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51)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요나서(3)
요나의 감사의 노래
궁켈의 양식연구 (Gattungsforschung)에 의하면 요나 2:3-10은 개인 감사 노래다. 궁켈은 이 유형에 시 13; 30; 32; 34; 40:2-12; 41; 66; 92; (100); (107); 116; 118; 138; 사 38:10-20; 욥 33:26-28 등이 속한다고 하였다. 감사는 탄식시의 끝부분에 오는 경우가 많은데 히브리어로 ‘토다’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며 이 개인감사의 노래가 불리운 원래 삶의 자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릴 때인 것이 확실하다고 하였다. 즉, 이스라엘 사람은 감사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제 (희생제사)를 드리며, ‘잔을 들어 올리는 행위’를 하면서 감사를 표현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 것이라 한다. 더불어, 감사의 식사, 축하 행진, 빙글빙글 돌며 추는 춤 (圓舞, 메홀라 시 30:11 [히])도 추었을 것으로 궁켈은 추정한다. 그는 이 시의 구조 는 보통, 시인의 곤경, 그의 여호와께 부르짖음, 그리고 그의 곤경에서 놓여남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고, 요나서의 요나의 감사시가 이와 같이 3부분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예라 하였다. 덧붙여 궁켈은 이 시를 쓴 사람은 중병에 걸려 거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사람이든지, 광야에서 길을 잃고 헤메던 사람이든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던 사람이든지, 감옥에 갇혀 모진 세월을 보내던 사람이든지, 극한의 곤경을 겪던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 감사시에 서원기도가 가미된 것은 바로 시인의 극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였다 (Introduction, 199ff). 궁켈의 연구를 훑어보면서, 만약 그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확실한 신앙의 기반에서 신학을 하기만 하였다면 이 천재가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 아쉬움과 탄식을 발할 수밖에 없다.
궁켈의 장르 비평의 결점
한편, 필자는 궁켈의 각 시의 장르에 대한 인사이트를 수긍하면서도 시편 연구에 있어 그가 어떤 유형에 시들을 자리매김함으로 각각의 시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특성들이 일반화되고 말았다고 본다. 사실 1968년 이미 수사비평가인 뮐렌버그도 이 점을 지적하기는 했다. 궁켈이 개인감사의 노래로 인식한 시들 중에는 감사와 찬양이 결합됨으로 이것이 감사시인지 찬양시인지 불분명한 것들도 있고, 감사시로 자리매김한 것 중에는 아주 탄식이 짙게 배어 있는 것도 있고, 감사와 탄식이 거의 반반 들어 있는 것도 있다. 원천적으로 생각되는 것은, 히브리 문학에 있어 궁켈이 말하는 이런 시의 장르들이 실제로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나는 ‘기도-탄식’, ‘징계를 통과한 감사’, ‘찬양’과 같은 큰 카테고리는 존재했을지 모르나, 궁켈이 말하는 메인 카테고리들과 하위 장르들이 모두 실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괴로움의 밑바닥
요나의 시는 그가 당한 곤경, 여호와께 부르짖음, 곤경에서 놓여남 (혹은 놓여남에 대한 기대)의 내용들로 볼 때, 병에 걸렸던 히스기야의 기도 (사 38)나 시 22, 시 118과 아주 비슷하다. 물론 시 50이나 시 116과도 사용한 언어의 표현들이 유사한 데가 많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시들을 징계-감사의 시들로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곤경과 그 곤경에서 놓여남 자체 보다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고생과 생의 처절함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매가 아주 뚜렷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시들에서 시인이 겪고 있는 고통이 자신의 인간적 연약성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악을 저지름으로 나타나는 결과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나와 히스기야의 고백 속에 나타나는 회개를 보라. 불순종과 죄, 연약 이 모든 것이 현재의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의 원인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육신과 영혼의 깊은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만이 이 괴로움에서 건져주실 분이라고 호소하는 것이 이 감사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요나의 시를 읽으며 큰 물고기에게 먹힌 요나가 얼마나 괴로왔을까를 생각해 본다. 요나는 다량의 바닷물을 들이켰을 것이다 (2:3 큰 물이 나를 둘렀고; 2: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물고기 위장에서 분비되는 위액 냄새로 괴로왔을 것이다. 해초가 머리를 감고 (2:5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옷은 젖어 저체온이 되었을 것이다. 고향땅에서는 그렇게도 흔하디 흔한 올리브도 없었다. 물고기 뱃속에서 포도가 있으랴, 무화과가 있으랴. 빵쪼가리 하나 아쉬울 그곳에서 그의 혼은 혼미하고 (2:7 네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그의 수족은 떨리고 그의 심장은 쿡쿡 찔렀을 것이다. 저승의 밑바닥에 떨어진 것 같았을 것이다 (2: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고]…). 누구나 사람들은 살며 고생을 하지만, 그 사람이 당한 고난을 당하지 않은 이상 우리는 그 고통을 진정코 이해할 수는 없다. 마음을 만질 수는 있지만 똑같은 고민과 똑같은 상황을 당하지 않은 이상 깊은 공감은 불가능하다. 한나처럼 애기가 생기지 않아 애기를 낳은 남편의 다른 여자에게서 시시때때로 구박을 받아보라 (삼상 1-2장), 다윗처럼 이국을 떠도는 것도 서러운데 아비멜렉에 발각되어 미친 척 침을 질질 흘리다가 쫓겨난 사람이 되어보라 (시 34), 히스기야처럼 외침 (外侵)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중년에 병까지 걸려 스올에 들어갈 처지가 되어보라 (사 38장).
그리스도의 괴로움
한편,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요나가 스올의 문턱까지 내려간 이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림자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괴로우셨다. 죄 없는 분이 우리 모두의 죄를 지셔야 하니 더 괴로우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한없이 큰 괴로움을 겪는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아주 작은 아픔들을 겪으며 그분의 남은 괴로움을 채운다 (골 1:24).
최영헌 교수(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yunghun.choi@ac.edu.a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