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57)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미가서 5
미 4:1-5를 다시 생각함
미가서 4장 1-5절의 본문은 지난 호에 다루었는데 여기서 다시 한 번 다루고자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평화’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는 본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는 이 본문은 끝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말씀하는 본문이다. 끝날에 많은 이방 사람들이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자!”고 한다. 왜냐,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이 때에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방 사람들은 그 칼을 쳐서 농기구를 만들 것이다. 각 사람은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 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다. 여기에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난다(5절).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기본적인 결론
여기서 우리가 얻게 되는 기본적인 결론은 여호와께서 개입하심으로 평화가 온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의 갈등과 송사를 해결해 주심으로 화평의 상태가 된다. 그리하여 나타나는 것은 전쟁의 무기를 개조하여 이제는 농기구를 만들게 된다. 더이상 전쟁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호와의 개입으로 평화에 이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기를 결단하고 소망하겠는가. 우상숭배자들(다른 신들을 의지하는 자들)은 그들의 길을 가나 우리는 오직 주님만 신뢰하며 살아가리라고 결단할 것이다.
여호와의 개입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여호와의 개입이 순전한 평화적 개입이라고 미가서의 본문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웃 본문인 5장 10-15절을 보면 이것은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이르러는 내가 네 군마를 네 가운데에서 멸절하며 네 병거를 부수며 네 땅의 성읍들을 멸하며 네 모든 견고한 성을 무너뜨릴 것이며 내가 또 복술을 네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쟁이가 없게 될 것이며 내가 네게 새긴 우상과 주상을 너희 가운데서 멸절하리니 네가 네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는 섬기지 아니하리라 …” 즉, 여호와의 개입은 평화의 개입이 아니라 오히려 말과 병거 곧 무기들을부수고 우상들을 멸절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둘째로 여호와의 개입은 한 통치자로 인하여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이것도 이웃 본문인 5장 2-5절에 보인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그리스도를 빼놓고 평강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로, 한 통치자를 세우시는 여호와의 개입을 미가서는 여호와의 ‘공의’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미가 선지자는 사회적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 죄악된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전망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 마침내 주께서 나를 위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시며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 여기서 ‘그의 공의’는 인간사회적 차원의 정의보다 깊은 의미를 띈다. 사회 정의는 이 하나님의 ‘공의’의 열매일 뿐, 이 ‘공의’를 결코 대체할 수 없다.
여기서 하나의 결론을 내리면 이렇다. 미가가 처한 현실은 죄악된 현실, 사회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죄악된 인간의 힘으로는 정의가 실현되어 평화가 도래하는 것이 요원했다. 인간의 힘에 의해서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만이 머물러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편에서 죄악된 이들의 문제를 친히 나서셔서 해결해 주심이 필요하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비와 능력과 은혜를 시행하심이 필요한데 이것이 곧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와 구원이다. 이사야나, 미가나, 호세아, 시편이나 할 것 없이 하나님 편에서의 구원 개입을 미슈파트(사 1:27; 호 2:19), 쩨다카(미 7:9; 시 96:13), 테슈아(사 46:13)라고 똑같이 언급한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개입은 어떻게 구체화되는가. 메시야를 통해서 미슈파트와 쩨다카와 테슈아를 시행함으로 구체화된다. 메시야는 하나님께서 시행하시는 멸절과 구원의 시금석으로서, 하나님은 메시야 안에서, 메시야를 통하여 우상숭배자들은 멸절로, 남은 자들은 이스라엘이든 열방이든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남은 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평화 (솰롬)가 시작되며 메시야의 재림시에 이것은 완성된다. 사회 정의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이 평화의 열매이다.
따라서 미가가 말씀하는 솰롬은
따라서 미가가 말씀하는 평화는 우상숭배자들을 방치한 상태의 평화, 우상숭배자들과 공존하는 평화가 절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들만의 평화를 말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과 열방의 남은 자들이 폭력을 동원하여 우상숭배자들을 심판하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아니, 오히려 교회의 몫은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기도하고, 할 수만 있으면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우상숭배자들을 끝까지 용인하시며 남은 자들과 어울려 영원토록 거하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한정건 교수는 이미와 아직을 말하면서 예수님의 초림으로 남은 자를 모으는 사역은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우상숭배자들이 있고 전쟁이 있음을 말한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전쟁은 종식되고 우상숭배자들은 멸하여지며 참 평화가 시행될 것이라고 본다(“사 1-6장: 이사야의 서론적 메시지,” 이사야 1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두란노아카데미, 185ff).
