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캐테 콜비츠
캐테 콜비츠 / 운디네 / 2004.9.7
세계적인 판화가이자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예술가’, ‘미술사의 로자 룩셈부르크’라 평가받는 캐테 콜비츠 (Kathe Kollwitz, 1867 ~ 1945)의 작품, 일기 선집이다.
이 책은 콜비츠가 41세 때부터 죽을 때까지 써내려간 일기 10권 (약 1,700쪽)을 아들 한스 콜비츠가 일목요연하게 각각의 주제별로 묶은 것이다.
어린 시절, 가족 관계, 사랑과 결혼, 시대사적 사건, 예술적 취향, 어머니로서의 모습,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 등등으로 나뉘어져 있어 보다 효과적인 방식으로 그녀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내가 나를 보는 시선’으로 쓰여진 일기는 고난의 신화와 강한 이미지 뒤에 감춰져 있었던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 연약함, 생동감 있는 욕망에 좀더 접근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밖에 에세이 「회고록」, 「유년시절에 대한 회상」등이 실려 있어 어머니이자 여성, 그리고 예술가였던 그녀의 진면목을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 목차
추천의 글
캐테 콜비츠의 그림
- 8개의소묘 해설 : 귄터 팀
캐테 콜비츠의 일기
- 한스 콜비츠의 서문
-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 부모와 형제
- 사랑과 결혼
- 어머니와 할머니로서의 캐테 콜비츠
-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 미술, 역사, 문학에 대하여
-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 경고비
-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 추구와 의문
- 감정의 기복
- 마지막 시절 : 유타 본케
연보

○ 저자소개 : 캐테 콜비츠
독일 화가·조각가.
베를린과 뮌헨에서 수학하고, 러시아 및 북유럽 근대문학을 좋아하였다.
1891년 베를린의 노동자거리에서 일하는 의사인 K.콜비츠와 결혼하여 베를린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유화를 그리다가 뒤에 에칭·석판화·목판화 등의 제작을 시작하였다.
표현주의적으로 M.클링거와 E.뭉크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가난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직공들의 반란》(1895 ∼ 1898), 《농민전쟁》(1902 ∼ 1908), 《전쟁》(1922 ∼ 1923), 《프롤레타리아트》(1925), 《죽음》 (1934∼1935) 등 비극적 · 사회주의적 테마의 연작을 발표하여 20세기 독일의 대표적 판화가가 되었다.
– 역자 : 전옥례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덕성여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출판학을 공부했다.
보쿰 대학에서 미술사와 독문학을 전공하여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쳤다.
옮긴 책으로는 <여자로 살기 여성으로 말하기>, <시튼 동물기>, <지혜로운 사람 요하네스>, <수다의 매력>, <마법의 책>, <데스데모나, 당신이 말을했더라면>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캐테 콜비츠를 흔히 ‘동정심이 많은 위대한 여성’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동정도 인간으로서 느끼는 자신의 심연과 슬픔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다만 피상적인 것에 머물고 말았을 것입니다.
콘라드 페르디난트 마이어는 ‘자신이 짊어져야 했던 짐’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특별히 머리를 짜내어 써낸 책이 아니다. 그저 모순투성이인 한 인간이었을 뿐.” — p.111

○ 출판사 서평
- 나의 예술은 아틀리에가 아니라 삶에서 나온다
1867년 7월 8일에 프로이센의 쾨닉스베르크에서 태어난 콜비츠는 자유주의 전통의 중산층 집안에서 자라났다. 외할아버지는 진보적인 목사였고, 아버지는 법관 대신에 미장이가 된 독특한 이력의 사회주의자였다. 이처럼 도덕적, 종교적, 정신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가풍은 그녀의 가치관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콜비츠는 1881년 (14세)부터 미술 수업을 받기 시작했으며 베를린 여자예술학교 등에서 유화를 공부했다. 그런 그녀가 그래픽 아티스트가 되기로 결심한 까닭은 소묘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으며, 복제가 가능한 판화는 널리 공유될 수 있다는 주장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1891년 (24세)에 의료보험조합의 의사인 칼 콜비츠와 결혼했으며, 무료로 가난한 노동자들을 진료하는 남편을 도우면서 판화 작업에 몰두한다. 가난과 질병, 실직과 매춘이라는 참혹한 현실을 목도하게 된 후 자신의 작품이 환기구이자 통로,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의무감을 가지게 된다. 1893년부터 <직조공 봉기> 작업에 몰두했는데, 이 연작은 대베를린예술전에 출품되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면서 금메달 수여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을 ‘쓰레기 같은 예술’이라 혹평한 황제 빌헬름 2세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사회적 이슈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게 된 그녀는 이후 모교인 베를린 여자예술학교에서의 강의, 유명한 주간지 <짐플리치시무스>의 삽화를 비롯한 수많은 소묘•판화 작업, 빌라 로마나 상을 수여하는 등 명실상부한 전성기를 맞이한다. 1908년에 완성한 <농민전쟁> 연작은 짐승처럼 혹사당하는 농민, 능욕당한 여성, 농민들의 봉기, 학살과 체포로 끝을 맺지만 그들의 당당하고 억센 눈빛에서 강렬한 희망을 느끼게 한다.
