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41)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 아모스서<3>
쓰나미 (tsunami)
‘쓰나미’ (津波)는 일본말인데 무슨 뜻일까? ‘tsu’는 ‘항구’를 ‘nami’는 ‘파도’를 뜻한다고 한다. 이는 1896년 일본 산리쿠 연안의 쓰나미 때 생긴 말인데, 우리말로는 통상 ‘지진해일’ (地震海溢)이라고 부른다. 바닷속의 지진, 화산분출, 산사태나 낙석으로 쓰나미가 발생한다. 해저에 지진이 나면 해저면의 일부분이 올라가거나 내려간다. 중력 때문에 해일이 일어난다. 파도는 해안으로 가면서 점점 높아진다. 2004년 기준으로 1000건이 넘는 지진해일이 일어나 약 50만명이 죽었다 (Tsunami Teacher, 위정심 김세진 역, 국립기상연구소). 2011년 일본 북동부의 강도 9의 지진으로는 원전사고가 났고, 23만명이 집을 잃은 신세가 되었다.
쓰나미 외에 아모스가 ‘본 것들’
주전 8세기의 선지자 아모스는 하나님이 보여주심으로 여러 가지 특이한 것들을 보았다. 아모스는 바닷물이 지면에 쏟아지는 것 (5:8; 9:6)을 보았다. 구약 예언서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는 ‘하존’ (비젼, 환상, 이상 異像: 예. 사 1:1)이고, 신약의 계시록의 표현을 따르자면 ‘아포칼륍시스’ (계시, 묵시 默示: 예. 계 1:1)다. 현재 한 신약 이스라엘어 번역본 계시록 1장 1절은 아포칼륍시스를 ‘하존’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하베리트 하하다솨, Hope of Israel Publications, 2009, 508) 필자는 맞는 번역으로 본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아포칼륍시스’는 요한이 ‘본 saw’ 것 (1:2)이라고 재차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 예언서들에 보이는 선지자들의 ‘비젼’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이 아포칼륍시스를 장르비평을 따라 세속의 묵시문학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임이 분명하다 (후술). 아모스에는 여러 비젼 혹은 묵시들이 보이는데 그 중에는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은 것 (7:2),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함 (7:4),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심 (7:7), 여름 과일 한 광주리를 봄 (히브리어로 ‘여름 과일’과 ‘끝’의 음이 같음, 8:1) 등이 있다. 이외에도 온 땅이 강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짐 (8:8; 9:5), 해가 대낮에 지며 백주에 땅이 캄캄하게 됨 (8:9) 등이 보인다. 또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일으켜짐 (9:11), 그들 (누구인지 명시되지 않음)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됨 (9:12) 등도 보인다.
예언과 묵시의 관계
예언서의 내용 전개를 보면 먼저 선지자가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을 시내산 언약 조항에 비추어 설교를 한다. 이 설교는 가까운 미래의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로 이어진다. 이는 보통 이스라엘의 포로와 그 회복으로 이어지고 내용은 시간적으로 메시야의 초재림과 세상 끝날 까지의 일들을 예언하면서 마감한다. 이때 세상 끝날의 일들은 묵시 (비젼) 표현들로 제시된다.
유의하여야 할 사실은, 구약성경의 묵시적 표현이 먼저 있었고, 이를 모방한 세속의 묵시문학은 나중에 생긴 것이라는 사실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거꾸로 성경이 묵시문학을 모방한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이사야의 묵시가 기원전 8세기에, 에스겔과 다니엘과 (요엘)의 묵시가 기원전 6세기에 이미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대 묵시문학은 주전 200년에서 주후 100년 사이에 가서야 비로소 나타난 것들이다. 여기에 포함되는 작품들로서는 에녹 1서, 에녹 2서, 바룩 2서, 바룩 3서, 에스라 4서, 아브라함 묵시록, 아브라함 유언, 레위의 유언 2-5서 등이 있다 (Aune, 계시록, 105). 이것들은 세속 작가들이 성경의 잘 알려진 인물을 빌어 쓴 글들이다. 쉽게 말해 정체 불명의 위서 (僞書)들인 것이다. 이 위서들의 특징은 태초의 사건, 이원론적 역사관, 영계 여행, 종말의 천체 격변, 내세의 모습들, 부활 등을 다룬다는 점이다. 요한 계시록은 이와 같이 구약의 전통에 이어진 것이나, 자유주의자들은 묵시문학 작품들이 띄는 특성들이 계시록과 비슷한 점에 착안하여 계시록이 묵시작품들을 모방 혹은 영향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WBC 계시록의 저자 Aune도 예언과 묵시에 대해 바른 견해를 제시하지 못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가 구약에 무지하다고 본다). 요한 계시록은 남의 이름을 도용하여 작성한 문건도 아니고, 고난의 원인을 우주의 세력들에게 돌리지도 않는다. 계시록은 허황된 판타지와 거리가 멀다. 이 책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앞서 있을 고난을 예시하며, 예수님의 재림의 확실성을 알려주어 성도들에게 믿음의 인내와 용기를 촉구한다.
