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방문기(1)
스리랑카의 분쟁, 미해결 과제
아시아의 한인디아스포라교회가 사명을 자각하고 건강한 교회로 세워져 하나님나라 확장에 동참을 지향하는 ‘2017 한인디아스포라포럼 in 스리랑카(Korean Diaspora Forum in Sri Lanka)’가 Korean Diaspora Forum(KDF) 주최로 2017년 10월 10일(화)부터 13일(금)까지 스리랑카 콜롬보 소재의 호텔에서 “종교개혁 500주년과 한인디아스포라 교회 개혁과제”란 주제로 열려 성료했다. 호주 시드니에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루 공항을 거쳐 도착한 섬나라 스리랑카 콜롬보 공항에서 드는 첫 생각은 매우 습했다는 것이며, 공항을 빠져나가며 느껴지는 거리는 한국의 70년대를 연상케 했다. 잠시 머물며 일정을 가졌던 스리랑카를 생각하며 방문기를 나눈다_편집자 주.
스리랑카, 인도양의 북아일랜드?
섬나라 스리랑카(Sri Lanka)는 ‘셀렌디브’(Serendib), ‘실론’(Ceylon), ‘인도가 흘린 눈물방울’, ‘찬란하게 빛나는 섬’, ‘불법(佛法)의 섬’, ‘동양의 진주’ 등 많은 애칭을 가지고 있는데 방문해 보니 그 이면에는 지난 13년간 잔인한 민족·종교분쟁에 의해 상처를 입은 자국이 있었으며, 400여 년간 영국의 식민지로 살았던 경험이 있는 스리랑카는 서구인들에게 ‘인도양의 북아일랜드’로 여겨지고 있다.
국명은 ‘스리랑카 사회민주주의 공화국’(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으로 면적은 66,000 sq km, 인구 1,800만명(연증가율 1.5%), 수도 콜롬보(Colombo; 120만 명), 민족은 싱할리족 74%, 타밀족 18%, 무슬림7%, 언어는 싱할리어, 타밀어, 영어 사용, 종교는 불교69%, 힌두교15%, 이슬람교8%, 기독교8%, 정부형태는 민주주의다.
국내총생산(GDP)는 US$ 401억 달러,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US$ 1,972달러, 연성장율은 6%, 물가상승률은 18%, 주요생산품은 의류, 차, 섬유, 보석, 고무, 관광산업, 주요교역국은 미국, 영국, 일본, 한국, 중국, 인도 등이며, 통화는 ‘스리랑카 루피’(rupee)다.
스리랑카 입국시 스리랑카에서 발급하는 비자를 받아야하며, 보건위생(콜레라, 간염, 말라리아 등)에 예방 및 주의가 요망된다. 시간은 한국이 스리랑카보다 3시간 30분 빠르며, 전압은 230-40V: 50 Hz, 도량형으로 미터제를 사용한다.
스리랑카의 국기를 보면 스리랑카의 다양한 민족과 종교, 그리고 그 중요성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스리랑카의 국기는 1972년에 제정되었다. 국기 왼쪽의 초록색 줄과 주황색 줄은 각각 무슬림‧무어족, 타밀족을 그리고 갈색 직사각형은 다수인 싱할라족을 뜻한다. 노란색 테두리는 스리랑카인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갈색 직사각형 속 사자문양은 싱할라족의 상징이자 용맹함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됐다고 한다. 사자문양의 네 귀에 있는 황금빛 보리수 잎은 불교의 상징이다.
스리랑카의 3분의 1인 북부와 동부연안은 출입금지구역으로 아주 위험하다. 섬의 남부와 남서부, 고원지대는 대체적으로 평온했지만 1995년 11월, 정부군이 자프나반도에서 타밀호랑이를 몰아낸 후로 테러공격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그 중에는 1996년 1월 80명이상이 죽고 1000명이상이 부상한 스리랑카 중앙은행의 자폭테러와 1996년 7월 70명이상이 죽고 600명가량이 부상한 열차 폭탄테러도 있었다. 물·불안가리는 그들의 테러행위는,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할 필요가 있을 때는 여지없이 또 자행될 것이다.
