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8)
지금은 절개 (節槪)를 구할 때: 호세아서<8>
이스라엘 학술 탐사 (2015. 12)를 앞두고 누구나 기대했었을 것이다. ‘이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내게 보여주실 것은 무엇일까.’ 내게도 이런 기대가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엔게디에서 한 가지를 보여주셨다. 엔게디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녔던 곳이다. 계곡을 타고 물이 흘러내리고 폭포도 있었는데 다윗의 이름을 따서 ‘다윗 폭포’라고 이름이 붙었다. 폭포라 해서 제주도의 정방폭포 같은 것을 예상하면 안된다. 우람차게 밑으로 떨어져 바위를 깨뜨리고 깊은 웅덩이를 파는 폭포가 아니었다. 몇 개 가느다란 물줄기를 흘리는 실폭포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유대인들은 이 장관(?)을 구경하려고 그렇게도 많이들 나와 있었다. 그 중에 한 가족을 만났다. 폭포를 구경하려고 꼭대기까지 힘들게 아이 셋을 데리고 올라온 유대인 부부. 맏이와 둘째는 걸리고 막내 아기는 아빠가 안았다 (엄마는 편하고 아빠는 어디서나 힘들다). 아빠 품에 안긴 아기가 너무 귀여웠다. 얼굴을 내밀며 “헬로우”하자, 표정이 없던 아기가 순간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려 나를 향해 방긋이 웃었다. 슬로우 모션으로 웃음이 얼굴 전체에 퍼졌다. 옆에 있는 사람들은 그 모습에 놀라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따사로운 초겨울 햇빛에 아기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순전하신 하나님 얼굴 같았다. 하나님이 이번에 보여주신 한 가지—하나님의 얼굴이었다!
호세아서 4장에 들어가며 나는 그 아기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4장 이하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여기저기 보인다. 물론 이와 너무나 대조적인 이스라엘의 모습도 드러난다.
호세아서는 4장부터 그 구조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학자들이 하나의 구조적 단서로 이해한 것은 11장 11절 끝에 나오는 “나 여호와 말이다”라는 어구다. 마치 2장에서 13절 끝에 나오는 “나 여호와의 말이다”라는 어구가 2장 전체를 양분하듯이, 이 어구 때문에 4장 1절부터 11장 11절까지가 하나의 긴 흐름을 형성하며, 그 뒤에 오는 11:12-14:9는 호세아서 전체를 마감하는 말이라고 학자들은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4:1-11:11까지의 내용의 흐름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단서들은 없는가. 카일 (C. F. Keil)은 4:1-6:3까지를 하나의 단락으로 보았다. 그런 다음, 그는 4:1-6:3은 그 뒤의 단락들 곧 6:4-11:11과 11:12-14:9과 그 내용의 흐름에 있어 병행을 이룬다고 보았다. 즉, 이 세 단락들은 모두 심판에서 구원의 분위기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4-14장을 세 개의 병행 단락들로 본 이와 같은 카일의 이해가 후학들에게 영향을 준 반면, 실상 4:1-11:11에 대한 하위 단락 구분은 학자들 간에 일치하는 것이 거의 없다. 이 부분을 우리가 읽어보면, 앞에 나왔던 주제들이 거듭 뒤에 또 나오며, 이 주제들의 논리적 연결성이 희박한 듯 보인다. 읽고 또 읽어보아도 구조가 뚜렷하지 않아 보인다.
필자는 카일이 4장 이하를 크게 3구분하는 것이 일리가 있다고 보지만 11:12-14:9는 앞부분과는 달리, 흐름이 보다 급격하고 정함이 없는 이스라엘과 신실하신 여호와를 대조하는 내용들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최소한 7번) 4-14장의 결론 부분이요 또한 전체의 결론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나는 4:1-6:3과 6:4-11까지는 카일처럼 병행을 이루는 두 단락 (a와 a’)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카일처럼 완전 병행으로는 보지 않는다. 나는 a’는 a에서 시작한 설교를 더 확장하면서 그 끝부분에 구원 주제를 휴대하기에 (11:8-11), 4:1-11:11을 마감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이 둘이 주제들의 전개상 유사하지만 완전 병행단락은 아니라는 말이다.
