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데살로니가 전서 개관 :어떻게 복음전선은 확대되는가?
데살로니가는 로마제국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간선도로인 에그나티아 대로(Via Egnatia)변에 놓여있을 뿐아니라 항만이 좋은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마케도니아에서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역할을 했다. 데살로니가는 기원 4세기말에 마케도니아왕 카산더가 재건한 도시인데 그의 아내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누이인 데살로니케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데살로니가는 기원전146년에 로마의 속령인 마케도니아 주의 수도로 승격되어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또한 기원전42년 빌립보전투때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편에 가담한 공로로 자유시가 되었다. 시민은 마케도니아 원주민 외에 상당한 수의 그리스 사람들과 로마사람들로 구성되어있었다. 사도행전의 보도에 의하면 바울이 전도 활동을 한 시기에 그곳에는 유대인 회당도 있었다(행 17:2).
<데살로니가 교회>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서 유럽중에 처음으로 열매가 맺힌 곳은 마케도니아의 빌립보였다. 바울과 실루아노는 디모데와 함께 빌립보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거기서 박해를 받게 되자 에그나티아 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150km떨어진 데살로니가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해 안식일에 세 번 유대인 회당에서 토론하고 말씀을 선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 자신의 증언에 근거하여 판단하면 데살로니가 전역에 대한 선교활동은 세 주간보다 훨씬 더 긴 기간임을 추론할 수 있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2:9). 그들이 생계비를 벌기 위해 밤낮으로 일했다는 것은 그 당시 “인술라”라고 하는 전문적 가게를 전세로 얻어서 그 일터를 또한 전도의 터전으로 삼아 활동했다는 뜻인데 이러한 일은 상당히 장기간에 걸쳐서 하는 경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빌립보서 4:16에서 바울은 자기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빌립보교인들이 선교헌금을 몇 번 보내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데살로니가에서의 바울 일행의 선교기간이 적어도 5,6개월은 되었다고 짐작하게 한다. 사도행전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대표격인 야손과 몇몇 성도들이 바울과 함께 고발당하는 상황에서 성도들이 그들을 베뢰아로 보냈다고 전한다(행17:5-10). 후에 바울은 박해당하고 있으면서도 긍정적인 신앙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격려하기 위해 디모데를 보냈다(3:1-5).
<기록 연대 및 장소>
디모데가 데살로니가로부터 돌아올 무렵에 바울은 이미 고린도로 옮겨갔고(행17:14-16; 18:5) 그곳에서 디모데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를 쓰도록 만들었던 데살로니가 교회 상황에 관한 보고를 가지고 바울을 만났다. 데살로니가 전서가 디모데를 공동 발신자로 부르기 때문에 이 서신은 고린도에서 5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이것은 신약성경 중에 갈라디아서 다음으로 빠른 시기에 기록되었음을 보여준다.
<기록 동기와 목적>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데살로니가 교회로 보냈던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감사하며 또한 그들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정도로 칭찬받을 만한 교회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지니고 있는 바람직한 교회상을 지니고 있었다(1:3). 전반적으로 칭찬할 만하였으나 신자들은 박해를 당하고 있었고 바울 사역의 동기에 의문을 지닌 일부 대적자들도 있었다. 또한 일부 신자들은 성적유혹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교회가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혼동하고 있음이 보고 되었다. 아울러 일부는 무책임하게 돈을 벌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영적 지도자들을 올바로 존경하지 않고 그들의 영적 은사를 무질서하게 사용했다는 사실을 바울이 확인했으므로 바울이 편지를 쓰게 된다.
<내용 요약>
바울은 전형적인 인사말 후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편지의 본문을 두 단락으로 나눈다. 첫 단락인 2:1-3:13은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두고, 두번째 단락인 4:1-5:22에서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는 권면에 초점을 둔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의 상황을 자세히 언급한 후에(2:1-12), 자신이 복음을 전파한 방식을 넘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인 방식에 대해 언급하고, 그들이 말씀을 받아들인데 대해 감사하며 그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들의 헌신과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증거임을 상기시킨다(2:14-16). 동일한 박해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체류를 갑자기 중단하게 되었으며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강인함을 염려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2:17-3:5). 그러나 디모데가 도착하여 모든 일들이 잘 되었다고 보고했다(3:6-13).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살기 위해 필요한 세가지 중요할 방식을 상기시킴으로써 권면을 시작한다(4:1). 즉, 음란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고,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한다(4:3-12). 그 후에 데살로니가 교회에 큰 슬픔을 초래한 문제, 즉, 몇몇 형제들의 죽음을 다룬다. 그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이 누릴 유익을 강조하며(4:13-18) 주께서 재림하실 날을 대비하며 모범된 삶을 살 것을 권면한다(5:1-11). 이 서신은 간단한 마지막 권면, 소원을 비는 기도, 기도요청, 마지막 인사 등으로 끝을 맺는다(5:12-28).
<개요>
- 서론 (1:2)
- 감사 표현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사랑(1:2-3:13)
①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첫번째 감사기도(1:2-10).
② 데살로니가에서의 바울의 행동(2:1-12)
③ 복음을 받아들임에 대한 구체적인 감사(2:13-16)
④ 디모데의 임무와 데살로니가 교회와의 현재 관계(2:17-3:13)
3. 권면과 교훈(4:1-5:22)
① 윤리적인 권면들과 훈계들(4:1-12).