대부분의 서방국가들은 자국민에게 불필요한 여행은 가급적 삼가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외국인은 지금까지 특별히 테러공격의 대상이 되진 않았지만, 타밀타이거는 관광산업을 경제적 공격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실제로 한 타밀 분파집단은 외국인을 공격대상으로 삼겠다고 위협해 왔으며 관광객들에게 ‘콜롬보공항을 보이코트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었다.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전형적인 열대
거대한 인도대륙 남쪽 끝에서 흘러나온 커다란 눈물방울처럼 생긴 스리랑카의 옛이름은 실론이다. 실론섬은 인도반도 남동부의 인도양 상에 있는 홍차(紅茶)의 산지로서 유명한 곳이다. 섬은 진주조개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중앙에서 약간 남쪽에 표고 2,524m의 피두루탈라갈라 산과 항해자들 사이에 잘 알려진 표고 2,243m의 애덤스산이 있는데, 이들 고봉을 중심으로 산악지대가 펼쳐져 있다. 북반부는 넓은 구릉지대로 남부의 산악지대와는 대조적이다. 섬은 적도에 가까워 연중 기온이 높고 강우량이 많다. 하계의 계절풍은 남서지방에, 동계의 계절풍은 북동부에 비를 몰아온다. 특히 하계에는 강우량이 많아 남서부의 산악지대에는 연간 3,000-4,000㎜에 달하는 지역이 있다.
스리랑카는 50Km 너비의 포크해협(Palk Strait)을 사이에 두고 인도와 떨어져 있다. 물론 이 해협에는 아담의 다리(Adam’s Bridge)로 알려진 일련의 작은 산호초 섬들이 존재한다. 스리랑카는 길이가 350Km, 너비가 고작 180Km 밖에 되지 않는 섬이며, 아일랜드, 웨스트버지니아, 테즈메이니아 등과 비슷한 면적을 가지고 있다.
섬의 남반부는 수려하고 울퉁불퉁한 고원지대로 덮여있으며, 북반부 전역은 고원지대 가장자리에서 자프나(Jaffna)까지 뻗쳐있는 큰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높은 산은 누와라 엘리야(Nuwara Eliya) 근처에 있는 2,524m 피두루탈라갈라(Pidurutalagala) 산이며, 가장 긴 강은 섬의 중앙부에서 시작하여 트링코말리(Trincomalee)에 위치한, 인도양까지 흐르는 마하웨리(Mahaweli) 강이다.
가장 좋은 해변은 남서부, 남부, 남동부에 위치해 있다. 흑단, 티크, 비단목과 화려한 난초 등이 남서부 울창한 열대우림에서 자라고 있다. 내한성의 초원, 진달래, 외소한 산림은 서늘하고 다습한 고원지대에 주로 분포하며 관목과 초원은 북부의 건조지대에 펼쳐져 있다.
야생동물이 매우 많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코끼리 외에 표범, 사슴, 원숭이, 나무늘보, 멧돼지, 코브라, 악어, 듀공, 거북 등이 서식한다. 스리랑카는 휴식을 위해 겨울철 북부에서 초호(礁湖), 습지대, 조류보호구 등지로 떼 지어 이동하는 플라밍고를 비롯한 철새가 계절마다 거쳐 가는 터전이다. 새를 관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는 1월부터 4월 사이이다.
스리랑카는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되는 전형적인 열대 나라지만 두 가지 계절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지역에 따라 다양한 기후가 나타난다. 얄라(Yala) 시즌(5~8월)에는 남서 몬순이 불어와 남부, 서부, 중부 지역에 비를 뿌린다. 마하(Maha) 시즌(10~1월)에는 북동 몬순이 불어와 북부와 동부에 비가 내린다. 해안 지역은 연중 무덥지만 고도가 높아지면서 기온은 급격히 떨어진다. 기온이 가장 높은 시기는 3월에서 6월까지이며, 반면에 11월부터 1월까지는 연중 가장 시원한 시기이다. 강우량은 남부, 남서부, 고원지대에 가장 많고 북부와 중북부는 상당히 건조하다. 서해안과 남해안, 고원지대 방문에 제일 좋은 시기는 12월과 3월 사이이다. 5월에서 9월은 동해안을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다.
