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52)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요나서(4)
요나의 큰 물고기 사건의 신약 인용
요나의 큰 물고기 사건은 마태복음에서는 12:38-45의 문맥에 포함되어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11:29-32의 본문 속에 들어 있다. 마태와 누가의 기록은 거의 비슷하지만 두어 가지 다른 점들이 있다. 마태는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로 시작하고, 누가는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로 서두를 놓는다. 마태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기록한다. 누가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라고 전한다. 즉, 마태는 그 세대가 악할 뿐 아니라 음란하다는 것을 덧붙인다.
이러한 차이점들 외에 더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다. 마태는,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고 기록한다. 반면, 누가는,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세대에 그러하리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다. 같은 사건이지만 전하는 내용, 전하는 자의 시각은 아주 다르다. 필자는, 예수님이 이 두 가지 말씀들을 모두 하였으나 마태는 마태대로, 누가는 누가대로 각인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 예수님의 말씀을 선택적으로 인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러면, 마태와 누가, 각각의 의도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요나 사건을 인용하는 마태의 의도
마태와 누가, 각각의 의도를 구별하는 일은 마 12장과 눅 11장의 당해 본문만을 가지고는 쉽지 않다. 마태 전체를 몇 번씩 읽고, 누가 전체를 몇 번씩 읽고 나서야 겨우 이 두 사람의 시각이 다름이 드러난다.
먼저 마태는 요나 사건을, 그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하였다. 이는 많은 학자들이 이미 동의한 바로, 마태가 구약의 사건이나 인물들을 인용하는 것은 구약의 예언의 예수님에게서의 성취를 위함이라는 것이다. 요나 사건의 경우는 요나의 삶 (선지자의 행동)이 곧 하나의 예언으로 취급된 경우라 하겠다. 마 12 본문에 나타나는 내용인즉슨, 요나의 큰 물고기 뱃속에서의 3일간 있던 것이 사람의 아들 예수님에게도 똑같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이다. 물론, 심판 때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라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의 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예수님이 요나 보다 큰 분이라는 말은, 그 모든 구약 구원사의 인물들과 제도들을 부리신 분이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자신 (함마쉬아흐)임을 드러내는 말이다.
마태의 증거는 또한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종교의 부패를 강조하고,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부각한다. 예수님께 표적을 구한 자들은 다름 아닌 ‘서기관과 바리새인’ (마 12:38)이었다. 이렇게 표적을 구한 이야기는 16:1-4에서 또 나타나는데, 그 본문에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표적을 구했고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신다. 누가는 표적을 구한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 명시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곳들에서 누가는 이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해치기 위해 혈안이 된 것, 분기가 가득한 그들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마태는 확실히 이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진노를 줌업시킨다. 그리하여 구원사의 큰 물결이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들을 외면하고 이방인들(니느웨 사람들, 남방 여왕은 이방인들)에게 흘러간다. 누가복음에서는 구원이 온 세상에 퍼짐을 보이는데, 예루살렘에서 모든 족속 (24:27)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마태에게 있어서는 나라의 본 자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고 그 은혜가 이방인에게로 흘러감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요나 사건을 가지고 전달하고자 하는 마태의 주된 의도다.
요나 사건을 인용하는 누가의 의도
한편, 누가복음에서는 마태와는 좀 다른 시각을 우리는 읽게 된다. 누가가 구약 예언이 신약의 예수님에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가도 마태와 비슷하게 구약이 신약에 성취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주제에 관한 한, 예언-성취 구도가 예수님 당시의 시간 범위에 나타남을 특히 강조한다. 요나가 큰 물고기에게 먹혔다가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도 죽으시고 살아나실 것이다 (11:30). 이것을 9:22, 31; 17:25; 18:31-33 등의 구절, 곧 예수님이 곧 죽으시고 살아나실 것이라는 예수님 당대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예언들과 비교해 보라. 그러면, 누가의 취지는 구약 사건이 예수님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하는 마태와 달리, 예수님이 곧 죽으시고 살아나실 것이라는 사실 자체에 더 포커스를 맞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 처럼 아주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둘째로 누가복음에서 저자의 요나 사건 인용의 의도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의 표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가는 예수님의 어떤 기적 사건들 (누가 병고침을 받았다든지, 누구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갔다든지)을 통해 그것들의 표적적인 특성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보다는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의 표적임을 보여주려 한다 (2:12, 34; 11:29, 30). 이 점에서 누가복음의 표적과 요한복음의 표적이 좀 다르다.