② 재림에 대한 교훈들(4:13-5:11)
③ 교회생활에 관한 교훈들(5:12-22)
4. 맺음 말(5:23-28)
<메세지>
데살로니가 전서가 가지는 중요한 하나의 목적은 바울과 성도 사이의 우정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관계가 잘못되었다든가 깨어질 위험에 처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목적을 위해 데살로니가 전서는 우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다. 그들이 칭찬 받는 믿음을 소지한 것에 대한 표시들, 유익한 것들을 상호간에 깊이 나눔에 대한 기억들을 성도들에게 상기시킴으로 우정의 관계를 확인한다. 이렇게 우정을 재확인하고 갱신함은 교회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바울은 회심자들에게 그들이 선생에 의해 잊혀지지 않았고, 냉소적인 사회와 맞서면서 스스로 알아서 돌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줌으로 그들을 견고케 세우려 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힘이 되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전의 삶의 방식과 결별하면서 기쁨과 함께 깊은 고뇌(1:6)를 경험했을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귀하게 여기던 세상 가치를 던져버리고 복음이라는 새로운 방식에 진입했을 때 “무신론적이고” ‘배타적인”주변의 압력이 팽배했을 것이고 적대감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이것을 아는 바울은 먼저 디모데를 보내 회심으로 인해 받게 된 압력에 굴하지 않고 제자도의 길에서 뒤돌아서지 않고 복음적 가치를 부여잡게 하는 것이 그의 특별한 관심거리였다(3:1-5). 이 일을 위해서 바울은 성도들이 지향하는 고차원적인 가치와 불신자들이 취하는 삶의 방식을 대조하면서(4:5) 그들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삶의 여정에 놓여있는지를 확신시킨다. 왜 옛 삶의 방식과 결별하고 제자도의 길에서 성화를 이루며 정진하는 삶이 그토록 유익한가? 왜 그들이 당시 그들 주변에 만연한 채 압박해오는 세속적 삶의 기준에 부응하기를 거부하고 복음편에 서서 애쓰는 삶을 힘써야 하는가?
첫째로 하나님의 평가가 사회적 평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의 날이 이를 때 하나님의 평가가 가지는 영원한 영향력을 생각하며 살 때 세속의 달콤한 속삭임에 매료되지 않고 복음과 함께 걷는 것은 매우 안전한 걸음걸이가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성도들은 현재를 살더라도 항상 하나님의 “그 법정”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인정만을 받는 존재는 아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며 살아갈 때 성도들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인정 또는 얻게 됨을 알아야 한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성도들이 “피차 권면하라”(5:11,14), “서로 덕을 세우라”(5:11), “서로 사랑하라”(4:9-10), “서로 위로하라”(4:18)와 같은 사도의 권면을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의 가치를 이 땅에 더욱 깊이 심어가는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권면한다. 회중안에서 자신이 소속되어 있고 격려 받고 있다는 느낌은 세상으로부터의 냉대와 오해를 이기는 실제적인 힘이 될 수 있기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성도들이 하나님을 바라봄과 동시에 상호간에 세워줄 것을 교훈한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들이 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거나 불신자들을 도외시한 것을 바울은 추천하지 않는다. 명백하게 사회로부터의 냉대가 가시화되고 세상의 방식과 맞서야 되는 상황이 빈번하게 도래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속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다가갈 것을 충고한다(3:12; 5:15). 그날에 하나님이 성도들을 향해 가지실 판단과 비교할 때 지금 갈등을 빚고 있는 외부인들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지만 그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불신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그들에게 성경적 유익을 끼칠 기회를 찾아야 한다. 즉 만남을 통해서 성도들의 정체성의 본질을 내면에서 과시함으로 인해 그들에 대한 사회의 의심을 제거할 수 있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존경을 되찾는 시발점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도들에 대한 사회의 견해 때문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멈추거나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을 타협하는 길에 들어서서는 안되겠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사회전체에 어떠한 유익을 주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그들과의 접촉점을 회피하는 것은 옳은 바 삶의 방식이 아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일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 면에서 주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과열된 정서 때문에 일상의 일을 기피하고 구제비로 근근히 살아가는 어떤 성도들은 문제가 있다고 바울은 지적한다(5:14).
교회와 성도가 이 땅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통치를 선포하고 함께 나누는 방법은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 삶의 옳음을 증거함으로 이루어진다. 이제는 아무리 입으로 크게 외쳐도 복음전선이 확대되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의 입으로 전함과 함께 우리가 불신자가 가득한 세상속으로 들어가서 복음의 위력이 나의 삶을 변혁시키는 현장을 보이고 나눌 때 복음전선은 확대 되어진다.
우리는 본장에서 논의한 이 두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첫째로 불신자들의 삶의 태도에 동화되어 복음적 색깔을 희석시키거나 상실해서도 안되지만 둘째로 우리들이 불신자들의 삶속에 깊이 관여함으로 복음이 주는 광대한 유익을 세상가운데 확대시킬 마음의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고 수동적 신앙태도에서 탈피해서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이 땅을 “하나님의 맛”으로 변모시키고 “하나님의 색깔”로 덧칠해가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