그러면 왜 자유주의자들이 구약의 묵시적 표현들이 세속 묵시작품들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가. 그것은 구약의 묵시 부분들을 후대에 나타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자유주의자들은 선지자들의 설교에 이어져 있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의 진정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일들이 현실화된 시기 (후대)에 그 일들을 기록한 것이지, 이미 먼 과거에 예언된 것으로 보지 못한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성령으로 거듭나지도 못했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것들은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를 들어, 다니엘서의 7-12장 같은 부분은 주전 2세기의 작품으로 본다. 자유주의자들은 다니엘이 주전 6세기의 시점에서, 주전 2세기와 보다 먼 미래의 일 곧 메시야 사건과 재림시에 벌어질 일까지를 내다본 것이 아니라, 주전 2세기에 어떤 사람이 잘 알려진 다니엘 이름을 도용하여 당대일을 미래일처럼 기록했다고 그럴싸하게 설명한다. 주전 8세기의 예언인 이사야서 (특히 미래 예언 내용)를 둠 (Duhm) 같은 자유주의자는 주전 1세기에 가서야 완성된 것으로 우겼다. 세속의 묵시문학과 비슷한 시기로 다니엘서와 이사야서의 저작 연대를 잡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주특기인 것이다. 주전 2세기에 이미 이사야서 전체 내용을 담은 두루마리가 있었음이 쿰란 문서들의 발굴을 통해 확인되자 주전 1세기라던 둠의 주장은 거짓말로 들통나고 말았다.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모두 인정하는 복음적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자유주의자들은 자연적인 것만을 인정 (자연주의 세계관 Die naturalistische Weltanschauung에 기초)하기 때문에 이런 판단을 내린다. 계시록의 저자도 사도 요한이 아니라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사람이 주후 1세기의 로마 황제 치세 하의 환란의 환경 속에서 현재 겪는 일을 미래에 일어날 일처럼 각색했다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계시록을 옛날 우리나라의 ‘홍길동전’이나 ‘전우치전’ 정도로 생각하며 오늘날로 말한다면, ‘해리포터’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아모스가 본 쓰나미의 성취
그러나 아모스가 본 쓰나미는 주전 8세기에 그가 본 것이며 2700년이 지난 지금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가 본 것들 중에 북이스라엘의 멸망 (8:2)이나 메시야의 초림과 이방인들의 구원 (9:11-12; 행 15:15-18)은 이미 이루어졌거나 이루어져가고 있고, 이스라엘의 회복 (9:14-15)은 이루어져가고 있는데 미래에 완성될 일로 아직 남아 있다 (롬 9-11장). 지각의 융기, 해가 어두워짐, 메뚜기 재앙, 불이 큰 바다를 먹음 등은 계시록의 재앙들과 연결시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미 인도양 쓰나미 (2004)로 23만이 죽었고, 칠레 (1960, 2010, 2015)에도, 일본 ( 1896, 2011)에도, 태평양 연안 각지에도 ‘바닷물이 지면에 쏟아’지는데 사람들은 안일하여 마냥 예언과 묵시를 무시하고 있다.
쓰나미 묵시를 웃어넘기는 자들
묵시와 예언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지금 너무도 많다.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다. 그들은 성경을 믿지 않는다.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 (마 22:29)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교회에서 목회를 한다고 강대상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 아닌가. 부활을 부정하는 불트만과 바르트 (Church Dogmatics vol. 4, Eng. 1961, 334-6)의 영전에 날마다 분향하는 자들이 신학자입네 하고 선지 생도들에게 다른 영을 주입하고 있으니 누가 선지자 아모스의 ‘쓰나미’ 묵시가 오늘 응한다 하겠는가. 누가 사도 요한의 묵시를 골똘히 살피며 예수님의 재림을 앙모하겠는가!
최영헌 교수(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