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이데올로기의 종언
다니엘 벨 / 범우사 / 1999.11.30
‘탈산업사회의 도래’,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 등 지식 패러다임의 급변상을 묘파한 저작으로 이어져, 다니엘 벨 3부작의 길을 튼 기념비적인 저서. 특히 민족국가를 추구하던 적대적 관계에서 협력과 우호 관계로의 전환이 강력히 요청되는 지금, 이 책은 이데올로기의 「역지사지 (易之思之)」 시대를 건너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들을 던져준다.

○ 목차
1. 머리말
2. 현대의 미국
3. 대중사회로서의 미국
4. 가족자본주의의 붕괴
5. 미국에 지배계급이 있는가
6. 신분정치와 새로운 불안
7. 미국 사회주의의 좌절
8. 현실 탐구의 10개 이론
9. 마르크스로부터의 두 개의 길
10. 소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
11. 서구에서의 이데올로기의 종언
○ 저자소개 : 다니엘 벨
1919년 뉴욕에서 출생한 벨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저술가요, 저널리스트이며 또 사회학자다. 그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수학, 사회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저널리즘계에 투신하여 The New Leader와 Common Sense라는 잡지사의 기자 또는 편집인으로 활약했다. 30대에 들어서면서 학계로 진출하여 1958년에서 1961년까지는 콜롬비아대학교 사회학 교수로서 강의했고 1969년부터 하버드대학으로 옮겨 현재 헨리포드 2세 석좌 교수로 있다. 저서로 <미국의 신좌익>, <이데올로기의 종언>, <급진적 수익>, <오늘날의 자본주의> 등이 있다.
– 역자 : 이상두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수료. 경북대학교 및 성균관대학교 강사, 서울시립대학 교수. [대구일보] [영남일보] [민족일보] [중앙일보] 논설위원 역임. 저서로는 [옥창 너머 푸른 하늘이], [마르크스 · 레닌주의와 언론], [마르크스 · 레닌주의의 제문제]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근대국가에 있어서의 자유], [자유에서의 도피], [자유민주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외 다수가 있다.
○ 책 속으로
– 머리말
제1부의 여러 평론이 일반이론을 다룬 데 비해, 제2부는 거의 미시적 (微視的)으로 미국의 사회영역의 자세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문제의 범위로서는 미국의 사회생활의 복잡함을 예증하려고 시도하였다. 예를 들면 〈범죄와 미국적 생활양식〉이라는 제목의 평론은 도박의 사회조직에 관한 다분히 흥미있는 서술이지만, 동시에 인종집단과 사회적 이동과의 연관성에 대한 이론이기도 하며, 또 출세의 사닥다리를 올라가는 경계적 (境界的)인 방법의 예시이기도 하다 (아마 그런 의미에서 범죄는 사회에 있어서 필요하다는 뒤르껭의 역설적 논평의 예증이기도 하다).
노동조합에 관한 평론에서는 기성의 특권에 대해 제도적으로 보장된 도전이 ‘이데올로기’ 요인과 지위 (地位) 요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어떻게 순응되어 가는가를 분석하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긴 노동에 대한 평론은, 능률의 관념이 산업의 기술적·사회적 조직화에 있어서 자명한 전제로서 받아들여진 것이 얼마나 노동자에게 유해한 결론을 가져오고 있는가를 나타내려 하였다. 이러한 몇 가지 평론의 중심점은 많은 분석상의 성과이고, 앞으로 여론분석에 있어서의 시장 (市場)과 ‘이데올로기’, 사회운동과 시장조합주의 (市場組合主義), 인종집단의 존속과 사회적 이동, 신분정치와 이익집단 정치, 기술적·정책적 의사결정이라는 사회적 연구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을 나는 희망한다.
미국의 급진적 운동과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제3부 (이 책의 제2부 – 옮긴이 주)는 정치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의 역할과, 이데올로기와 지식인과의 관계에 대하여 몇 가지 핵심적 문제를 제기한다. 소련의 행동의 본질이 미국의 정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평론은 러시아의 의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설명하려 하고 있다. 소외와 착취의 주제는 급진적 윤리가 (倫理家)에겐 중심적인 것이므로, 이런 관념을 역사적으로 규명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극히 중대한 통찰과 실태를 극명하게 드러내려고 노력하였다.
