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55)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미가서 3
선지서의 ‘울음’
선지서에서 ‘울음’은 주로 두 가지와 관련되어 있다. 그 첫째는 ‘회개’요, 그 둘째는 ‘멸망에 대한 슬픔’이다. 회개의 눈물은 죄와 허물에서 돌이키라는 하나님이 명령에 대한 전인적인 돌이킴의 반응이요, 멸망에 대한 슬픔의 눈물은 수치와 좌절과 허망과 절망의 표현이다. 여호와께서는 죄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욜 2:12) 우리는 우리 각자의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을 붙잡고 울며 그분께 간구하고 (호 12:4)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그분을 바라기를” (호 12:6) 원하신다. 반면, 끝까지 회개 없이 우상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재앙을 받아 필연적으로 그 눈에 눈물이 흐르게 되어 있다.
‘울다’라는 표현
보통 ‘울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바카’ (weep, bewail)이다. 이는 미 2:10에 쓰였고, ‘싸파드’ (wail, lament)라는 단어도 있는데 역시 미 2:8에 보인다. 같은 2:8에 ‘얄랄’ (howl, wail)이라는 단어도 눈에 띄인다. 바카는 우리말로 울다로, 싸파드는 애통하다로, 얄랄은 애곡하다로 번역하였다 (개역개정, 미가서). 이는 비슷한 단어들인데 흥미로운 것은 회개할 때도 이 단어들이 쓰이고, 멸망의 상황에서 슬퍼할 때도 이 단어들이 쓰인다는 것이다.
미가서에 보이는 ‘울음’
그렇다면 미가서에 나타난 이 단어들은 둘 중에 어느 의미로 쓰였는가. 회개가 아니라 멸망에 대한 슬픔의 울음으로 미가에는 이 단어들이 쓰인다. 그러면 이 울음의 원인은 무엇인가. 거슬러 올라가면 ‘산당에서의 우상 숭배의 죄’다 (미 1:5-7). 또한, ‘죄악을 획책함, 강탈함, 교만, 말씀을 무시함, 거짓을 예언함’등의 죄다 (2장). 이 죄들 때문에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망하게 될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선지자는 탄식한다.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여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미 1:8,9). 이 ‘울음’이 있을 것에 대한 예언은 이 ‘울음’이 현실화되기 직전 예레미야 선자자의 입술에서도 똑같이 쏟아진다. 예레미야는 곧 있을 ‘울음’을 과거형으로 말한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어찌하여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렘 8:18-9:1) 미가가 하던 말을 예레미야는 어쩌면 이렇게 똑같이 하고 있을까. 둘다 유다의 멸망을 ‘상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운다’는 말을 하며, ‘우상숭배’의 죄를 지적하고 있다.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에스겔을 보라. “밖에는 칼이 있고 안에는 전염병과 기근이 있어서 밭에 있는 자는 칼에 죽을 것이요 성읍에 있는 자는 기근과 전염병에 망할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산 위로 피하여 다 각기 자기 죄악 때문에 골짜기의 비둘기처럼 슬피 울 것이며 모든 손은 피곤하고 모든 무릎은 물과 같이 약할 것이라.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묶을 것이요 두려움이 그들을 덮을 것이요 모든 얼굴에는 수치가 있고 모든 머리는 대머리가 될 것이며…” (겔 8:15-18)
아모스와 이사야에 보이는 ‘울음’
이러한 울음에 대한 예언은 미가서에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미가와 같은 BC 8세기 선지자 아모스에도 보인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5:16, 17) 이사야에도 울음 예언이 보인다.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 친 성읍이여.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내가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사 29:1-2)
‘상처’를 미리 보고 슬퍼하다
유다가 멸망을 당함을 ‘상처’라는 말로 미가가 표현하는데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암 5:19)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너희가 어찌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사 1:5, 6) 호세아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호 5:12-14) 이들로부터 1세기 후에 예레미야는 이렇게 표현한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렘 8:21-22) 에스겔은 이렇게 표현한다. “밖에는 칼이 있고 안에는 전염병과 기근이 있어서…모든 손은 피곤하고 모든 무릎은 물과 같이 약할 것이라” (겔 8:15-17) 죄로 인한 멸망은 인간의 신체가 해를 당해 상하게 됨으로 한결같이 표현되었으되 다 똑같지는 않고 다양하게 되어 있다. 결론은, 8세기나 7세기나 선지자들은 유다의 멸망을 미리 바라보고 있고, 백성은 멸망시에 여러 가혹한 위해 (상처)를 당하고 극한 슬픔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상처’와 ‘울음’을 이김
그렇다면 현실의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한국교회는 ‘상처’를 당하지 않도록, 그래서 슬픔의 ‘울음’을 울지 않도록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회개의 울음으로 치료와 회복으로 나아갈 것인가, 계속 죄에 머물러 상처를 당하고 애통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회개의 ‘울음’은 죄에서 돌이켜 그 상처를 치료하시는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길르앗의 향료는, 길르앗의 의사는 기껏 우리 육신을 치료할 것이지만, 우리의 모든 영육은 주님만이 치료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울음을 웃음이 되게 하신다. 재대신 희락을, 근심대신 찬송을 주신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 상처와 울음과 재와 근심 때문에 상처를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의 질고를 지시고 그분이 우리의 슬픔을 당하고 그분이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시고, 그분이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가 평화를 누리도록, 그분이 우리가 나음을 받도록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이다 (사 53:3-5). 이렇게 그분으로 인해 죄의 울음을 이긴 자들은 울음을 이긴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들은 이제는 더 나아가 사자처럼 (미 5:8) 믿음의 용맹을 발휘하게 된다. 그분의 나라를 확장하는 종들이 된다. 이 사람들이 바로 ‘야곱의 남은 자들’ (미 5:8)이다. 이 사람들이 ‘이기는 자들’ (계 2:11; 3:12)이다.
최영헌 교수(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yunghun.choi@ac.edu.a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