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56)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미가서 4
8세기 선지자들의 공통 기대
미가와 동시대 선지자인 이사야, 호세아 등이 그러하였듯 미가도 앗시리아의 침입의 상황에서, 장차 바벨론에 멸망할 유다를 바라보면서 앞날의 메시야를 강하게 기대하였다. 당시 사회의 우상숭배, 부도덕, 사회적 불의, 술취함, 사치와 낭비, 말씀에 대한 멸시의 상황에서 미가가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심판이 명약관화한 상황에서 선지자는 그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받고 안위와 소망을 가지겠는가. 그것은 오직 메시야의 도래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가서에서 말하는 정의란?
미가 선지자는 유다 왕국 백성의 죄를 바라보며 자기부터 회개를 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미 6:9상)” 회개하면서 그는 이렇게 내다본다. “마침내 주께서 나를 위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시며(베아싸 미슈파티: 그가 나의 공평을 만드시고/이루시고)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 (에르에 베찌드카토: 내가 그의 정의/의 안에서 볼 것이다)”(6:9중하) 쉽게 말해 그는 회개 중에 여호와의 공평과 정의(미슈파트와 쩨데크)가 실현될 것을 내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공평과 정의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행하는 바른 생활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인가. 이사야 1:21에 보면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 (미슈파트)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쩨데크)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라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공평과 정의가 사회적 공평과 정의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언약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는데 그의 법을 순종하여 맺은 삶의 열매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죄된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사회적 공평과 정의를 살아내지 못하였다. 그들의 삶은 심판을 자초할 수 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는 무엇을 바라보는가. 장차 여호와 자신에게서 나올 공평과 의를 바라보고 있다. 1:27을 보면, “시온은 정의로 (베미슈파트)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비쯔다카) 구속함을 받으리라” 여기서의 미슈파트와 공의는 사회적 정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구속하시기 위해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온 조치와 행동을 말한다(참고. 미 6:5 ‘여호와의 의’: 찌드코트 여호와; 롬 3:21 ‘디카이오쉬네 쎄우’: 하나님의 의). 이 하나님의 구원 조치 곧 공평과 정의의 실행이 구체화된 것이 메시야를 보내심이다. 사 45:13 “내가 공의로(베쩨데크) 그를 일으킨지라…그가 …사로잡힌 내 백성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하나님의 공의로 세움 받은 메시야에 의해 세상에 참된 정의가 세워진다. 사 42: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미슈파트)를 시행할 것이며” 즉 메시야의 통치에 의해 사회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다(여기서 ‘그’를 NIV가 원문에 없는 ‘고레스’라고 번역한 것은 오류). 사람들이 사회 정의를 이루기 위해 애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슈파트로 보냄 받은 예수님이 미슈파트를 그의 백성 안에 부여하심으로 사회에 미슈파트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의와 정의로 인한 샬롬의 원리다. 인생의 노력과 군비축소와 대화로 일시적인 평화가 나타나겠지만 참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미슈파트가 이땅의 남은 자들에게 적용될 때에야 이루어지고 비로소 전쟁이 그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호세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조치를 베푸실 것이라고 하신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로(베쩨데크 우브미슈파트)…네게 장가 들며”(호 3:19) 그러면 우리가 사는 이땅에 평화가 오게 된다. 3:18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밀하마)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베타: safety) 눕게 하리라” 이러한 여호와의 쪠데크와 미슈파트의 구체화는 종말에 오신 다윗의 자손 곧 예수 그리스도임이 분명히 호세아에 제시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찾게 된다. 3:5에, “그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라고 되어 있다.
