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요한계시록 개관: 이 땅의 진정한 대안 공동체
의심할 여지없이 요한계시록은 성경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인 책이다. 책을 열면 어떤 것은 스릴 넘치고 어떤 것은 소름 끼치지만 모두 흥미로운 이미지들이 폭포수같이 떨어지며 흡사 색깔과 숫자와 형태를 보여주는 당혹스러운 만화경 같기도 하다. 이 책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예술에 영감을 불어넣었으며, 가장 놀랍고 강력한 신학적인 사상들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두 가지 잘 알려진 모델이 있는데 첫째는 아마 대부분이 독자들이 생각하듯이 요한이 어느 한 시점에서 영화필름과도 같이 환상을 체험했고 천상의 존재들과 대화하며 그들과 동행하며 기록한 어느 순간의 계시라고 보는 견해일 것이다.
다른 견해는 요한 계시록이 저자의 창조성과 구약과 다른 묵시 문학에 대한 해석작업을 통해 만들어낸 문학적 산물이라는 견해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견해를 균형 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 요한이 계시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 순간의 계시를 옮긴 것이라기보다는 그에게 주어진 환상을 오랜 시간 동안 구약과 당시 상황을 신중히 숙고해서 교회에 전달한 책이라고 봄이 타당한 듯하다.
<저자>
대부분의 학자들은 세명의 요한을 후보로 인정한다. ①사도이며 세베대의 아들인 요한 ②장로 요한 ③선지자였던 알려지지 않은 요한. 그 중에서 초대교회의 전통은 만장일치로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을 계시록의 저자로 인정한다.
<수신자>
요한은 그의 환상에 대한 기록을 소아시아에 있는 로마의 속주에 위치한 일곱 교회에 보냈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소아시아에 있는 모든 교회를 의미하는 상징 수이다. 뿐만 아니라 일곱 교회를 기록된 대로 순서를 정한 것은 지리적 위치와 교통과 관련이 있는듯하다.
<기록 연대 및 장소>
전반적으로 우세한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는 요한계시록의 기록연대로 가장 알맞은 시기를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통치기간인 90년대 중반을 제시한다.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95-96년경에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동안 받은 비전에 순종해서 묵상하고 기록했다.
기록장소인 밧모섬에서 요한은 환상을 받는데 그 곳은 밀레도의 서쪽 40마일, 그리고 에베소 남서쪽 60마일경에 위치해있다. 무인도는 아닐지라도 바위로 된 지형은 밧모섬을 유배에 이상적인 장소로 만들었다. 고립된 섬으로의 추방이나 유배는 로마제국에서는 비교적 일반적인 형태였다.
<기록 배경>
요한계시록은 참된 신앙을 유혹하는 이단사설들과 투쟁하고 황제 숭배로라는 신앙적인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교회들에게 위로와 격려 그리고 경고를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 먼저 교회의 내적 상황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각각 이단사설들로 말미암아 흔들리고 있었다. 또한 교회의 외적 상황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는데 그 위협은 13장과 17장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여기서 우리는 황제 숭배건을 놓고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로마제국간의 갈등을 보게 된다. 신이 되고자 하는 제국의 황제와 그에 반대하는 교회간의 갈등은 점점 고조되고 결국 위협과 박해를 받게 되는 소아시아의 교회와 성도들이 당면한 신앙적 위기는 첨예화된다.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이 그들을 위협하는 외부적인 신앙적 위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확고한 신앙에 서기를 원해서 붓을 든다.
<상황>
요한계시록내에는 교회내부의 상황뿐 아니라 시대적인 거대한 흐름을 전제로 한 내용들로 가득 차있다. 그것은 로마자체의 이념과 황제 숭배였다. 당시 로마제국내의 모든 속국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제국의 이념에 설득되어 있었다. 즉 제국의 백성들이 로마의 통치에 잘 복종하면서 세금을 잘 내고 법을 잘 지키고 살면 로마는 강력한 힘으로 제국 백성들의 안녕을 지킬 것이고, 제국내의 시민들에게 자유로운 무역을 통한 경제적 번영과 평화를 약속했다. 그것이 바로 로마가 제국의 백성들에게 강력하게 선전하였던 팍스로마나였다.
