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17)
지금은 절개를 구할 때: 호세아서<17>
호세아 6장 7절 개역개정은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이다. 여기서 “아담처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케아담” ‘케’는 전치사로서 ‘-처럼’이고, ‘아담’은 창세기에 나오는 고유명사 첫 사람 아담을 가리킨다. 이러한 번역은 두어 가지 약점을 지닌다. 곧 첫째는, 후반절에서 ‘거기’라는 말이 나오는데 거기가 어디냐는 것이다. 대답할 말이 막연하다. 보통 전반절에서 어떤 장소를 말하고 그 장소를 다시 하반절에서 언급할 때 ‘거기’라는 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이 구절을 보면, ‘거친 들’을 또 말할 때 ‘거기서’를 쓰고, ‘아골 골짜기’를 다시 언급할 때 ‘거기서’를 사용하는 것이다. 6:10에도 보면,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느니라” ‘이스라엘 집’ 곧 ‘북쪽 왕국 이스라엘 땅’을 말하고 나서 그것을 ‘거기서’로 하반절에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에서 그들을 미워하였노라” (9:15)도 같은 예다. 둘째는 호세아가 창세기의 야곱이나 (12:3-4, 12), 이스라엘 역사를 (2:15; 9:9, 10; 11:1; 12:9, 10, 13; 13:4, 5) 회고하기는 하지만 갑자기 왜 창세기의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말하는가이다. 창세기의 야곱을 언급하는 것은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곧 남쪽 유다 왕국과 북쪽 이스라엘 왕국 모두의 뿌리가 야곱이고, 현재 남북 사람들이 모두 범죄함은 곧 그들의 공통 조상인 야곱의 거짓된 사람됨 (사기꾼 기질의 사람)과 직결되기 때문인데, 갑자기 이러한 조상 야곱-이스라엘 민족의 연계성을 떠나 그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인물로서 아담을 인용했다는 것은 문맥상 너무 느슨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7-9절의 인접 구절들을 보면, 모두 북이스라엘의 특정 장소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인 아담’으로 번역하지 않고, ‘지명인 아담’으로 번역하면 아주 부드러운 번역이 된다는 것이다. 곧, “그들은 아담에서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아담, 길르앗 (12:11에도 나옴), 세겜 등을 모두 지명으로 번역하면 일관성을 띈다는 것이다 (공동번역, NIV, RSV).
“아담에서”?
아담을 지명으로 번역한다면 이런 지명이 이스라엘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서 3장에 이 지명이 보인다.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수 3:15-16) 아담을 지명으로 본다면, 더불어 나타나는 길르앗, 세겜과 비슷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이 아담이라는 단어를 하나의 장소, 성읍으로 이해할 경우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요단강 동편의 길르앗이나 아담, 세겜 할 것 없이 모두 살인죄를 비롯한 여러 범죄들로 더럽혀져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호세아서에는 특별히 북이스라엘의 여러 지명들이 소개되는데 이스르엘 (1:4-5), 벧아웬 (4:15; 5:8; 10:5, 8), 길갈 (4:15; 12:11), 기브아 (5:8; 10:9), 라마 (5:8), 사마리아 (8:6), 벧아벨 (10:14), 벧엘 (10:15) 이것들은 우상숭배와 음행을 비롯하여 여러 죄들과 관련되어 언급된다. 이 중에서 벧엘, 길갈, 사마리아 등은 죄가 사무친 곳이 아니었나 하는데 그 이유는 아모스에서도 거듭 지목되는 도시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을 지명으로 볼 경우에 생기는 난점들이 있다. 첫째는 ‘아담’이라는 성읍이 범죄한 성읍이라는 점을 지원하는 내용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지명으로서의 아담으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전치사를 ‘-처럼’을 뜻하는 ‘케’에서 ‘-에서’를 뜻하는 ‘베’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어떻게 일점일획이라도 함부로 바꿀 수 있겠는가. 절대로 바꿀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항은, 히브리 원본이 없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필사본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원본에 어떻게 기록되었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가정할 수 있는 것은, 히브리어 자음만으로 볼 때 이 케와 베는 너무나 닮아 있어 원래 ‘베’였는데 필사자들이 ‘케’로 잘못 필사를 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셋째로,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파기자의 예로 첫 사람 아담만큼 쉽게 거론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이 아담을 장소가 아닌 사람으로 보면, 하반절의 ‘거기서’라는 것과 연결이 잘 안되기에 개운치 않은 점이 있지만, ‘언약을 어겼다’는 술어와 ‘아담처럼’이란 구절의 연결은 너무도 매끄럽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글 개역개정, 쉬운성경, 우리말성경, NASB, ESV, ERV, ISV, NLT 등은 ‘아담처럼’이라고 번역하였다 (이중에 어떤 번역은 각주를 달아 다른 번역의 가능성도 제시).