최초 이주자는 유목민 베다(Veddahs)인
스리랑카의 최초 이주자는 검은 피부에 가냘프고 왜소한 체구를 가진 유목민, 베다(Veddahs)인이다. 전설은 다소 악의적으로, 그들을 기원전 5세기나 6세기 무렵 싱할리인들에게 정복된 도깨비인, 야차(Yakkhas)로 기술하고 있다. 기원전 4세기 스리랑카 전역에 걸쳐 몇 개의 싱할리 왕국이 세워졌으며, 그 중에서 북부 평원에 자리잡은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가 가장 강력했다. 불교는 기원전 3세기 인도 마우리안 왕조 아쇼카 황제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에 의해 전래되어 급속하게 퍼져 국교가 되었고, 강력하고 적극적인 민족주의의 구심점이 되었다. 하지만 아누라다푸라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기 힘들었다. 이후 1,000년간에 걸쳐 남인도로부터 끊임없는 침략과, 관련된 각 왕조간에 반복되는 세력다툼이 벌어지게 된다.
1070년 비쟈야바후(Vijayabahu) 왕이 남인도의 촐라(Cholas) 왕조를 몰아내고 폴론나루와(Polonnaruwa)에 새 수도를 세웠을 때 그간 계속되었던 침략의 위협은 종식되었다. 특히 폴론나루와를 아시아에서 가장 영화로운 도시 중의 하나로 변모시켰던 파라카라마바후(Parakramabahu) 왕의 통치를 전후하여 2세기 이상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인도의 침입은 또 다시 시작되어 1215년 폴론나루와는 함락되고 만다. 1505년 포르투갈 인들은 콜롬보에 도착하여 매우 값비싼 향료와 계피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얻었다. 1597년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포르투갈 식민주의자들은 공식적으로 섬의 주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캔디(Kandy)에 있는 강력한 싱할리 왕국을 격퇴하지는 못했고 1658년 캔디 왕국은 네덜란드 인들의 협력을 얻어 포르투갈 인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네덜란드 또한 캔디 왕국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나 영토보다는 무역과 이윤에 더 관심이 많아, 1796년 영국이 왔을 때 네덜란드는 내키지 않는 수동적 저항만을 하였을 뿐이었다. 영국은 1815년 캔디 왕국의 주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후 섬 전체를 지배하는 최초 유럽세력이 되었다. 제국의 경영은, 도로를 건설하고, 커피, 차, 계피, 야자농장(남인도에서 데려온 타밀족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존하는)으로 시작되었다.
한편 영어가 국어로 도입되었다. 1948년 스리랑카(실론)는 영연방국가로 남은 범위 내에서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였다. 최초의 정부는 사회주의를 채택하고 사회복지를 강화하면서 강력한 경제를 유지하였지만, 80만에 달하는 타밀 농장노동자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기도 하였다. 1959년 싱할리 민족주의자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Solomon Bandaranaike)가 당선되자 국회를 통해 싱할리 어를 공용어로, 또 싱할리 인들이 가장 좋은 직장과 가장 권력있는 자리를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싱할리 제일주의’를 추진하였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다수의 싱할리족과 영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엘리트사이의 권력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재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북부와 동부에 거주하는 타밀족을 화나게 만들어, 타밀족들은 보다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며 중앙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스리랑카의 민족적, 종교적 이질성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부와 구직에 대한 경쟁이 심화됨으로써 더 악화되었다.
분쟁해결과 경제회복은 미해결 과제
반다라나이케는 1959년 두 민족을 화해시키려고 할 즈음 한 불교승려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 자리는 그의 아내 시리마보(Sirimavo; 세계최초의 여성 수상)가 맡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사회주의적 정책을 계속 이어나갔지만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71년, 싱할리 마오쪄뚱(毛澤東)주의자들인 JVP에 의해 섣부른 조직반란이 일어나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1년 후 스리랑카는 공화국이 되었고 스리랑카를 정식국호로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그 사이, 경제는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북부 타밀족 지역에 불안이 고조되었다.
1972년 헌법은 공식적으로 불교를 국교의 위치에 올려놓았고, 대학 내에서 타밀인들의 입지는 좁아졌다. 타밀족 지구에서 사회불안이 국가 비상사태로 확대되자, 군기가 문란한, 그리고 싱할리족이 절대다수인 군과 경찰은 젊은 타밀족 청년들에게 적군으로 비춰졌고, 급기야 그들은 타밀 독립을 위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1977년 주니우스 리차드 자야와데네(Junius Richard Jayewardene)가 당선되자 타밀족 지역에서는 타밀어가 ‘국어’로서 위치를 확보했다. 또한 그는 타밀족에게 더많은 지방정부 권력을 부여했지만 타밀 청년들과 보안군 사이의 폭력과 보복은 통제불능 상태로 치달았다.