- 씨앗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던 그녀에게 충격적인 비보가 날아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4년 10월, 둘째 아들 페터가 18세의 나이로 전사한 것이다. 아들의 죽음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으며, 반전 포스터와 기념비를 제작하는 등 전쟁의 광기와 참혹함을 알리는 대열에 적극 동참하게 된다. 1919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프로이센 예술아카데미의 회원이자 교수로 임명되었다.
1933년 나치의 히틀러가 집권한 후, 예술아카데미 탈퇴를 강요받았으며 작품은 철거되고 개인 전시회는 금지되었다. 경제적인 곤궁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과의 소통 통로마저 차단된 것이다. 대신 나치는 그녀의 작품을 ‘퇴폐미술전’에 전시하여 비웃음과 조롱거리로 삼는다. 이후 가택 수색, 게슈타포의 신문, 강제수용소로 이송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외로운 말년을 보낸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에 남편이 사망하고, 1942년 손자 페터가 러시아에서 전사한다. 노환과 비탄 속에서도 진보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담고 있는, 마지막 석판화 <씨앗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를 완성한다. 다음해에 폭격으로 집이 파괴되면서 상당수의 작품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1945년 4월 22일에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로부터 8일 후 히틀러는 자살하고, 7일 후 나치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 예민하고 음울했던 한 여인의 내밀한 기록
자애롭고 강인한 어머니로서의 콜비츠. 기실 이는 그녀의 수많은 페르소나 중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여느 예술가처럼 그녀도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으며, 천성적으로 예민하고 우울한 기질이 강했다. 갓난아기 남동생의 죽음이 그리스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놀이를 한 자신 때문이라는 정신적 압박에 사로잡혔으며 성인이 될 때까지 밤에 대한 공포, 사물이 작아지는 악몽들, 공기가 없는 상태에 있거나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막연한 느낌에 시달렸다.
초기에 노동자와 하층민들을 즐겨 그린 것도 ‘쩨쩨한’ 시민계급과 달리 그들이 아름답기 때문이며,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었다.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어머니를 돌보면서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 노환으로 맑은 정신을 잃어가는 어머니에게 안쓰러움과 강렬한 사랑을 느끼다가도 어머니 때문에 작업을 할 수가 없다고 한탄하는 어쩔 수 없는 예술가였던 것이다. 또한 명성과 존경을 얻은 뒤에도 창작 능력에 대한 끝없는 회의와 의심, 도덕적 용기가 결여되어 있다는 자책에 빠진다. 예술에 대한 강박적인 열망과 집착,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가 이내 휴전 상태로 젖어드는 극심한 감정의 기복은 그녀 역시 창작의 고통과 열등감 때문에 평생을 자살하기 직전의 절망 속에 살아가는 예술가였음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나약하고 불안정한,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이 여인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과 동일시하는 예민한 감수성과 인류애를 가지고 있었다. 체념과 절망이 내면을 잠식해 들어가는 순간에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우리 안의 도덕성, 인류애에 절박하게 호소하는 작품을 만들고자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녀의 일기는 고투를 벌이는 한 인간의 연약한 모습과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려는 투지에서 아름다움과 힘을 느끼게 한다.
“스케치하면서 아이들이 느꼈을 두려움 때문에 나도 울었다. 그때 내가 지고 있는 짐을 진심으로 느꼈다. 그들을 대변해 주는 사람이 되는 게 내 임무다, 나는 거기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건 끝나지 않을 일이다. 이제는 태산 같은 사람들의 고통을 입 밖에 내어야 한다. 그게 내가 맡은 임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해내는 건 정말 쉽지 않다. 흔히들 일을 하면서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이 포스터를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빈에서는 날마다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간다면, 과연 일이 내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전쟁에 관한 그림을 그릴 때, 전쟁이 계속해서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데도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단연코.” -본문 중에서
- 몸으로 근심하고, 몸으로 우는 어머니
‘조국이 나를 필요로 해요!’라며 아들은 전쟁에 자원 입대를 했고 콜비츠는 아들의 간곡한 청을 만류하지 못했다. 그리고 두 달 뒤 아들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아들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애국’과 ‘이념’이라는 ‘끔찍한 사기’에 속아 꽃다운 목숨을 잃었다. 그녀는 뒤늦게 속았다는 한탄으로 가슴을 쥐어뜯는다. 아들을 설득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 심장이 부서지는 것 같은 그리움, 아들의 부재를 상기시키는 환영이 시시때때로 찾아든다. 그러나 그녀는 비탄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었다.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은 그렇다면 속은 게 아닐까? 전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청춘이 가진 희생하려는 마음을 이용한 게 아닌가? 책임을 지는 자들은 어디 있는가? 과연 그런 사람이 있기나 한가? 모두 속은 사람뿐이지 않은가? 그 모든 게 대중의 망상에 지나지 않은 건가? 언제, 어떻게 해야 이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본문 중에서
망상에 사로잡힌 대중들을 일깨우는 것, 희생당한 젊은 청춘들을 기념하는 것, 그리고 더 이상 무의미한 희생이 늘어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씨앗을 끝까지 발아시킬 임무’가 있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책무였다.