윤영탁 교수 번역 소개
필자는 마지막으로 이 구절의 번역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개진한 윤영탁 교수의 견해를 소개하고자 한다 (구약신학과 신앙, 1991, 특히 13-25). 그는 ‘아담처럼’으로 번역하되 하반절의 히브리어 ‘샴’을 장소의 부사 ‘거기서’로 번역하지 않고 강조적 용법으로 보아 ‘참으로 그처럼’으로 잠정 번역하였다. 이는 하반절을 “In that particular you have acted perfidiously”로 번역한 칼빈을 따른 것이다 (Ibid., 18). 이렇게 되면, 6:7 전체의 번역이 보다 깔끔해진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고 그들이 참으로 그처럼 나를 배신하였다” (Ibid., 20). 그는 이 논의에 이어서 창 3:15의 원복음 (최초의 기쁜 소식)을 설명하였다.
번역의 어려움
나는 호 6:7 번역의 어려움을 접하면서, 몇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먼저 우리가 현재 한글성경들을 지니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이 수고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둘째, 성경 원본은 성령의 영감으로 된 (‘쎄오프뉴스토스’ 딤후 3:16)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이나 그것의 사본들이나 번역본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셋째는,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드러내도록 더 애써야 한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위에서 어떻게 번역하든, 각주를 달아 다른 번역도 있음을 독자에게 제시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어떻게 번역되든 중요한 것은
첫사람 아담이냐, 장소 아담이냐-둘다 일리가 있어 보인다. 호 6:7의 번역이 이 둘 중 어떻게 번역되든 (아담을 일반 인간으로 보는 또하나의 견해가 있는데 여기서는 생략)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아담처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고 주님을 배신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그것은 길갈, 세겜, 이스르엘, 사마리아, 바산, 길르앗, 벧엘, 벧아벨, 벧아웬, 라마, 기브아, (그리고 아담?) 등 북이스라엘의 도시들 및 지역들이 총체적으로 죄로 더럽혀져 있었다는 것이다. 즉, 야웨께 대한 정조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음녀 바벨론처럼 모든 도시가 성적 방종 가운데 깊이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창세기부터 여호수아가 사사기에 와서 하나의 역사적 획을 긋고, 이스라엘의 왕정의 역사가 포로로 또하나의 획을 긋는데 이 두 시기의 공통점은 영적인 음란 (혼합종교), 정치적 음란 (왕이 없어 소견에 옳은대로 행함/외세 의존), 사회적-육체적 음란 (윤리 실종 및 성적 타락)으로 볼 수 있다. 이 역사의 획이 그어지기 바로 얼마전에 호세아는 이미 창녀가 된 이스라엘에게 마지막으로 회개하라 하는 것이다. 회개가 없으면 망한다. 자백이 없으면 죄가 그대로 있다. 자백하고 돌이켜 정결의 길로 가야 한다. 온전히 성령께 붙잡혀 살기 위해 오늘도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한다.
최영헌 교수 (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