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26)
지금은 절개를 구할 때: 호세아서<26>
11:12-12:10에서 야곱과 야웨를 대조한 호세아는 12:11-13:4에서 또한번 야곱과 야웨를 대조한다. 전자에서 야곱은 남의 발뒤꿈치를 잡는 사람이다. 의미는 좀 다르겠지만, 우리식으로 말한다면 남 발목 잡는 자라 할 것이다. 반면, 야웨께서는 이러한 옛사람으로 가득한 야곱을 신실히 징계하셔서 바로 잡아 주셨다. 한편, 오늘 12:11-13:4의 초점은 야곱의 인간적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행동과 야웨의 신적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행동의 대조이다. 이 대조법을 한 마디로 줄이면 야곱은 평생 자기가 애착하는 대상 라헬에게 미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천치처럼 눈이 멀어 많은 일을 그르쳤다는 것이고 여호와께서는 그런 야곱, 그런 이스라엘에게도 손을 내밀어 주셔서 영광의 자리, 구원의 자리로 올라오게 하셨다는 것이다! 야곱의 일생은 복잡다단 (複雜多端)하기 짝이 없는 일생이었다. 정열도, 욕심도, 열심도 많았고 슬픔도, 좌절도, 고생도 많았다. 도망을 다녔고, 객지에 오래 있었고, 구름 그림자처럼 떠돌았다. 시 한 수가 생각난다.
맥베스와 야곱, 닮은 꼴의 두 사람
“인생은 걸어가는 그림자, 불쌍한 연기자에 지나지 않는다/ 무대 위로 자기 시간을, 으시대며 활보하다가도 이내 안달초조/ 아, 끝내는 적막 (寂寞)이요 아무 소리도 없구나/ 인생은 천치 (天痴)바보가 지껄인 말, 고함과 분노만 가득하니 무슨 의미가 있나/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사실, 시가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5막 5장에 나오는, 우리 입에도 오르내리는 대사다 (필자의 졸역). 이 독백은 야곱의 약전 (略傳)과 너무도 닮았다. 야곱은 아내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았다. 라헬이 그렇게 이뻤을까, 라헬이 그렇게 맘에 들었을까, 밤에도 낮에도 그녀 때문에 양을 지켰다.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창 31:40) 지냈다. 라헬과 레아를 위해 14년, 양 떼를 위해 6년 봉사했으나 외삼촌 라반은 야곱을 속여 그 품값을 10번이나 바꾸었다 (31:7, 41). 야곱이 가솔을 거느리고 도망을 나왔을 때 라반은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7일길을 추격하여 길르앗 산에 야곱 일행을 만났다. 도망자가 붙잡혔으니,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야곱은 변명을 한다 31:31). 주는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라반아, 조카에게 잘잘못 따지지 마라” (31:24). 라반은 충분히 폭력이라도 휘두를 수 있었지만 하나님 때문에 참는다 (31:29). 다만, 그는 자기 가정 우상을 도둑 맞았기에 야곱 가족의 텐트를 뒤진다. 야곱은 라헬이 도둑질한 줄 몰랐고, 외삼촌이 여기저기 뒤지고도 찾지 못하자 마침내 참았던 화가 폭발하였다. 그동안 고생하면서 외삼촌에게 사기를 당하는 가운데 쌓였던 해묵은 억한 심정이 분출한다. 이것이 고함과 삿대질과 원망과 분노와 광포 곧, sound and fury다. 맥베스가 왕위에 오를 야심에 미친 짓들로 자기 일생을 망친 것처럼 사기군 기질의 야곱은 고단수 사기군 라반을 만나 결국 이러한 심각한 충돌을 겪는 것이다. 야곱의 일생을 보라. 분노와 멍든 가슴과 애착과 상실의 슬픔으로 엮여 있다. 사랑한 라헬은 고단수 사기군의 딸이었고, 우상 (드라빔)에 눈 먼 여자였고, 자기도 언니 레아처럼 아기를 낳게 해달라고 남편을 들들 볶은 여자였다. 사랑한 만큼 먼저 갔고 야곱의 가슴은 멍이 들었다. 그녀가 낳은 자식 요셉을 편애함으로 가정에는 풍파가 일었고, 그 자식의 피 묻은 옷을 움켜잡고 또 깊은 상심 가운데 눈물로 밤을 지새운 사람이 야곱이었다. 살기등등한 라반에게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살기등등한 에서의 마음을 하나님이 누그러뜨리지 않으셨다면, 딸의 강간 사건으로 초죽음이 된 마음을 하나님이 다시 붙잡아주지 않으셨다면, 죽은 줄만 알았던 요셉을 다시 상면토록 하신 하나님의 자애를 맛보지 못했다면, 그의 일생은 그 야심에 함몰한 맥베스의 비극적이고도 허무한 인생과 별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라헬, 야곱의 애착대상/ 우상, 이스라엘의 집착대상
호세아 선지자가 야곱의 이러한 인간적 애착을 끌어오는 것은 그가 현재 목도하는 이스라엘의 삶의 꼴이 그 모양이기 때문이었다. 우상과 그 우상이 주는 복에 온통 마음이 쏠려 있는 이스라엘, 호세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쌓은 제단들이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들 같다 (12:11)고 증언한다. 나라가 온통 우상들로 가득하였다. 나라가 온통 음란한 바알에게 미쳐 있었다. 이스라엘의 유일한 애착은 우상들에게 향해 있었다. 그들은 대대로 우상들에게 집착하였다. 야웨께서는 이로 인한 분노를 더이상 참기 어려우셨다. 이스라엘 삶 속에 피비린내와 멍든 가슴과 깊은 좌절들은 바로 이 분노의 반영이었다. 이 점에서 호세아 12:11-13:4은 시편 90편의 문맥을 따른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5-10) 불쌍한 연기자들이 뻐시기며 걷다가도 초조와 슬픔으로 안달하고 정욕과 야심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그의 분노에 풀처럼 하루 아침에 시들어 인생을 마감한다. 야곱의 일생이 수고와 슬픔 뿐이요, 북이스라엘의 역사가 멸망과 포로로 끝났다. 열왕기 기자는 북이스라엘이 왜 망했는지 정확히 진단한다 (왕하 17장).