이렇듯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그녀의 의도를 프로파간다라고 섣불리 단정지을 수 없는 이유는 ‘세계 미술사상 처음으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로서 전쟁화를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절망으로 힘없이 내려간 손, 음식을 갈망하는 아이들의 두 손과 눈빛 등 몸짓 하나하나에서 분노, 슬픔, 절망, 굶주림을 강렬하게 표현해냈다. 그것은 끔찍한 세태 고발, 시각적 충격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세상에 퍼져 있는 증오에 증오로 화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은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동참하게 하며, 아무리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은 잃지 않았다.
콜비츠가 살았던 시대처럼 여전히 세계 전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전쟁, 기아, 폭력, 증오로 가득한 세상에서 예술 혹은 문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술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 라는 낡은 그러나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아직도 그녀의 작품은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서 부끄러움을 끌어올린다.

○ 추천평
- 진보적 미술의 어머니, 캐테 콜비츠
아직도 많은 미술인들과 미술애호가들에게 콜비츠는 살아있는 존재다.
탄생 140년을 눈앞에 둔 오늘도 콜비츠 없이 서양미술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건 아직도 억압과 소외와 부익부 빈익빈으로 갈등이 깊어가는 현실세계의 더딘 진보와 무관하지 않다.
어둠 속 별자리처럼 아름다운 콜비츠 미술의 생명력과 신비는 어떻게 시작한 것일까?
역사와 현실 앞에 정직했던 한 예술가가 생애를 통틀어 이루어낼 수 있는 예술적 성취가 어떠한 것인지 알고 싶다면 콜비츠를 보시라 하고 싶다.
<직조공의 봉기>, <농민전쟁>, <전쟁>, <프롤레타리아>, <죽음> 등의 연작을 통해 전쟁, 봉기, 죽음, 노동, 빈곤, 슬픔조차 인간의 아름다움을 캐낼 비옥한 토양임을 보여준 그녀는, 미술적 교태와 치장이 예술적 감동의 전부가 아님을 온 생애를 바쳐 통렬하게 확인시켜 왔다.
누군가 물을지도 모른다. 세계경제, 사이버 정보시대에도 콜비츠는 유효한가? 빈곤과 차별과 억압이 있는 한, 인간성 해체를 강요하는 부당한 권력이 존재하는 한 콜비츠는 유효하다. 가난하고 소외된 인간집단은 여전히 어둡고 허탈하고 외롭기도 한 내면과 직면해 살아야 하고 권력과 자본은 가난과 억압의 아픔과 슬픔을 모른 체한다.
전쟁, 가난, 학살 위에 소비, 탕진, 자기분열을 더해가는 21세기를 살면서, 사회의 껍데기가 현란하고 사치스러워져 가는 우리 사회에서 만나는 콜비츠는 이제 좀 낡고 단조로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콜비츠의 작품에는 땀의 노동과 결의의 전투 끝에 풍기는 단내가 여전하다. 아직 현실인 것이다.
콜비츠를 만나면 든든한 어머니의 가슴이 느껴진다. 콜비츠의 일기첩은 그녀가 어떻게 무슨 생각을 하면서 누구와 어울려 살았는지 알게 한다. 그녀를 계급적 관점에 빠진 편협한 화가로 치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콜비츠 스스로 나는 프롤레타리아밖에 모르는 편협한 존재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콜비츠가 여태 유효하기 어려웠을 터이다. 콜비츠 미술의 긴 생명력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연민, 폭력과 착취에 맞선 저항 위에,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자기 성찰을 더한 데서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동시대의 탁월한 조각가인 바를라흐는 <퀴스트로프> 대성당의 <천사상>을 만들면서 콜비츠의 얼굴로 천사의 얼굴을 삼았다. 소외되고 억압받는 대중의 편에 서서 그림으로 싸워온 콜비츠의 생애에 바치는 아름다운 헌사가 아닌가 한다. 콜비츠의 일기첩은 대중을 향해 뜨거운 사랑을 전하던 천사 콜비츠의 비망록이다. -이철수(목판화가)
- 캐테 콜비츠에 대한 평가
“캐테 콜비츠의 작품은 현대 독일이 소유한 가장 위대한 시로서 가난에 찌든 자들과 민중의 고통과 슬픔을 밝게 비쳐주고 있다. 남성적인 기개를 지닌 그녀는 진실하고 자상한 연민의 눈초리로 마치 자비스러운 어머니처럼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팔 안에 포옹하고 있다. 그 모습은 바로 희생된 이들의 함성과 흡사했다.” -로망 롤랑 (프랑스 소설가, 극작가)
“캐테 콜비츠의 ‘피에타’ 앞에 서면 누구라도 절로 고개를 숙이고 만다. 나, 나는 무슨 잘못을 얼마나 하였나.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떳떳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나는 잘 살고 있는가!” -함정임 (소설가)
“보면 볼수록 점점 우리의 심금을 휘어잡고 흔들어대는 힘을 느끼게 한다.” -루쉰 (중국 소설가)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