저술가는 특히 사회분석적인 평론에 있어서 자기의 가치를 현재화 (顯在化)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내가 채택하는 문제의 시각 (時角)은 반이데올로기적이거나 보수적인 것은 아니다. 최근 10년 동안에 우리는 그 세계관의 진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상체계로서의 19세기의 여러 이데올로기,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고갈을 목격해 왔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의 반동으로서, 즉 지성과 감성의 절대적 귀의 (歸依)에 대한 강제에의 반동으로서 많은 지식인은 대중 내지 사회행동의 모든 형태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신보수주의와 새로운 경험주의의 기반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공포를 다소나마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를 부인하기 위해서는 다만 유토피아적 질서의 비판만이 아니라 동시에 현존사회의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비평가에게 맡겨져 있는 것은 소외의 냉엄함과 타자 (他者)이고자 하는 감각이다. 회의 (懷疑)의 주장이 신조(信條)의 주장에 선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헌신 (獻身)이라는 것은 자기의 직업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소외는 니힐리즘 (Nihilism : 허무주의)이 아니고 하나의 적극적 역할이다. 즉 어떤 주의, 주장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공동체의 어떠한 구체적 형태라도 최종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되지 않는 태도인 것이다. 비판적인 미국관을 반미적 (反美的)이 되도록, 혹은 민주주의의 여러 가치를 거부하도록 아아 (亞阿)지역의 지식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비공식 계통의 몇몇 이데올로그 (Ideologue)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상생활 (思想生活)에 관한 편협한 견해이다. 당파적인 사람들과 비평가가 사상과 경험의 검증인 끝없는 대화에 있어서 함께 정당하게 발언할 때 사회는 더욱더 활기에 넘치는 매력적으로 된다. 그 희망에 부푼 미래의 적대자가 되지 않고 모국 (母國)의 비평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의 평론은 원래 《코멘터리》와 《엔카운터》지 (誌)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세 편의 긴 평론은 처음에는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지식인의 국제조직인 ‘문화자유회의’ 주최의 회의에 연구보고서로서 제출되었다. 1956?57년 1년간 (《포춘》지에서의 휴가 기간 중) 동 회의의 국제 세미나 간사로서 파리에서 보람찬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세미나의 기획위원회 ― 레이모아롱, 마이클 폴라니, 에드워드 쉴즈 ― 와의 토의에서 많은 것을 배웠는데, 이데올로기에 관한 몇 가지 평론은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솔 레비터스와 그가 30년간 지도력을 발휘한 《뉴 리더》지에 나는 다른 기회에 경의를 표했다. 나의 초기 저작은 《뉴 리더》지에 게재되었다. 비록 어떠한 정치적 입장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곳은 언제나 사상적인 고향이었다.
나는 개인적·사상적 의미에 있어서 사상의 귀중성을 나에게 가르쳐 준 시드니 후크 교수에게 최대의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의 정통 제자는 아니었으나 공통의 연구과제에 있어서 협동작업의 귀중한 방법과, 격의 없이 의론 백출 (議論百出)하는 격렬한 제사상 (諸思想)의 교환에 대해 그에게서 배웠다. 나는 그의 정열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으나 그의 사상적 관심을 대부분 공유 (共有)한다. 비록 인기 없는 주의, 주장이라도 논쟁으로부터 도피하지 않는, 그리고 친구를 못 본 체하거나 버리지 않는 것에 나타나는 개인적·사상적 용기를 나는 특히 칭찬하는 바이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듯이 그는 동시대의 위대한 교사들 중의 한 사람인 것이다. — 1959년 5월
○ 출판사 서평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마르크스주의가 현대산업사회에서 설자리를 잃고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명쾌하게 밝혀놓은 논평집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벨은 1950년대 말 당시 사회주의국가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상황인데도 왜 마르크스주의가 막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폈을까. 벨의 견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데올로기의 의미부터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벨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란 사상을 사회적인 목적달성의 수단으로 전환시킨 가치와 신념의 체계이다. 사회변혁을 이루어낸 초기에 이데올로기는 사회구성원 사이에서 의심받지 않는 채 받아들여지는 신성불가침의 지위를 갖게 마련이다. 사회주의 이념이 현실 규정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화이트칼라의 성장으로 계급구조에 큰 변화를 낳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서구사회에서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복지사회의 등장에 따라 사회계급이 양극화한다는 마르크스주의는 <고갈>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벨의 이데올로기 종언론은 프롤레타리아의 <절대적 빈곤화론>, <계급 투쟁론>을 골자로 하는 마르크스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이론이다. 현상유지에 입각한 보수주의 성향을 띠고 있는 벨의 견해는 특히 순수한 학문적 성격을 넘어 정치적 의도까지 내포되어 있는 듯 하다. 벨 자신도 <이데올로기 종언론은 오늘날 사회에서 풍미하고 있는 신좌익 열풍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데올로기 종언이 곧 유토피아의 종말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는 점이다. 유토피아 사상은 사회를 개혁하려는 인류의 소망을 담고 있는데 비해 종국에 가서는 기존정치 질서를 합리화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와는 차별성을 갖기 때문이다. 더욱이 19세기의 낡은 이데올로기는 활력을 잃었지만 아시아-아프리카 신생국에서는 산업화 근대화 민족주의 등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형성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고한 논평집으로 널리 알려진 이 책은 1960년 뉴욕의 한 출판사에서 나온 이후 프랑스어 일본어 등 세계 각국어로 번역 출판됐다. 국내에서는 70년대 말 번역 출간되기 시작했고, 현재 4종이 유통되고 있다.