1983년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LTTE) 분리주의자들이 군경을 학살하자 싱할리 폭도들은 이틀동안 수천 명의 타밀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광란극을 벌였다. 이 일은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이 되었고 많은 타밀인들이 북부 타밀족 거주지로 이동하고 싱할리인들은 자프나 지역을 떠나기 시작했다. 타밀족은 섬의 30%에 해당하는 북부지역과 동부해안에 대해 자치권을 요구했다. 타밀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북부에서는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동부에서는 싱할리인과 이슬람교도와 거의 같은 비율로 살고 있었다. 폭력은 현재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참혹한 ‘인종청소’와 같은 수준으로 쌍방간에 자행되고 있다.
1985년 말까지 5만여 명의 스리랑카인들이 난민촌에 수용되어 있었고 10만 명의 타밀인들이 인도의 타밀나두(Tamil Nadu) 주 수용소 캠프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관광업은 급하강하였고, 차(Tea)의 가격은 내려갔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폭력으로 인해 외국의 원조는 끊어졌다.
1987년 정부군이 타밀호랑이를 자프나반도로 밀어붙이자 남인도의 불안상태와 인도정부에 대한 국내의 압력이 스리랑카에 대한 인도의 침공 가능성을 높였다. 쟈예와데네는 당시 인도수상 라지브 간디(Rajiv Gandhi)와, 스리랑카군이 주둔지로 철수하고 인도평화유지군(IPKF)이 북부의 질서를 유지하며 반군을 무장 해제시키기로 하는 절충안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협정의 조건에 무관하게 남쪽에 사는 싱할리나 무슬림에게는 망신스러운 일이었고 그들은 인도가 북부지역을 차지하는 것과 동부의 비타밀인들이 팔아넘겨진 상태에 이른 것에 반기를 들었다. 한편 반군들은 싱할리족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나가고, 인도평화유지군(IPKF)은 반군들을 분쇄하기 시작하면서 스리랑카는 이제 어느 누구도 명예롭게는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1989년 인도평화유지군(IPKF)이 북부에서 표면적으로 통제권을 회복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남부와 중부에서는 JVP가 주도한 연이은 파업과 정치적 암살과 같은 싱할리인의 반란이 일어났다. 정국은 당시, 라나싱헤 프레마데사(Ranasinghe Premadasa) 집권 정부가 JVP를 꾀어 정치주류로 끌어들이려 할 때 답보상태에 빠졌다. 이 책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프레마데사는 JVP 혐의자 살해를 전문으로 하는 암살단을 풀어 그들의 시체를 강에 던졌다. 3만~6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공포시대가 3년 동안 지속되었다. 한 때 8만 명에 이르렀던 IPKF는 아무런 보답도 없는 임무를 그만두고 1990년 철수했다.
타밀호랑이는 정전에 동의하였지만 타밀분리자들이 일방적으로 독립국을 선포함과 거의 동시에 폭력의 불길이 다시 타올랐다. 이 때부터 스리랑카 정부는 정치적 해결과 군사적 해결책 사이를 왔다갔다 하였지만, 어느 쪽도 학살과 테러를 종식시키지는 못했다.
1991년 라지브간디는 타밀자살폭탄테러로 폭사하였고 1993년 프레마데사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1995년 초 합의된 휴전 협정은 타밀호랑이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 정부는 1995년 말 자프나 반도를 탈환하고 타밀반군과 자프나시의 타밀족들을 격퇴시킨 대규모의 군사작전으로 응답하였다.
타밀족들을 무마해보려는 정부의 시도는 상대적으로 잘 받아들여졌고, 타밀반군들은 확실히 진압당하여 스리랑카에 영구적인 평화가 오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반군들은 다시 조직을 재편하여 1996년 무렵 스리랑카 북부에 주둔하고 있는 정부군에 큰 타격을 입히기 시작했으며 콜롬보에서도 테러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재개된 폭력은 타밀족과의 평화노력에 반대하는 싱할리족 의견만 더 굳히게 하였다.
한편 스리랑카의 경제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빈약한 경제기반, 부패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가지출 중 거의 20%을 국방비로 쓰고 있으며, 국내경제는 해외, 주로 걸프국들에서 일하는 스리랑카인들이 매년 고국으로 송금해오는 US$ 15억 달러로 유지되고 있다. 분쟁의 해결과 경제성장의 회복은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임운규 목사(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