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베드로후서 개관: 이미와 아직의 긴장
<저자와 기록 연대>
본서의 저자는 베드로전서의 저자와 동일한 사도 베드로이다. 본서는 베드로의 생애 후기쯤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데 1장에서 여러 차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명시한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1:13),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 앎이라”(1:14), “내가 떠난 후에라도”(1:15) 등이 이 서신이 저자 베드로의 유언적 편지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베드로후서의 기록 연대는 그의 생애의 끝날 무렵이라고 볼 수 있겠다. 교회의 전통은 베드로 사도가 바로의 박해기간(64-66년)에 순교했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따라서 베드로의 죽음은 65년 또는 66년으로 보는 것이 가장 최선이며 본서는 베드로가 순교하기 직전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록 장소 및 수신자>
베드로후서가 기록될 가능성이 가장 큰 장소는 로마이다. 베드로전서와는 달리 후서에서는 수신자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여러 정황에서 베드로후서가 베드로전서의 수신지와 같다고 추론할 수 있다. 비록 지중해의 동쪽 끝은 아니더라도 제국의 서방이 아닌 동방지역으로 베드로후서의 수신자들은 전서와 같이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임을 추측한다.
<기록 동기>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전서와 전혀 다른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베드로전서가 핍박에 직면한 독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기록된 반면에 후서는 그들에게 거짓교사들을 경고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사도 베드로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하는 상황에서 교회들 가운데 퍼지고 있었던 거짓 가르침에 대항해서 말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거짓교사로서 그들의 제자들을 모으고(2:2)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안으로 참된 신자들을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다. 그들의 가르침의 중심에는 종말론적 회의론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두번째 오심(파루시아)을 명백히 부인했으며 사도들의 증거를 훼손시키고자 했다(1:16; 2:18).
<특징>
베드로후서의 유다서와 유사한 부분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모든 거짓교사들을 비난하는데 치중하며 표현도 비슷하다. 다음과 같은 두 서신 사이의 대등한 구절을 주목해 보자.
거짓 교사들은 옛적부터 정죄 되었음.(벧후2:3/유다서4)
그들은 주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한다.(벧후2:1/유다서4)
심판 때까지 갇혀 지내는 천사들.(벧후2:4/유다서6)
큰 악에 대한 심판의 예인 소돔과 고모라.(벧후2:6/유다서7)
권위(주관하는 이)를 업시 여긴다.(벧후2:10/유다서8)
천사들은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않는다.(벧후2:1/유다서9)
거짓교사들은 망치는 암초다.(벧후2:13/유다서12)
바람에 밀려 다니면서 비를 내리지 않는 구름.(유다서12)
물 없는 샘이요 폭풍에 밀려가는 안개.(벧후2:12)
경건하지 못하게 욕정을 따라 살면서 조롱하는 이들.(벧후3:3/유다서18)
<구조 및 개요>
베드로후서는 거짓교사들의 특별한 거짓 가르침을 부각시키며 그것이 주는 심각한 폐해를 지적하면서 교리와 믿음을 수호하려고 애쓴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가? 1장에서 거짓 교사들은 “예언이 없다”(사도들에 대한 영감에 의한)고 말하면서 성경의 영감설을 부인한다. 2장에서는 “심판이 없다”고 주장함으로 도덕적 삶이 불필요하다는 쪽으로 잘못된 결론을 유도한다. 3장에서는 파루시아(예수님의 다시 오심)가 없다고 하여 악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게 한다. 이것을 중심으로 개요를 파악하면 다음과 같다.
- 여는 말(1:1-15)
(1) 인사말(1:1-2)
(2) 하나님이 약속과 요구(1:3-11)
(3) 유훈적 성향(1:12-15)
2. 서신의 본론(1:16-3:10)
(1) 파루시아(예수님의 다시 오심)의 확실성이 변호됨(1:16-21)
(2) 파루시아의 부인은 심각한 심판을 초래함(2:1-22)
(3) 파루시아의 자연이 설명됨(3:1-10)
3. 끝맺는 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최종적 시사점(3:11-18)
<내용>
베드로후서 1:3-21은 하나님께서 신자의 삶과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신다는 관점에서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덕목을 추구하라는 베드로 사도의 도전을 설명한다(1:3-11). 그리고 베드로가 이 서신을 기록한 목적을 언급한다(1:12-15). 끝으로 파루시아(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와 관련된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변호와 반격을 가한다(1:12-21). 2장은 변경된 형태속에서 유다서와 상당 부분 일치하는데 거짓 교사들을 소개하고 그들에 대한 기본적 묘사를 제공한다. 2장의 두번째 단락(2:3a-10a)에서는 거짓 교사들을 정죄하지만 독자들의 마지막 운명에 대해 위로하기도 한다. 이어서 거짓 교사들의 오만과 음탕함에 초점을 둔 묘사가 제공되고(2:10b-16), 넷째로 베드로는 마지막 묘사와 거짓 교사들의 정죄로 종결 짓는다(2:17-22). 3:1-13은 논쟁적인 주제인 이단의 특성에 대해 설명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독자들에게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촉구한다.