4:1-11:11의 내용 전개는 실로 복잡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나는 만약 우리가 4장 이전에 미리 선 보인 주요 주제들과 그것들의 전개 방법을 유의하기만 하면 그렇게 구조 이해가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필자도 이 부분을 이해하는 데에 10년 이상이 걸렸다. 많은 날들이 지나간 것이다!
4:1-6:3의 내용이 6:4-11:11에서 비슷하게 반복됨을 우리는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1:2-2:1; 2:2-2:23; 3:1-5 단락들의 서두가 이스라엘의 죄 (여호와를 버리고 음행을 함)로 시작하였듯이 이 두 단락 (4:1-6:3; 6:4-11:11)의 서두도 공히 이스라엘의 죄를 다룬다. 4:1을 보면,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로 시작한다. 그리고 6:4ff을 보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나는 인애를 원하고…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되어 있다. 문자적으로 똑같은 반복은 아니지만 6:4이하는 앞단락의 반복 (변주 variation) 인 것이다 (참고. 11:12). 그런데 이 두 단락의 시작은 이스라엘의 일반 죄로 시작하지만 그 다음 이어지는 내용은 특히 3장에서 나타났던 주제들, “왕/방백, 제사/주상, 에봇/드라빔”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주제들이 순서적으로 꼭 맞게 이어지지는 않지만, 이것들이 이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곧, 왕과 방백들의 죄 (재판장도 포함), 제사와 주상과 관계된 죄들 (제사장, 제사, 송아지 숭배, 제단, 제물 등), 그리고 에봇과 드라빔과 관련된 죄들 (선지자, 점치는 행위, 그릇된 예언 등)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2장에서 보았던 죄가 여기에 함께 언급되는데 그 죄는 여호와를 버리고 ‘연애하는 자들’을 따라 간 죄이다. 이것은 바알 숭배나 외세 (앗수르나 애굽)를 의지한 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심판이 이어진다. 심판은 ‘여호와의 날’ 주제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간간이, 이스라엘이 그 심판 속에서 후회할 것, 회개할 것이 예시 (혹은 회개 권면)되어 있다.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1) 4:1-6:3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 (4:1-3)로 시작하여 제사장 (4:8), 점치는 행위 (4:12), 산당 제사 (4:13)와 우상숭배 (4:17), 방백 (4:18; 5:10)과 왕족 (5:1)과 재판 (5:11), 여호와의 날 (나팔, 호각, 날, 5:8, 9), 연애하는 자를 좇음 (앗수르의 야렙 왕에게 사신을 보냄, 5:13), 회개 예시 (5:15-6:3)로 이어진다. 2) 6:4-11:11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 (6:4-8), 제사장 (6:9), 왕과 방백들과 재판장들 (7:3-7, 16; 8:4), 연애하는 자들을 좇음 (애굽과 앗수르 의지, 7:11; 8:9-10), 여호와의 날 (나팔, 8:1), 회개 예시 (8:2), 우상숭배 (8:5, 6)로 첫 단락과 비슷하게 전개된다. 다만, 여기서 크게 주의할 것은 (!), 이 단락에서 8:11-11:11까지는 두 개의 부속 단락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 두 단락들은 똑같이 여러 죄들 중에서 특히 (in particular) 제사나 우상숭배와 관련된 죄들을 부각시키며 시작하기에 병행 단락들로 볼 수 있다. 이 두 단락들 중 첫째는 a 8:11-9:7 제단, 제물, 제사, 여호와의 날+b 9:7하-17 선지자, 우상, 방백들로 진행하고, 둘째는 a’ 10:1-12 제단, 주상, 왕, 우상, 제사장들, 회개 권면+ b 10:13-11:11 용사 의뢰, 여호와의 날, 바알 숭배, 연애하는 자들, 회복 약속으로 전개된다. 즉, 두 병행 단락은 호세아가 그 당시 북이스라엘에서 하나님께 대한 제사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우상 숭배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생성한 것들로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호세아가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음식을 주셔서 내가 배 불러 만족하게 되니 내 마음이 높아져 하나님을 잊고 나는 내 욕심을 만족시켜 주는 대상에게 절한다 (13:1, 2, 6)는 것이다. 숱한 제단들을 자꾸자꾸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매일매일 다시 ‘엔게디’로 올라가라는 것이다. 그 진실하시고 순수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또 뵈라는 것이다.
최영헌 교수 (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