셋째로, 누가는 요나의 큰 물고기 사건 (죽음과 부활 상징)이 하나의 표적으로서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의 동인이 된 것을 가지고 예수님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의 표적이 세상 사람들의 회개의 동인이 될 것을 강조한다. 즉 ‘회개’ 주제의 강조인데, 이 회개는 마 12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단어이기에 당해 본문의 비교로서는 누가가 마태에 비해 ‘회개’를 강조했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가복음 전체를 읽어보면 누가가 얼마나 회개를 강조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본 눅 11장의 요나의 전도를 통한 니느웨의 회개도 이런 선상에서 취한 것임이 드러난다. 누가는 회개를 죄의 용서함과 연결시키고 회개를 구원론의 취지에서 자주 언급하는데,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이렇게 누가처럼 빈번히 ‘회개’를 죄 사함 및 구원과 관련하여 언급하지는 않는다.
요나 사건의 기독론적 함의
예수님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이 하나의 표적 (세메이온)이 되고 이 표적을 사도들은 전하게 될 것이다. 사도들이 이 표적을 전하면서, 회개의 케리그마를 외칠 때 사람들은 그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게 될 것이며, 회개한 자들은 죄의 용서함을 받게 될 것이다. 이 회개는 모든 족속에게 퍼질 것이다: 이 일련의 내용들이 눅 24:46-48에 보인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세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여기 보이는 일련의 주제들이 11장의 요나 언급에서도 보인다는 것이다. 눅 11:30을 읽으면, 요나가 여호와의 명을 어기고 배를 타고 도망하다가 바다에 던지워 물고기에게 먹혔다가 3일만에 목숨을 건진 이야기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소문으로 먼저 전해진 것 같다. 그 기적 사건은 하나의 싸인이 되어 죄악에 빠져 있던 니느웨 왕과 신민의 영혼에게 치명타를 가했을 것이다. 요나를 그런 식으로 주관하신 하나님이라면 그들이 그 하나님에 관한 소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선지자 요나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욘 3:4)고 했을 때 그 말은 그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눈앞이 캄캄해지고 가슴이 내려앉아 그들은 부들부들 떨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불순종한 요나를 치셔서 물고기 밥이 되게 하셨던 하나님이 하늘에 사무칠 죄에 탐닉하였던 그들을 그대로 두시겠는가. 그들이 살아나는 길은 회개하는 길 뿐이다!
누가는 오늘 예수님이 요나의 세메이온 같은 하나의 세메이온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죄를 덮어쓰시고 로마의 가장 극악한 형벌을 받으셨다면, 그분이 덮어쓰신 죄의 당사자인 우리가 받을 형벌은 어떻겠는가. 무죄하신 그분이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의탁하나이다 하셨고 아버지께서 그분을 능력으로 살리셨다면 또 우리는 얼마나 아버지께 우리 자신을 의탁하고 그분의 능력을 의지해야 하겠는가. 표적이란 하나님이 의도하신 숨은 의미를 가진 기적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기적의 숨은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기적은 세간의 구설에 잠시 올랐다 사라지는 마술쑈에 불과했을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그런 일인쑈를 기대하고 예수님을 떠보면서 표적을 구했다. 악하고 음란한 얼굴에 눈알을 굴리면서 표적을 구했다. 표적을 주어도 표적의 의미를 모르고 진주에 돼지똥을 바를 것이기 때문에 인자가 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고 하셨다. 사탄의 자녀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만인에게 수치를 받은 한 인간으로 보일 것이고 (슈바이처에게 그렇게 보였다)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의 시행의 표적으로 작용할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죄를 담당하신 그러나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되어 그분의 영원한 생명의 유업의 표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이 될 것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돌이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 눈에 기이한 것이다 (시 118:22-23). 이것이 요나서의 기독론적 함의다. 이것이 또한 동류의 개인 징계-감사의 노래인 시 118의 기독론적 함의다. 요나서를 단편소설이라 하는 자들, 요나의 물고기 사건을 실제 사건이 아닌 비유라고 하는 자들에게 물어보라. 인자의 표적의 진의를 아는지. 요나의 물고기 사건이 진짜가 아니라면, 예수님의 요나 인용도 진짜가 아니요, 예수님의 말씀이 진짜가 아니라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도 진짜가 아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단편소설이요 초대교회의 창작이요 비유라면 우리의 부활도 가짜가 된다.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바르트 같은 사람이 참 선지자일까.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실패한 정신착란의 인생이라고 하는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참 교사일까. 이들은 요나의 표적도 인자의 표적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요나의 표적도 인자의 표적도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면 인자의 육신적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이들이 육신의 부활에 이를 수 있을까.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시 2:4)
최영헌 교수(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yunghun.choi@ac.edu.a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