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갈라디아서 개관 – 과거로의 회귀로부터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편지 중 신약에 포함된 첫 번째 편지이다. 이 서신은 비교적 짧지만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초대교부들은 다른 어떤 신약성경보다 갈라디아서에 대한 많은 주석을 했다. 또한 이 서신은 종교개혁가인 마르틴루터가 선호하던 문헌으로, 그는 자신의 소중한 아내만큼 갈라디아서가 소중하다고 묘사하며 갈라디아서를 “나와 약혼한 나의 서신, 카디폰보라(루터의 아내이름)”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실제 갈라디아서는 신약신학과 윤리에 중대한 공헌을 했는데 가장 중요한 공헌은 칭의교리에 관한 해설이다. 갈라디아서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주어지며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복음의 속성을 규명하면서 로마서와 함께 교리적인 체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수신자>
바울이 써 보낸 갈라디아서의 수신자는 갈라디아 교회들이다. 갈라디아는 교회이름이 아니라 오늘날의 소아시아의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그러나 로마의 주로 편입되면서 남쪽지역까지 포함하는 이름이 되었다. 이 남쪽지역은 바울사도가 제1차 전도여행기간 중에 방문하여 교회를 세웠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등의 도시가 남부 갈라디아에 속한다(행13:13-14:25). 북부 갈라디아(갈라디아 왕국)의 지역들은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에 수리아, 길리기아, 더베, 루스드라를 거쳐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행16:6). 아마 바울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그가 세웠던 남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이 편지를 쓴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상황>
40년대에 이방인 지역으로 복음이 펴져 나갈 때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 것은 율법이 이방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바울사도는 이방인들이 율법을 모두 지키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다. 바로 이 율법과 성전제사에 대한 비판적 가르침이 유대인들과 잦은 충돌을 가져왔다. 특히 할례문제는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이방인들이 할례를 통해서 개종자가 되기를 가르치는 유대기독교인들에 의해 발생된 현안이었다. 적지 않은 교인들이 복음에만 의존하지 않고 이스라엘도 못 지켰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할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울사도가 갈라디아서를 써 보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는 할례의 문제가 일단락된 예루살렘회의 (주후49년)가 있기 전인 주후48년경 안디옥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갈라디아서의 상황은 그들이 복음을 받은 이후에 그들의 신앙이 하향곡선을 그리며 후퇴하고 있음을 지적함으로 시작된다. 첫째, 그들은 복음에서 율법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갈라디아 교회들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았지만 어떤 유대주의자들이 등장하여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며 특히 할례 받기를 강요했다. 그들은 믿음으로부터 구원받는 능력을 율법을 지키는 곳으로 후퇴했던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었으나(5:13) 율법 행함의 요구를 즐겨 받음으로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종의 위치로 물러나 있었다. 셋째로,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을 받아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으나 육체로 후퇴하는 안타까운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구조>
이러한 안타까운 갈라디아 교회들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그들에게 서신을 보낸다. 크게 논쟁부와 권면부로 나뉘어진다.
- 서론(1:1-5)
- 본론(1:6-6:17)
1) 논쟁부(1:6-4:31)
(1)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1:6-12)
(2)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야기
① 다메섹 사건과 그 전후의 이야기(1:13-17)
② 제1차 예루살렘 방문과 그 후14년간의 이야기(1:18-24)
③ 예루살렘 “사도 회의” 이야기(2:1-10)
④ 안디옥 사건 이야기(2:11-21)
(3) 신학적 단락(3:1-4:31)
① 이신칭의: 아브라함의 예(3:1-18)
② 율법의 목적(3:19-4:7)
③ 뒤돌아보지 말라(4:8-11)
④ 자유로운 여인의 자녀(4:13-31)
2) 권면부(5:1-6:17) – 성령을 따라 살아갈 것을 권면함.
<내용>
거짓 교사들의 사역 및 가르침 –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을 떠난 후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침입하여 모세율법을 준수하는 것과 특히 복음을 믿는 것과 더불어 할례가 필수라는 것을 가르쳤다. 그들은 새롭게 그리스도인이 될 회심자들에게 유대교를 부과하려고 했던 것이다. 할례가 그들의 주요 초점이었는데 바울은 구원을 위한 할례의 요구가 궁극적으로 구약 율법전체를 의무화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5:3). 이 과정에서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할례와 율법준수를 강조할 수 없었기에 바울의 사도직을 공격했다.
