여금 영혼의 진동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그건 예술가로서의 삶으로는 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릴 적에는 그저 나는 멋지고 기술적인 춤만을 추구했었다. 그리고 내 춤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자신감으로 만족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계속 춤을 추다보니, 한계라는 부분을 느끼는 듯했다. 기본적으로 정해진 틀 속의 동작은 오랜 기간의 연습으로 모두 가능하게 되었지만, 그 이상이라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돌파구(突破口)를 찾은 느낌이다. 그 새로운 것이란 영혼을 깃들인 무용인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와 같이 정신적인 세계를 추구함으로써 나는 진정한 무용가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안무를 함에 있어서의 무한한 자유가 제공되어져 있다. 예술을 추구하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그러하듯이 표현의 자유는 우리들의 권리인 것이다. 하지만 맹목적인 창조는 경계되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를 얻은 만큼 우리에게는 인간의 영혼을 발전시키고 순화시켜야 하는 의무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든 사물에 영혼을 불어넣을 수도 있고, 생명을 빼앗기도 한다. 그리고 칸딘스키는 이렇게 부여되는 자유에 대하여서 ‘목적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있다. 목적의 순수성이라는 것은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자유라는 특권을 사용함에 있어서 도덕적인 고려가 뒤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는 예술이라는 것은 공허하게 사라질 사물들을 맹목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목적이 있는 힘이라고 하였다. 또 한 예술은 인간의 영혼을 발전시키고 순화시키는 데에 기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술이라는 것은 그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고유한 형식의 언어로써 사물에서 영혼의 말을 주고받는 언어이면서, 또 영혼이 이런 형식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나날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이러한 면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공백은 매워질 수 없이 남겨져 있고 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술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요인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칸딘스키는 예술과 영혼은 함께 발전한다고 말을 해주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술과 영혼은 교호작용과 상호완성을 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예술을 추구하고 있는 예비예술가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울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지만 나는 또 한번 내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과연 사람들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노력을 했는지 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만큼, 아니 그 이상의 노력으로 앞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순화시킬 수 있다면 아마 내가 얻을 수 있는 대가는 다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예술가를 신성한 심부름꾼이라고 하였는데, 그러한 사람으로서 내 영혼을 먼저 교화시키고, 사람들에게 보다 깨끗한 몸짓을 보여주고 싶다.
예술가는 무엇인가를 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또 그는 여기서 말하고 있다. 무릇 예술가라는 것은 형식을 지배하는 데에 있지 않고, 내용에 적합한 형식을 만드는데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결코 인생의 행운아가 아니라고 한다. 왜냐면 그는 의무감을 가지고 자기의 행동, 감정, 생각 등 모든 것에 확고한 소재를 형성하며, 여기에서 자신의 작품이 탄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는 인생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나, 예술에서만은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칸딘스키는 예술가를 비예술가와 비교하여서 세 가지의 책무를 적고 있는데, 첫째로 예술가는 자기의 천부적인 재능에 보답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정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 감사하고 좋은 작푸믕로 갚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예술가들의 행동, 사상, 감정 등은 모든 사람에게서처럼 정신적 분위기를 형성하며, 이 때에 그것들은 정신적 공기를 맑게 하거나 또는 오염시킨다고 하였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겠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는 이러한 행동, 사상, 감정 등은 그의 작품을 위한 소재가 되는데, 이 작품은 다시 한번 정신적 분위기에 관여한다. 예술가는 사르 펠라단이 말한 바와 같이 ‘임금’으로 군림하는데 이것은 그가 위대한 힘을 가졌다는 위미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의 의무 또한 막중하다는 뜻에서도 그러한 것이다.
예술가를 미의 사제라고 하는데, 이럴 때도 ‘미’를 내면적 가치라는 동일한 원칙에서 추구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내적 영혼의 필연성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은 아름다우며, 내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고 한다. 이 말의 의미는 각자가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표현을 하는 도구, 즉 예술가의 내면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 결론
이 책을 읽고 느낀 결론은 바로 영혼을 가진 춤을 추자는 것이다. 물론 읽은 사람들마다 자기만의 해석이 있겠지만, 내가 받은 생각과 느낌은 그것이다. 그의 책에서는 회화적인 설명이 많이 예시되어 있지만, 나는 그가 말하는 예술가의 모습에 발레를 전공하고 있는 내 모습을 넣어보려고 했다. 그렇게 읽어내려가다 보니 내가 얻은 결론은 바로 영혼을 표현하는 무용가가 되자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예술에서는 정신적인 면이 많이 요구된다. 하지만 역기능을 초래할 수 있는 정신은 우리가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칸딘스키가 말하고 있는 거창한 임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예술적인 몸짓 하나로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책을 읽는 동안 내 생각이 한 단계 더 발전한다는 생각도 들었고, 다시 한번 내 정신세계에 대한 생각을 해볼수 있어서 좋았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책이 어려워서 한권의 책을 읽은 시간치고는 조금 많이 소요됐지만, 뭔가 내가 꽤 그럴듯한 선물을 얻어가는 느낌이다.
한명의 예술가로서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 영혼이 깃들여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