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14)
지금은 절개를 구할 때: 호세아서<14>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우상에게 절하는 이스라엘을 남편에 대한 절개를 지키지 않는 아내에 비유하여 설교한다. 이러한 ‘설교’를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예언 (prophecy)’이라고 한다. 동시에 선지자는 이 ‘예언’에 ‘훈계 (지혜 wisdom로 이스라엘을 교도함)’를 담는다. 즉, 그는 정절을 버린 여인인 이스라엘에 대해 말씀을 전할 때 그 이스라엘을 ‘지혜나 지식이 없는 백성’의 측면에서 또한 언급하는 것이다. 호세아서의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이렇게 설교 (예언)에 ‘지혜 언설’ (admonition)을 결합하는 점이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호세아서를 읽을 때 우리는 이따금 ‘내가 지금 잠언을 읽고 있나?’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곧 호세아서에는 지혜의 책인 잠언에서나 보일 표현들, 예를 들어, ‘지혜’, ‘지식’, ‘알다’, ‘깨닫다’, ‘징책’, ‘견책’ 등의 단어들이 너무나 빈번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현창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호세아서에는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한다. “안다” (‘야다’), “지식” (‘다아트’) 모두 같은 어근 (야다)의 말이다. “안다”가 15번 (2:8, 20; 5:3, 4; 6:3, 3; 7:9, 9; 8:2, 4; 9:7; 11:3; 13:4, 5; 14:9), “지식”이 4번 나온다 (4:1, 6, 6; 6:6). 도합 19번 나오는 이 단어는 호세아에서 가장 흔한 단어이다. (선지서 주해 연구, 125)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선지자의 예언과 지혜는 사실 서로 동떨어진 장르들이다. 그러면 어떻게 예언이 지혜 장르로 연결되어 혹은 호환되어 언급될 수 있단 말인가. 이 두 장르에 어떤 공통분모가 있길래 이렇게 저렇게 넘나들 수 있는 것인가.
거개 자유주의자들은 이 두 장르를 첨예하게 분리하여 구약 종교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기를 고집하는 반면, 이 두 장르는 사실 같은 뿌리에 기초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뿌리는 바로 ‘언약’ (혹은 계약; ‘베리트’)이다.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의 구원으로 애굽에서 나와 호렙에서의 언약으로 인해 그분과 특별한 관계성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상천하지에 그들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고 오직 야웨께서 그들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고 (인정하고) 그분만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실제 역사 속에서 그들로 체험을 통해 이를 알리시고 또한 이를 요구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참되신 속성들이 반영된 언약 조항들 곧 토라를 순종하여 이스라엘이 복 받기를 원하셨다. 이러한 구원주 하나님-그분과의 언약 관계성 속에 들어감- 그 언약을 순종하여 복을 받음의 도식을 ‘아는 것’은 곧 그분께 ‘정조를 지키는 일’이었던 것이다. 모세는 이런 취지에서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신 4:6, 7)라고 한 것이다. 모세도 시내산 언약을 모압 들판에서 갱신하면서 언약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벌써 그의 설교 (예언)에 지혜를 결합시켰던 것이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신 8:5-6) ‘징계’나 ‘경외’는 모두 지혜 장르의 상용어들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역사’까지를 합해 말한다면 구약은 역사와 예언과 지혜가 하나의 뿌리인 언약에 함께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따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라는 호세아의 메시지를 좀더 생각해 보자.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야웨께서 자기들을 세상 나라 (애굽)에서 구원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잊었다는 말이다. 그들이 특별한 언약 관계성 속에 있는 것을 망각했다는 말이다. 그 참되고 인애로우신 구주의 속성을 따라 주신 교훈 (토라)을 버렸다는 말이다. 단순한 지식으로가 아니라 (김희보, 구약 호세아 주해, 93) 인격적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이 주님이심을 알아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그러한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니 마귀 우상을 좇아 음란을 행하며 외세 (앗수르)에 손을 벌리고 십계명을 어기는 등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는 말이다. 