이 충성심은 로마황제에 대한 신격화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로마황제는 로마의 신들이 축복을 내리는 중재자였고 그들 자신이 역시 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로마황제는 여러 방식으로 제국내 평화와 번영의 원천으로 간주되었고 마땅히 최고로 충성 받는 대상이 되어야 했다.
일곱 교회가 속한 소아시아에서 이 문제는 더더욱 중요했다. 로마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거주민들에게 충성심을 받아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런 충성심을 표현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공적인 신전에서 황제에게 분향하며 숭배하는 것이었다. 지역의 지도자들의 위치는 황제에 대한 그 지역주민들의 충성심을 끌어낼수록 더욱 공고해져 갔다. 따라서 로마는 그 자체로 당시 주민들의 번영의 토대였고, 로마황제 숭배는 충성심의 발로였다. 이러한 주류문화 속에서 살아가며 믿음을 증명해야 할 존재들이 당시의 성도들이었다.
<특징>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미스테리한 내용으로 가득찬 난해한 책이 아니다. 그 당시의 1차적 수신자들인 일곱 교회 성도들은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자! 만약에 전혀 알 수 없는 부호와 이미지로 글을 썼으면 누가 그 글을 읽고 용기를 얻겠는가? 이해할 수 없는 책은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이나 별반 다름없지 않는가? 요한은 당시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구약적 이미지와 당시 사회에 존재하는 현상들을 통해서 서신서를 전개한다.
먼저 요한계시록에는 수 많은 구약적 배경이 존재한다. 헬라어 신약성경판은 구약본문의 인용과 암시의 도표를 싣고 있는데 이 목록에 따르면 전체가 405절인 요한계시록에 분명하게 구약을 암시하는 대목이 무려 676개가 나온다는 통계를 보여준다. 가장 번번하게 이사야(128번), 시편(99번), 에스겔(92번), 다니엘(82번), 그리고 출애굽기(53번)에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계시록은 풀기 어려운 암호로 가득한 책이라기 보다는 구약성경과 당시 시대상황을 살펴보면 메시지 파악이 가능하도록 쓰여진 책이라는 것이다.
두번째로 계시록에는 숫자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 역시 깊은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7이란 숫자가 계시록에 많이 등장한다. 독자들이 이해하듯이 7은 완전수이다. 일곱 교회에 보낸 메시지(2,3장), 일곱인(6-8장), 일곱 나팔(8-11장), 일곱가지 중요한 이적(12-14장), 일곱 대접(15-16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신다.
또한 일례로 666에 대한 해석이 문제로 부각된다.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많은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계시록13:18의 666을 받아서는 안되는 짐승의 표인 바코드로 말하면서 앞으로 우리 몸에 바코드를 받으면 절대 안된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 뜻일까? 1세기 청중들에게 2000년 이후의 바코드를 이야기했을까? 또는 어떤 사람들은 이 666을 히틀러, 교황, 빌게이츠라고도 한다.
성경적 대답은 666은 하나님의 완전수인 7에서 항상 1이 부족한 수의 3중적인 반복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당대에 사탄적 세력이 날뛰어도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꺾을 수 없다는 상징이다. 또 한가지 해석은 “네로 가이사”를 음역하면 그 값이 666이 된다. 제국의 성격이 이러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아무리 하나님을 대항해서 날뛴다 해도 7을 뛰어넘지 못하는 6의 상중적 반복일 뿐임을 보여준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표현(이솝세피즘)에 아주 익숙했었다. 당시 상황에 돌아가서 살펴야지 현대의 일정한 사건과 연결하는 것은 성경을 바로 읽는 태도가 아니다.