전체적으로 본 서신은 그리스도의 두번째 오심을 부정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반박하려는 베드로의 열망과 그리스도인의 미덕에 대한 신자들의 추구에 관한 베드로의 관심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주요 메시지>
편지를 쓰게 된 환경이 그 내용을 결정한다. 베드로가 후서를 기록할 때의 교회상황이 어떠했을까? 바른 신앙을 져버린 거짓 교사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과 계시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확신을 가지고 성도들을 미혹했다. 따라서 먼저 지식이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지식이란 단순히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투신할 믿음체계이다. 이것이 흔들리면 자연스럽게 신앙과 삶도 흔들린다. 바른 말씀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호4:6). 따라서 사도 베드로는 7번씩이나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언급한다. 이렇듯 참 지식이 없었던 거짓 교사들의 삶의 특징은 무엇이었나? 말씀으로 자신을 훈련하고 연마하는 일에서 지극히 자유하다고 외쳤고 육체적 정욕을 허락하는 데도 자유하다고 했다. 그야말로 무책임한 방임과 무절제였다.
베드로후서2장에서 생생하게 정죄되는 그들의 부도덕한 생활방식은 전적으로 신학적으로 잘못된 믿음의 결과였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들은 파루시아(예수님의 다시 오심)를 부정하고 최후의 심판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청산할 그날이 없으니 도덕에 대해 걱정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이렇듯 신학적 오류는 곧 도덕적 오류로 이어졌다. 올바른 믿음이 올바른 실천을 위한 본질적인 기초가 됨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베드로 당시 교회들이 겪는 고충이었다. 신앙과 신학의 천박함으로 무장한 일부 거짓 교사들에 의해 건전한 신앙위에 거룩한 삶을 쌓는 삶의 패턴을 포기하고 세상의 악이 교회안에 고스란히 침투하도록 자리를 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거짓 교사들이 종말론적 신앙을 던져버리고 파루시아에 대한 거부로 일관할 때 그들은 기독교적 믿음의 토대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의 관점에서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파루시아)에 대한 기대와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초대교회에서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선포 되엇던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베드로 당시에도 고민하는 문제였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하나님의 시간계산법이 인간의 시간계산법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3:18). 다시말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인간의 계산에 따르면 지연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시간표에 있어서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무궁 무한한 시간표에 비하면 우리의 시간계산법은 아주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에게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 기간(예수님의 승천 후 2,000년)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하나님편에서는 짧지만 인간편에서는 장구한 세월이니 말이다. 그것은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다(3:9).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지금 진행되는 역사를 종결시키신다는 것은 곧 더 많은 이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의 종결을 의미한다. 여기에 우리의 사명이 있다. 분명히 도래하는 파루시아를 바라보면서 그것이 지체될 때 우리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에 동참하고 복음안에서 생명을 회복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그냥 앉아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으로 인해 새 질서가 출현되기 전에 그곳에 동참할 많은 사람들을 세우는 일에 헌신할 소명과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명백히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중간시기에 살고 있다. 예수님의 처음 오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무엇이었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우리 각 개인의 악을 제거하시고 하나님 백성의 자리에 세우셨다. 그렇지만 세상의 악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성도들마저 삼키려는 악한 세력의 물결이 넘실거린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해 있다. 과연 우리는 이때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이미와 아직의 긴장”속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모든 악을 소멸하시는 그때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히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새로운 존재가 되고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수를 휠씬 상회하는 다수의 악한 무리들이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 새로워진 새 하늘과 새땅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회의론자들과 악한 방식으로 무장한 불신자들이 횡보하는 세상의 한 복판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상황을 드러내 보여주면서 성도들에게 무슨 믿음의 도전을 주는가? “이미와 아직”의 관계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존재로서의 우리가 해야 할 삶의 처방을 알려준다. 바로 바른 행실이 이러한 “이미와 아직의 긴장”속에 사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요 주님의 파루시아를 대비하는 대비책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고 신의 성품에 참여해야한다”(1:4)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가? 이 불신의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당당하게 세상의 한복판에서 육신의 욕심을 따라가는 실망스러운 인품을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삶과 가르침, 행적속에 나타난 “신의 성품”을 모방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서 “이미와 아직”사이에 존재하는 우리시대의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고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후서의 종반부에서는 이러한 주님을 닮은 윤리적 권면을 통해 바른 신앙관에 도전하고 또한 거센 불신앙의 격류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완성을 바라보며 사는 지를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마무리하며 격려한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3:11-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3:14).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