원래 할례와 율법은 긍정적인 요소를 지닌 채, 아스라엘에게 제시되었다. 할례는 구약성경에 따른다면 매우 강력하고 절대적인 의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언약의 피할 수 없는 본질적 표징으로 할례를 명하셨다(창17:10). 또한 할례는 이방인 거주자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삶과 예배에 동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출12:48-49).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할례를 통해서 할례자는 자신의 육체의 정욕과 쾌락을 잘라내는 상징으로 보았다. 또한 율법(토라)은 어떠한가? 율법은 원래 좋은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자들에게 율법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침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할례와 율법은 장차 성육신하시어 세상에 오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오기 전의 시간에 속한다. 율법의 성격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율법은 매는 것이다. 율법은 사람을 강제로 묶어 놓는다. 사람들은 율법의 속박으로 말미암아 죄악에 손을 대지 못한다. 만약에 율법이 없다면 사람들은 아무 죄악에나 손을 뻗치고 말 것이다. 둘째로 율법은 가두는 것이다. 율법은 사람을 억제하여 가두어 놓는다. 만약에 율법이 없다면 사람들은 아무 범죄에나 발을 내딛고 말 것이다. 그러나 범죄의 성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율법에 의해 통제와 제한을 받는다. 그래서 원래 율법이 하나님의 선하신 베푸심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속박과 구속의 기능을 하는 율법은 한 마디로 말해 “초등교사”라고 불리 운다(3:24). 율법은 실수와 실족하기 쉬운 어린아이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초등교사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초등교사가 끝까지 사람을 인도하는가? 그렇지 않다. 아동교사의 목적은 어린아이가 성숙해짐에 따라 그를 전문교사에게 인도하는 것이다. 아이가 전문교사에게 맡겨지면 초등교사는 더 이상 역할을 할 것이 없다. 이것이 율법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다. 이 초등교사인 율법의 목적은 전문교사인 그리스도에게로 교회와 성도를 인도하는 것이다. 율법은 그 자체로서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초등교사인 율법에 의해 전문교사인 그리스도께로 왔는데 다시 초등교사 밑으로 돌아가는 것이 합당한가? 지금 유대주의자들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전문교사인 그리스도께로 갔어도 초등교사 영역인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율법의 멍에를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에게 지우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 율법이 촛불이라면 예수님의 은혜는 태양빛이다. 태양빛이 없을 때에 촛불이 유용하고 고맙지만 태양빛 아래에서 촛불은 유용성이 없다. 태양빛 아래서 촛불을 켜는 사람이 있겠는가? 태양빛 아래서 태양의 능력이 모자라다고 촛불을 켜는 행동이 마땅한가?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은혜가 나타나서 우리를 구원했는데, 그 구원이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촛불과 같은 율법으로 보완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완성된 주님의 구원사역에 무엇을 더할 수 있기라도 하듯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려는 시도는 하나님과 우리를 회복하게 하신 능력을 멸시하고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비록 상속인이 어렸을 때는 율법의 지도하에 있었지만 그때는 유아기적 삶이었다. 이제는 “때가 차매”(4:4) “믿음이 왔다”(3:23,25).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율법시대의 종말을 고하셨다. 이제는 우리는 매고 가두는 역할을 하는 율법에 갇혀서 억지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고 좀 더 성숙한 삶으로 진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돌입하게 된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만 하는가? 다시 초등교사에 해당하는 율법에 얽매어 자유 없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유를 누리며 성령의 고귀한 열매를 맺는 삶으로 진입하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어린아이와 같이 어떤 규정에 얽매여 율법주의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깊은 은혜를 체험하면서 성숙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였을 때는 우리의 행동을 일일이 통제하는 율법에 의지한 걸음을 걸음으로 죄악의 길로 빠지지 않는 것이 목표였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후에는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 모두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서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를 따라 살게 하시고 진정으로 의로운 자의 표상이신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며(2:20; 4:19)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하신다. 율법에 따라 살아갈 때는 죄악의 길로 가지 않으려고 애쓰기만 했고 기쁨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되자 이제는 육체의 소욕을 근본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의의 열매가 가득한 삶을 체험할 수가 있다. 그러니 어찌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풍성히 열매 맺는 삶이 존재하는 판에 다시 과거로 회귀해서 기쁨이 넘치치 않는 율법주의적 삶에 자신을 얽매일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물론 율법에서 자유하면 최소한의 보호막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더 강력한 추진력인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을 수 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율법으로 회귀해야 할 아무런 이유와 장점을 찾지 못하게 된다.
율법과 성령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율법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규칙과 같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이신 인격체이시다. 우리가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주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딱딱한 규칙이 우리의 삶을 옥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신 성령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하나님과 또한 이웃과의 성숙한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규칙(율법)이냐 인격적 교제(성령의 인도하심)이냐가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많은 부분을 율법에 돌아가려는 무의미한 시도에 대해 경고했지만 후반부에서는 그 율법에 얽매인 삶의 반대편에 있는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의 아름다운 모습과 열매들을 감격 어린 언어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5:22-26) 율법에로의 회귀가 아니라 성령에 이끌린 참된 자유의 삶이야 말로 하나님의 참된 능력을 소유하며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바울은 제시한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