로버트 치즈홀름은 말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구절은 여기서 야웨께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맺으신 계약 관계의 맥락 안에서 그의 권세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을 가리킨다…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이 야웨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았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계약의 핵심인 십계명을 포함하는 계약법을 노골적으로 위반했기 때문이다. (예언서개론, 524)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이 언약 관계성을 떠났기에, 그리고 이 언약의 표명인 계명을 무시했기에, 그들이 지혜도 지식도 없게 되었고 야웨의 날에 견책을 받아 망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이렇다. 먼저 이스라엘은 거짓된 바알 이야기에 속는다. 그들은 바알이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을 준다는 말에 속는다 (호 2:5). 바로 야웨께서 그들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었건만 그들은 알지 못한다 (‘로 야데아’ 2:8). 그들에게 음란의 영이 역사하자 그들은 미혹되어 (4:12; 5:4)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린다 (4:13).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다아트 엘로힘’)이 없고, 또 적극적으로 그 지식 (정관사가 붙어있음)을 버린다 (‘아타 하다아트 마아쓰타’ 4:6). 깨닫지 못하고 (‘로 야빈’ 4:14) 남자들이 창녀들 (‘하조노트’, ‘하케데쇼트’)과 함께 희생을 드린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어리석은 비둘기 (‘요나 포타’) 같이 속 없이 (지혜 없이; ‘엔 렙’ without heart) 애굽과 앗수르에 손을 벌린다 (7:11). 그들의 힘이 그 이방인들에게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로 야다’), 백발이 얼룩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한다 (‘로 야다’ 7:9). 결국 그들이 야웨와의 언약 (‘베리트’)을 어기고 율법 (‘토라’)을 범함으로 (6:7; 8:1) 야웨께서는 견책하는 날에 (‘베 욤 토케하’ 5:9) 그들을 징계하신다 (‘바아니 무싸르 레쿨람’ 5:2; ‘아예시렘’ 7:12). 야웨께서는 그들을 버리시고 (4:6), 지혜 없는 자식 (‘후 벤 로 하캄’ 13:13)인 그들은 패망하게 된다 (4:14).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미 하캄 베야벤 엘레 나본 베예다엠’)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 (14:9)
이러한 일련의 언어적 표현들의 순서를 다음의 잠언의 내용 전개와 비교해 보라. (1) 음녀가 젊은이를 거짓말로 유혹한다. “내가 집에서 화목제를 드렸는데 오늘에서야 내 서원을 이루었답니다. 그래서 당신을 맞으려고 나왔고 그토록 당신의 얼굴을 찾다가 이제야 만났네요! 내가 침대를 이집트의 무늬 넣은 천으로 씌워놓았고 또 몰약과 알로에와 계피 향을 뿌려 놓았지요. 와서 우리 아침까지 깊은 사랑을 나눠요. 우리가 서로 사랑을 즐겨요! 남편은 멀리 여행을 떠나서 집에 없고 돈지갑을 두둑히 채워 가지고 갔으니 보름이 돼야 집에 올 거예요.” (우리말성경, 잠 7:14-20) (2) 젊은이가 ‘소가 도살장으로 가는 것 같이 바보 (미련한 자; ‘에빌’)가 족쇄에 매이러 가는 것 같’이 ‘단번에 그 여자를 따라간’다 (7:22) (3) 젊은이가 하는 짓은 “…새가 자기 목숨이 걸린 줄도 모르고 (‘로 야다’) 덫으로 날아드는 것 같다 (7:23).” 4) “그 여자로 인해 죽임당한 힘센 남자들이 참으로 많다 (7:26b). 그 여자의 집은 지옥으로 가는 길이니 죽음의 방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7:27).” 5) “그러니 내 자녀들아,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라.” (7:24) “지혜 (‘호크마’)에게 ‘너는 내 누이’라고 말하고 통찰력 (‘비나’)을 ‘내 친구’라고 불러라 (7:4).”
선지서들을 보면 여기 저기 지혜 언어들이 스며 들어 있다. 하나님 앞에 토라를 순종하는 것은 곧 지혜로운 삶이요 이 삶의 밑바닥에는 야웨 경외 사상이 놓여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구원 행위와 피로써 맺은바 된 언약으로부터 선지자의 지혜 권면도 나오고, 지혜자의 예언도 나오는 것이다. 선지자의 말 속에 있는 지혜 언설을, 혹은 지혜자의 말 속에 있는 예언 강론을 종교사학자들처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여 기가 막힌 새로운 종교를 구성하지 않아도 언약의 뿌리에서 역사, 예언, 지혜 등 다양한 줄기들을 뻗으심으로 시작하신 구원을 이루어 가시고 또 그것을 끝까지 이루어가려 하시는 야웨 하나님의 심장과 숨결을 우리는 충분히 지각할 수 있지 않은가.
오늘 우리는 호세아 예언을 읽으며 동시에 지혜자의 빛 된 충고를 듣는다. 호세아는 음행을 하는 한국 교회를 선지자의 설교로 치기도 하고 지혜자의 회초리로 견책하기도 한다. 오, 주님! 어리석은 비둘기 같은 제가 속히 무지를 벗어나게 하옵소서! “내가…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 2:19-20),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8:2),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14:8). 이러한 당신의 약속의 말씀은 얼마나 귀한지요! 제가 그것을 깊이 깨닫고 소망하도록 도와주시옵서!
최영헌 교수 (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