– 세계적으로 저명한 저널리스트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론 체계 : 미국사회와 소비에트 러시아의 현실을 탐구해보다.
이 책은 미국의 번영이 모든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불안과 긴장, 위기 등을 초래하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현재 미국사회와 소비에트 러시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내재적 모순과 갈등을 예리하게 파헤침으로써 유토피아의 종말이 아닌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하고 있다.
서구에서의 복지국가의 용인, 바람직한 권력의 분권화, 혼합경제 체제 및 다원적 정치체제에의 합의, 그리고 소련 등 동구 제국에서의 충분한 잠재력과 설득력을 잃은 화석화된 이데올로기 등으로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났음을 밝히면서 이데올로기의 부정적 측면의 극복을 시도하고 있다.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이 책은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 – 1950년대에 있어서 정치사상의 고갈에 대하여’ (Daniel Bell, The End of Ideology-on the Exhaustion of Political Ideas in the Fifties, New York, The Free Press, 1960)의 62년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본래 《이데올로기의 종언》에는 이 책에 번역 수록한 것 외에 제2부로서 〈미국-생활의 다양성〉이 있으나 출판상의 사정 때문에 삭제하고, 제3부를 제2부로 차 를 바꾸었다. 그리고 제1부에서 〈미국 자본주의의 전망〉, 〈미국의 과거에의 제굴절 (諸屈折)〉, 제3부에서는 〈제3세대 무드〉 등 3개 부문을 번역에서 제외시켰다. 이 때문에 비록 형식상으로는 불균형함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나, 내용상에 있어서는 저자의 이론체계와 사상구조를 그다지 해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다니엘 벨의 학자적 · 저널리스트적 명성을 높이고 학문적 공헌을 한 책이며, 동시에 많은 문제점을 제기한 명저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 미국사회와 소비에트 러시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내재적 모순과 갈등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민주사회주의자임을 선언한 이데올로기적 입장에서 볼 때 당연한 분석이며 평가라고 하겠다.
저자는 미국의 번영이 모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불안과 긴장, 그리고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제1부 제4장 〈신분정치와 새로운 불안〉)고 전제하면서, 종래 이상으로 브로커 스테이트 (중개국가)가 되어 버린 미국정부 그리고 메카디와 그 일파가 공산주의 문제와 관련하여 민주주의 구조에 가한 광범한 타격을 지적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더욱이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기대하는 비옥한 토양이 존재하는 듯 보였는데도 미국에 있어서의 사회주의 운동이 실패한 것은 윤리와 정치 사이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한 때문 (제2부 제1장 〈미국 사회주의의 좌절〉)으로 간주하고 미국 사회주의 운동의 기회주의적 입장을 비난하고 있다.
저자가 겪은 이 미국 사회주의의 좌절의 경험은 사회주의에 대한 정열의 급격한 냉각을 가져왔고, 그것은 동시에 소련에 대한 비판과 공격으로 귀결되고 만다.
저자의 말대로 소련에서 있었던 모스크바 재판, 독·소불가침조약, 강제수용소, 헝가리 노동자 파업에 대한 탄압 등 일련의 불행한 사건 (제2부 제5장 〈서구에서의 이데올로기의 종언〉)들이 저자의 사상에 충격을 주어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 · 회의 · 환멸 · 혐오의 감정을 품게 하였을 것이다.
이렇듯 현대 미국사회와 소련의 현실을 비난한 저자는 한편에서는 복지국가의 용인, 바람직한 권력의 분권화 (分權化), 혼합경제 체제 및 다원적 정치체제에의 합의가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언을 의미한다고 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소련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가 동구 제국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그 충분한 강제력과 설득력조차 상실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 있어서도 공산주의 세계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가까워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 ‘이데올로기의 종언론’은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의 ‘절대적 빈곤화론’과 ‘계급투쟁론’에 도전하는 이론이며, 현상 유지에 입각한 개량주의적 이데올로기라 해도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의 이데올로기 종언론자의 주장을 속단, 오해하지 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저자는 교조적·광신적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주장한 것이지 이데올로기 일반의 종언을 주장하지는 았다는 점,
둘째, 낡은 19세기 이데올로기는 활력을 잃었으나 아시아, 아프리카 신생국가에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산업화, 근대화, 내셔널리즘 등)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
셋째, ‘유토피아의 종언’을 선언한 허버트 마르쿠제와는 달리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유토피아의 종언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점 등이다.
부제 (副題)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1950년대의 이데올로기의 고갈을 다루고 있으나 ‘탈 (脫) 이데올로기 시대’에 접어든 듯한 오늘날에도 대체로 들어맞는 이론이요, 많은 시사를 주는 저서라 하겠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