시온을 찾는 열방의 남은 자들
아모스는 이 다윗(암 9:11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을 찾게 되는 자들이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도 있고(9:9), 이방인들 가운데 있을 것(9:12, ‘에돔의 남은 자’)을 말씀한다. 따라서 미가서 4:2의 많은 이방 사람들은 이방인들 가운데 여호와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저 열방의 기독교신자와 불신자의 결합된 모습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으신 자를 대적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오히려 전쟁을 수행하셔서 그들을 몰살시켜 버리시기 때문이다(시 2). 따라서 미 4:5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를 신자와 불신자가 영원히 공존하는 모습이 샬롬의 궁극적 형태이겠거니 추측하면 오해다. 불신자는 신자의 사랑과 기도의 대상이지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끝까지 용납하시는 것은 아니다(사 63:1-6; 계 19장). 열국의 다른 신 숭배자들 곧 음녀 바벨론은 주님의 진멸의 대상이지(사 47장; 계 17-18장) 어린양의 신부와 공존하여 평화를 누릴 대상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에서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평화에 있어서도 보편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아주 비성서적이다. 복술, 점쟁이, 우상, 주상을 멸절하겠다고 하신 여호와께서 (미 5:12-15) 궁극적인 평화를 말씀할 때 우상숭배자들과 유일신 여호와 섬기는 자들의 공존하는 평화를 말씀하실 리가 없다. 물론 훼불 (毁佛)은 크리스찬의 도리가 아니다 (장세훈, 한 권으로 읽는 이사야서).
미 4:1-5를 살펴봄
미가서는 야곱의 남은 자(곧 이스라엘 백성 중에 구원 받을 자들, 미 5:8)가 있는 것처럼 열방 가운데도 여호와와 예수님을 찾아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4:2; 7:12; 참고. 슥 8:22, 23)이 있을 것을 말한다. 열방의 남은 자들은 여호와의 산으로 올라 온다. 이곳은 야곱의 하나님의 전이요, 이곳은 시온이요, 이곳은 예루살렘이다. 이곳은 유대인을 통해 전수하신(구원이 이스라엘에게서 남, 요 4장) 하나님 말씀이 있는 곳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시온’은 다윗 언약의 종말론적 성취를 강하게 시사하는 말이다. 미 4:3-4를 보라.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에서 재판하시며 먼 곳까지 강한 이방인들을 꾸짖으실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책망과 회개의 촉구로 볼 수 있다. “…그들이 그들의 칼들을 두드려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들을 쳐서 낫들을 만들 것이며 그들이 나라가 나라에게 칼을 들지 않을 것이고 다시 배우지 않을 것이다(필자 직역)” 하나님의 다스리심으로 평화의 상태가 된 것을 말한다. 4절은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려워 할자가 없으리니…”라고 되어 있다. 역시 평화의 상태의 묘사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고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가 곧 평화의 나라임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슥 3장을 읽어보면 예수님으로 인해 이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말한다.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슥 3:8-10) 여기서 내 종 싹은 누구인가. “그가 이방 나라들에게 화평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다스리심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그리고 강에서 땅끝들까지 (이를 것이다)”(슥 9:10) 여기서 그는 누구인가. 이 사람 때문에 화평 (솰롬)이 이루어진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미 5:2-5)
미가서의 솰롬
결론 짓자면, 하나님의 공평과 의 곧 구원의 조치로 예수님이 세움 받는다. 예수님이 그분의 의를 믿는 자에게 부여하심으로 그들이 세상 살면서 사회 정의를 실현한다. 그리하여 솰롬이 온다. 예수님 없는 솰롬은 가짜 솰롬이다. 기독론을 뺀 채로 미가서의 만국 평화를 말하는 것은 오류다. 예수님의 미슈파트를 실현한다는 것은 아직 그 의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자들을 위한 대화와 사랑의 나눔과 기도와 오래 참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위험자들을 방관할 수만 없다. 군비경쟁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면 힘을 길러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 전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라도 돌변할 수 있는 자들, 언제라도 침략 전쟁을 일으켜 인명을 살상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자들을 위해 방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평화를 원하시나 우상숭배자와 믿는 자가 영원히 공존하는 가운데의 평화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믿는 자는 우상숭배자의 변화를 위해 기도 하나 그렇다고 하나님이 언제까지나 우상숭배자들을 좌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새예루살렘에 들어올 수 없다. 하나님은 평화를 원하시나 그들을 향해서는 오히려 진노하시고 전쟁하심을 알아야 한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옷은 그들의 선혈로 젖어 있다. 이 진멸 후에 비로소 솰롬이 온다.
최영헌 교수(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yunghun.choi@ac.edu.a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