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로마서 개관– 이신칭의와 균형 잡힌 신앙
이번호부터는 서신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서신이란 편지를 의미하는 데 신약성경에는 13개의 바울 서신과 8개의 또 다른 서신이 있다. 고대로부터 서신들은 두 그룹, 곧, 바울 서신과 그 밖의 서신으로 나뉘어 긴 서신부터 짧은 서신 순서로 배열되었다. 오늘은 로마서를 함께 다루어 보겠다. 로마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또 지루하기로 유명하다. 박진감 넘치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다루다가 로마서를 대하면 김이 빠지는 듯하다. 그러나 로마서는 성경의 다른 어떤 책들보다 세계역사에 극적인 방식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386년 여름 밀란의 수사학 교수였던 어거스틴은 친구 알리피우스의 정원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목놓아 울고 있었다. 그때 그는 집 근처에서 한 아이가 “ 톨레레게! 톨레레게!(집어 들어 읽어라! 집어 들어 읽어라!)라며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곧 바로 로마서 두루마리를 놓아 둔 벤치로 달려가 두루마리를 들고 로마서 13:13-14의 강력한 말씀을 읽기 시작했고 그 즉시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기독교 역사상 로마서를 통한 이러한 변화는 수도 없이 일어났다.
<저자, 기록연대>
로마서는 바울 사도가 기록한 서신으로 알려져 왔다. 19세기 중반의 주석가인 챨스 핫지는 바울 저작을 입증하는 강력한 내적 외적 증거를 고찰한 후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로마서보다 그 진정성이 분명한 문헌은 성경에도 없고 세계 고대 서적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로마서는 바울 사도가 기록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로마서15장과 사도행전20장에 나오는 내용으로 보아 바울은 마게도냐를 지나 3개월동안 그리스를 여행했다(행20:1-3). 그는 아마 고린도에 머물렀을 때 대부분의 시간을 로마서를 기록하는데 보냈을 것이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보면 로마서는57-58년경에 기록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경>
로마서는 바울 사도가 로마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바울 시대에 로마제국의 전체인구는 대략5,40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탈리아 반도에 거주하는 주민은 약600만명이고 그 중에서 로마시민은 약100만명이었다고 한다. 그 중에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수는 약5만명정도였다고 본다. 로마시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상당수는 기원전 64년에 폼페이우스장군이 유대를 정복할 때에 전쟁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의 자손들이었다. 또한 신약시대에는 특히 제국의 동부지역으로부터 많은 외국인들이 생업을 찾아 로마시로 몰려왔는데 유대인들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로마시에 복음이 처음으로 언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사도나 선교사가 이곳에 복음을 전파해서 세운 것이라기 보다는 자생적으로 발생했다고 본다. 아마도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에 이주해 옴으로써 또는 어느 유대인이 로마와 예루살렘을 왕래하면서 복음을 믿음으로써 자생적으로 교회가 설립되었을 것이다.
<기록 동기>
첫째로 교회공동체적인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설립된 로마교회가 첫번째로 위기를 맞이하는데 그것은 A.D.49년에 있었던 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유대인 추방령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로마에 있는 비기독교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마찰이 발생했다. 이 문제로 인해 유대인 간의 평화가 깨어지자 황제는 다름아닌 세계의 수도 로마에서 시민들 간의 일치가 깨진다고 보아 당사자들인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한다. 이제 로마교회는 이방인들만 남은 교회가 되었고 유대 그리스도인들 없이도 계속 성장했다. 그런데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죽음 이후 추방령이 철회되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왔지만 이미 로마교회는 이방인이 주류를 이룬 교회였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게 이방인 그리스도인 위주로 개편된 교회에 적응해야 했고,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들어온 관습에 익숙하지 않아 동화되기가 쉽지 않았다. 로마서에 담긴 바울의 말씀은 이렇게 공동체속에 발생한 갈등을 “겨냥한 말씀”이다. 그래서 로마서에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에 관한 언급이 많이 등장한다.