야곱의 애착 vs. 하나님의 사랑
그러나 야곱의 일생이 그것뿐이라면,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뿐이라면,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소망할 사실은, 그런 버리지 같은 야곱도, 희망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 (사 41:14)도 야웨께서 거두셨다는 것이다. 야웨께서는 그들 속에 개입하셔서 도와주셨다 (사 41:10, 13, 14). 야곱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신실함은 히브리 본문을 볼 때 확실하게 드러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야곱의 옛 사람의 삶을 같은 단어로 묘사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단들을 쌓은 것이 밭이랑에 쌓은 돌무더기 같다고 묘사되었는데 여기서 밭은 히브리어로 ‘사데’이다. 그런데 야곱이 도망간 장소를 표현할 때도 아람 (곧 시리아) 들판, 즉 여기서 들판에 해당하는 단어가 ‘사데’이다. 호세아는 이러한 같은 단어의 사용을 통해 야곱과 이스라엘의 잘못된 삶을 서로 오버랩시킨다. 이 기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2절 하반절을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직역하면,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내 얻기 위하여 봉사했고 아내 얻기 위하여 지켰다”라고 할 때 ‘지켰다’는 것은 ‘양을 지켰다’는 것인데 호세아가 사용한 단어는 ‘솨마르’라는 동사다. 그런데 13절 하반절에 “선지자로 저를 보호하셨거늘”이라는 개역개정의 번역은 사실은 수동태를 능동태로 번역한 것이다. 이를 직역하면, “그 (이스라엘)가 지켜졌다”가 된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가 또 ‘솨마르’이다. 즉, 야곱은 양을 ‘지켰고’, 야웨는 이스라엘이 선지자로 ‘지킴을 받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한글 번역으로는 이와 같은 같은 단어 사용으로 무언가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언어의 한계다.
한편, 한글번역으로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야곱의 인생의 포커스와 하나님의 주안점이다. 야곱의 인생 포커스를 말할 때는 ‘아내 얻기 위하여 (베잇솨)’가 두번 반복 (12절)되는 반면, 하나님의 주안점을 언급할 때는 ‘선지자로 (베나비)’가 두번 반복 (13절)된다. 물론 여기서도 똑같은 전치사 ‘베’를 한 편으로는 야곱과 관련하여, 그리고 다른 편으로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도 한글 번역으로는 모름). 다만 한글 번역 상으로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특정 단어의 두 번 반복을 통해 나타나는 야곱의 집착과 그런 야곱을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조라는 것이다. 야곱의 삶의 전부는 드라빔 도적질하는 라헬이었고 야웨의 목적은 그 야곱에게 그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시되 야곱 자신으로는 그 삶에서 나올 수 없기에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를 건져내는 것이었다. 14절의 직역은, “그러나 선지자로 야웨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올라오게 하셨고, 선지자로 그는 지킴을 받았다.” 이 문장에서 ‘선지자로’가 두 번 다 맨처음에 나와 강조되었다. 물론 여기서 선지자는 모세를 말하며, 물론 모세는 오실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주님의 징계= 우리의 복
야곱은 라헬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자기가 사랑한 여자 때문에 20년도, 30년도 봉사할 수 있다. 40년도, 50년도 그 여자 때문에 양떼를 지키고 양털을 깎고 양똥을 만질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사랑도, 어떠한 봉사도, 어떠한 몰두도, 어떠한 열심도, 하나님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이 첫째가 아니고는 아무 소용이 없다. 야곱은, 이스라엘은, 우리는, 나는 이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내 눈이 보기에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도 예수님 없이는 허무한 것이다. 그것은 우상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 야곱의 후예인 우리에게는 야웨의 신실한 징계가 필요하다. ‘그것’을 데려가시기도 하시고, ‘그것’ 때문에 나를 아프게도 하시고, ‘그것’ 때문에 십수년 눈물로 지새게도 하신다. 그러나 ‘이것’을 알게 되고 ‘이것’을 얻게 되면 나는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94: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