셋째로 계시록은 단순히 계시를 받아 적은 기록이 아니다. 요한은 자신이 받은 환상의 경험을 오랜 기간 동안 묵상하면서 구약성경의 예언의 틀과 당시 로마제국의 상황, 당시 로마제국내의 소아시아 교회들이 처한 문제들에 비추어 신중하게 해석해서 완전하고 정교한 문학작품으로 써서 전달한 것이다. 따라서 계시록을 읽을 때는 먼저 그 이미지들이 시공을 초월한 상징들로 이해하기 보다는 당시 일곱 교회가 처한 상황성을 고려하고 이해하면서 읽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마치 그것이 실제의 역사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날 사건으로 해석해보려는 유혹에서도 벗어나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의 이단 중 일파는 계시록 14:1의 144,000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자신들의 그룹에 들어와야 144,000명에 포함된다고 선전한다. 그런데 144,000은 12 X 12X 1,000으로 이루어진 숫자이다. 독자가 예상하듯이 12가 중복된 것은 구약과 신약시대의 12지파와 12사도이고 1,000은 완전수 10의 3배수이다. 다시 말해 144,000이란 수는 어린양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형성된 하나님의 백성들, 로마시대의 우상숭배에 저항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맛보는 당대의 성도와 앞으로 오는 모든 성도들의 충만한 수를 의미한다.
이렇듯 요한계시록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풀기 어려운 암호나 역사의 진행과정을 순차적으로 그려낸 시나리오가 아니라 당시의 성도들을 1차적 대상으로 하되 모든 세대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승리를 맛보도록 인도하는 격려와 위로와 경고의 책이다. 용과 짐승과 사탄이 중심이 아니라 이 세력을 정복하신 어린양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중심주제가 된다.
<주요 메세지>
앞서 언급했듯이 계시록은 1세기 당시에 내외적인 문제와 압박에 시달리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위협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준 편지형태의 글이다. 그들이 속한 상황속에서 본질적인 질문은 “누가 경배를 받아야 하는가?”였다. 요한계시록은 마땅히 하나님과 어린양만이 영광을 받으실 존재이고 황제숭배를 비롯한 모든 우상숭배는 본질적으로 생명공동체를 파괴하는 실체라고 선포한다. 지금도 그 질문은 계속된다. 사탄의 1세기 당시에 막강한 로마제국과 신적인 중재자로 여기는 황제를 통해 예배공동체를 훼파하려했지만 지금은 또 다른 형태로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있다. 무엇이 우리의 신앙토대를 흔들고 있는가? 무엇이 우리시대의 강력한 우상숭배의 대상인가? 맘몬(돈의 신)을 추종하는 마음속에서, 또한 커지고 높아지기를 탐닉하는 은밀한 욕망속에서 우리의 삶의 중심이 경배 받으실 구주로부터 멀어져 있다면 우리 역시 1세기 후반의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우상숭배와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헤메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로마제국이 그들의 이념을 통해 세상을 지배했듯이, 오늘날의 우리들의 세대가 선포하는 이념, 즉 커짐의 이념이 이 시대를 휘젓고 부추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요한은 탐욕과 폭력에 기초한 제국을 대신할만한 대안 공동체로 교회가 설 것을 강권했다. 무엇을 통해서인가?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순결하신 삶을 좇아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넘치는 대안적 사회를 갈망하고 또한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완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탐욕적인 세대속에서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닮아 순종적 죽임에 진입하는 오늘날의 성도의 삶에 역시 집중한다.
로마시대를 방불케 하는 탐욕과 기만으로 견고하게 확립된 세상체제 속에서 죽임 당하심으로 승리하신 우리 주님의 길을 따라가려고 결단할 때 요한계시록은 먼 옛날의 이야기나 먼 훗날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선명한 교훈과 초대가 될 것이다. 이것이 1세기 로마의 견고한 이념을 극복하고 세상에 참된 복음을 전해주었던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그 기백을 이 땅에 펼쳐나가는 대안 공동체를 향한 굳센 걸음이 될 것이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