두번째로 바울의 개인적인 목적이 담겨있다. 바울은 로마서를 선교의 다음 페이지를 위한 지렛대로 사용한다.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선교사역이 분기점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마게도냐와 그리스의 북서지방)까지 복음을 성공적으로 전파한 후에 바울은 동반구에서의 그의 사역이 일단락 되었음을 감지하고(롬15:19) 이제는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새로운 땅, 즉 이탈리아에서 갈리아를 거쳐 스페인에 이르는 서반구를 바라보고 있었다(롬15:20-24).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선교의 다음 장을 위해 로마교회 성도들의 지원을 얻고 싶었다. 자신이 세우지 않는 교회로부터 이상적인 후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목회관을 가지고 있고 어떤 복음을 전파하는지를 설명하고 증명하는 것이 먼저 있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다른 지역에서 오해를 받은 바울이었기에 자신에 대한 의심을 해소시킬 만한 충분한 복음적 논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번째로, 목회적 상황이다. 바울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해야 하는 제사장적 의무를 성취하는데 있어서 근복적인 여러 복음의 진리들을 로마신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싶었다. 더우기 로마서16:17-20에는 로마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교사들로 인해 바울이 염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위험에 직면해 있는 로마교회를 바라보면서 바울은 복음의 본질에 대해 신중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로 인해서 로마서에는 복음의 본질을 가장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들은 바에 의하면 로마교회의 신자들 사이에 “강한자”와 “약한자”사이의 괴리감이 있었다. 이방제사에 드려진 제물인 고기를 먹는 문제와 특별한 날을 지키는 문제로 갈등하고 있었다(롬14-15장). 그래서 이러한 목회적 목적에 의해서 바울은 로마서를 위해 펜을 들게 되었다.
<개요>
1) 서언.(1:1-15)
2) 주제: 하나님의 능력과 의를 나타내는 복음.(1:16-17)
3) 보편적인 죄와 그리스도안에서의 이신칭의.(1:18-4:25)
(1) 이신칭의의 필요성.(1:18-3:20)
① 모든 이방인은 죄인이다. (1:18-32)
② 모든 유대인은 죄인이다. (2:1-3:8)
③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3:9-20)
(2) 하나님의 선물인 칭의.(3:21-4:25)
①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짐.(3:21-26)
② 행위가 아닌 믿음에 근거함.(3:27-4:25)
4) 복음이 주는 유익.(5:1-8:39)
5) 이스라엘의 복음 거부.(9:1-11:36)
6) 삶을 통해 나타내는 복음의 실천적 의미.(12:1-15:13)
7) 결어.(15:14-16:27)
<메세지>
로마서는 마틴루터가 그를 가르쳤던 중세의 카톨릭 주의에 대해 재고(再考)케 하고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신칭의)에 대해 성경적 신학을 회복하도록 이끈 소중한 책이다. 로마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구원이 우리들의 선한 행동의 댓가로가 아니라 범죄한 인간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상에서 구원을 이루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았음을 강조하는 책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바처럼 신학적인 관심과 목적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로마서는 바울이 그 동안 깊이 오랫동안 다듬어온 많은 중요한 주제들을 일괄된 표현으로 전달하고 있다. 바울은 먼저 이 이신칭의의 섭리 아래서 만민이 동등하게 부르심을 받았음을 선언한다. 이제 복음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질 수 없고 하나의 연합된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깨달아야 한다.
아마 율법 준수함을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을 유지하려는 유대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부여잡고 있었다. 반면에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일종의 승리주의 신학에 젖어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경륜속에서 유대인들을 대체하고 교회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의 규례들을 마치 미신적인 금기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정확하게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 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오래 전에 하나님의 언약속에 있었던 유대인들이나 새롭게 하나님의 언약속에서 구원의 반열에 동참한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구원의 방법은 오직 하나라는 점이다. 바로 이신칭의! 하나님이 이루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 사실만이 그들에게 중요하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선택주의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주의는 모두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된 것이다. 이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서로의 다름을 붙잡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통해 의로운 삶을 위한 인도하심과 능력주심을 덧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는 1-11장까지 교리적인 면에 강조를 두었지만 12장부터는 실천적인 면을 강조해서 이신칭의 받고 난 후에 신실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야만 함을 강조함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을 보고 있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과의 화해로 인해서 회복된 관계를 누리는 것이 첫번째임에 분명하지만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의 자녀의 형상으로 변화되어가며 또한 공동체와 세상가운데서 온전함과 평화를 경험하는 사람으로 성숙시킴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럼으로 로마서에서 말하는 “칭의의 복”은 단순히 죄사함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붙잡혀서 품격 높은 공동체 일원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견고하게 심어가는 진정한 삶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칭의가 우리에게 주시는 특권임과 동시에 거룩한 의무의 부과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한량없는 은혜를 받았으면 그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 삶의 새로움”을 나타낼 때 비로서 구원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교리부분(1-11장) 이후에 그 교리에 근거한 건전하고도 능력 있는 삶에 대해 12장 이후에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우리의 구원받은 삶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해 준다.
이제 이 삶이 이 시대의 희망인 우리에게 넘겨져 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 땅의 희망으로 부끄럼 없이 우뚝 설 것인가? 사도의 가르침과 같이 우리의 죄성을 고백하고 주님의 십자가 밑에 엎드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고 기쁨을 누리는 것만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이제 이 시대의 헛된 가치관에 대항하는 참된 믿음의 공동체를 견고케 세우고 힘을 합하고 기도를 합하여 이 땅에 모범을 보이며 살아갈 때 우리의 칭의됨은 그 의미를 발견하고 진정 하나님과 그 은혜를 감사하는 삶이 될 것이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