이사야도 똑같이 말함
사 45장을 읽으면 미가서와 똑같은 원리가 나타난다. 이스라엘은 죄된 비참한 현실 (포로)에서 어떻게 놓여나게 되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공의를 시행하셔서(13절) ‘그’를 일으키신다. 우상숭배자들은 다 함께 수욕 중에 들어가게 된다(16절).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여호와께 구원을 받아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된다(17절). 열방 중에 피난한 자들도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 나아옴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 (20-22절 참조).
스가랴도 똑같이 말함
슥 3장을 읽으면 미가서와 똑같은 원리가 나타난다.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에게는 소망이 없었다. 성전도 건축이 안되고 성벽도 없는 상태에서 늘 불안하고 전쟁의 위협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싹’(쩨마)을 하나님이 친히 나게 하심으로 문제를 해결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내가…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하신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개입에 의해 평화와 번영과 안정이 있게 될 것이다.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3:10) 이 구절은 이스라엘만의 안녕을 말하지 않는다. 인접 본문을 보라.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9:22) 그러면, 슥 9장에서는 하나님의 싹을 누구라 하는가.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9:10-12) 결론은, 이 분은 하나님의 메시야요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분은 언약의 피를 흘리셨고,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에게 화평을 전하신 분이시요, 이 분의 통치는 전 우주에 미치고, 이분은 우상숭배자들을 멸하시고 전쟁 무기들을 제하시고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만이 소망이고 예수만이 참 평화의 열쇠이시다.
로마서도 똑같이 말함
김희보 교수는 미 7:9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에서 ‘그의 의(His righteousness. NASB)’를 롬 1:17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와 같은 말이라고 한다(“미가, 그가 본 메시아는 어떤 분이신가,” 호세아 미가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두란노아카데미, 187). 불의, 시기, 살인, 분쟁 등의 상황 곧 전쟁의 상황(롬 1:29)에서 참된 안식과 평화는 어떻게 오는가. 하나님의 ‘의’의 시행으로 현실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나, 하나님과 우리, 하나님과 세상의 평화가 이루어진다. 이 평화는 초림에서 시작하고 재림으로 완성된다. 미 5:4-5를 주석하며 김희보 교수는 말한다. “여기서 ‘그는 평강이시라’는 히브리 원문의 뜻은 ‘그는 곧 평강’ (This is Peace)이라는 말이다. 간단히 말한다면, ‘메시아는 샬롬’ (Messiah is Shalom)이란 말이다.”(같은 책, 183) 김희보 교수는 이 평화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벌써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초림 이후, “물론 이 ‘은혜의 왕국’에 전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유컨대 큰 강이 겨울 추위에 얼었다 하자. 그러나 그 얼음 밑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다. ‘은혜의 왕국’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메시아의 ‘은혜의 왕국’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있고 칼과 창이 더 많아지는 것 같지만 그 밑으로는 평화의 물이 흐르고 있다. 이제 곧 그 얼음조차 녹는 때가 온다. 그러면 강물은 크게 넘쳐 흐를 것이다. 그 때는 물론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다. 우리는 그것을 ‘영광의 왕국’(The Kingdom of Glory)이라고 부른다.” 메시야의 백성들은 이 때가 완성되기까지 칼로 원수들을 멸할 것이다 (5:6). 칼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김교수는 해석한다(같은 책, 185f).
열방의 남은 자가 할 일
그렇다면 이 평화를 위해 열방의 남은 자 곧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송병현 교수는 우리의 할 일은 ‘전도하는 일’이라 한다. “… 시온에서 훈련 받은 열방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가르친다. 그들의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하며, 세상을 가득 채운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통치하는 여건을 조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하는 세상은 과연 어떤 곳인가? 무엇보다 공평과 정의가 다스리는 세상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고 판결하시니 그의 판결을 받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심판에 매우 만족해하며 스스로 전쟁 무기를 쳐서 농기구로 만든다…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은 공평과 정의이어야 한다. 가장 연약하고 소외되기 쉬운 자들이 결코 무시되지 않는 곳이 바로 영적으로 성숙한 교회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인 것이다 …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메시아 시대에 세상에 임할 참 평안은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을 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하수처럼 넘칠 때까지 진정한 평안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간혹 우리는 UN, 혹은 어느 특정한 NGO가 마치 이 세상에 참 평안을 안겨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 한 참 평안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더욱 더 열심히 전도하고 더욱 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써 온 세상에 그분의 말씀이 소용돌이치도록 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이 세상에 임할 수 있다.”(“미가 4장: 심판의 먹구름 사이로 비추는 구원의 서광,” 호세아 미가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232-3). 전도를 빼놓고 사회 정의와 평화가 오기를 바라는 것은 넌센스다.
최영헌 교수(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yunghun.choi@ac.edu.a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