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홍길복 목사의 ‘잡기장과 라틴어 인문학’ 중에서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 / Homo locum ornat, non Hominem locus / Mr. Historian / A fronte praecipitium, A tergo lupi / 여행자 수칙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64) _ 9월 21일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
지난해 10월, 인문학친구들과 같이 그리스와 터키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전 오래전에 한번 읽었던 책이지만 다시 꺼내 읽은 책이 있었습니다.
대니얼 클라인 (Daniel Klein)이 쓴 ‘철학자 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 (Travel with Epicurus)입니다.
이 책은 클라인이 75살 때, 그리스의 작은 섬 ‘이드라’ (Hydra)로 여행을 가서 쓴 엣세이입니다. 이드라는 아테네에서 남쪽으로 한 70여km 쯤 떨어진 아주 작은 섬인데, 그는 예술가들의 섬이라 불리우는 그 곳에서 다시 그 옛날의 Epicurus를 만난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남긴 잡기장을 여기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이 늙지는 않고 계속 젊게만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즐겁게 살지 못한다면 절대 바르게 살 수도 없다.
너무 늦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
수다를 떨며 사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수다는 품위 없는 행동이 아니라 새롭고 흥미로운 사상을 만들고 전달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옛날 아테네에는 수다와 소문의 여신, 오사 (Ossa)가 있지 않았던가?
학교에 다니거나 교회에 다니거나, 그저 평생토록 배워야 할 것은 하나뿐이다. ‘사랑하는 법과 사랑 받는 법이다’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지나가지만, 세월은 절대 일정한 속도로 흐르지 않는다.
변하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변하지 않는 것도 많은 법이다.
놀랄 것이 별로 없어야 비로소 노인이 되는 것이다. 당신이 이것저것 자주 놀라는 것을 보니 당신은 아직 한참이나 젊은 사람이다. ‘이 나이가 되니 세상엔 놀랄 일이 별로 없어요’ 그래야 당신은 노인 축에 끼게 된다.
그렇게도 갈망했던 새로운 것에는 언제나 숙명적인 실망이 내재되어 있다.
이 세상에는 단 두 가지의 비극 밖에 없다.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얻는 슬픔이다. 그런데 후자가 전자 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다.
노년의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는 게으름을 피워도 괜찮다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는 미래에 그 보상이 주어지지만, 게으름을 피우는 자에게는 지금 당장 그 보상이 주어진다.
재미를 얻기 위해 노는 것이 아니다. 놀면 재미가 생겨난다.
플라톤이 말했다. ‘순수한 놀이에는 신의 뜻이 담겨있다’ 인생을 놀이 처럼 사는 것이 인생을 옳바로 사는 비결이다.
인생은 하나의 놀이다. 그럼으로 거기에는 더 중요한 것도, 덜 중요한 것도 없다.
게으른 사람이 학구적인 사람 보다 훨씬 더 철학적이다. Johann Hamann이 말했다. ‘일하기는 쉽지만 진정으로 게으르려면 참 용기가 필요하다 ‘
노년에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도 큰 축복이다. 사실 늙은이에게 무엇인가 자꾸만 새로운 일들이 일어난다면 그건 대단히 않좋은 징조다. 그저 노인들은 이미 다 해보고 경험했던 일들이지만, 마치 처음 당해보는 냥 내숭을 떠는 것이다.
노인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에 모든 것을 받아주고 포용하게 된다. 노인들은 인생의 장기판에서 승패가 판가름이 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게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게임이었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초조해 하지 않는 것이다.
천천히 생각해야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무슨 일에든 너무 빨리 반응하지 말아라. 한 한달 쯤 뒤에 답장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다.
그 여자는 제 기분에 따라 자기 나이를 이랬다저랬다 하는 걸 보니 이젠 좀 철이 들어가나 보다.
사실 결말이 시작 보다 좋은 케이스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 거야!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도 욕정이 일어나지 않고 그냥 이쁘게만 보여질 때, 그게 노년이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도 유혹하고픈 생각이 없어진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러나 그 나이가 된 것은 축복이다.
모든 죽음은 다 때 이른 죽음이다. 죽기에 적당한 나이란 없다.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직 노인이 아니다.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어찌 늙은이라 할 수 있으랴!
답이 있는 질문은 절대로 철학적 질문도 아니도 좋은 질문도 아니다.
피할 수 없는 것은 승복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은 그냥 내버려 두어야한다.
살 수 있을 때 까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할 때 까지 사는 것이 현명한 사람이다.
늙은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늙은이를 모독하는 것이다.
늙으면 종교에 귀의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힌두교에서는 늙으면 버려야 할 것 중에 종교도 포함시키고 있다. 종교까지도 버려야 진정 모든 것을 다 버린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노망은 하느님이 주시는 마지막 선물이다. 맨 정신으로 죽기 보다는 노망에 걸려, 죽는 줄도 모르면서 죽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냐!
추천도서: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드는 법, 대니얼 클라인 지음, 김유신 옮김, 책읽는수요일, 2014
Carpe diem !
Bonam fortunam !
라틴어 인문학 (43) _ 9월 22일
Homo locum ornat, non Hominem locus.
(호모 로쿰 오르나트, 논 호미넴 로쿠스)
locum, locus, 장소, 곳, 자리, 영어 locality
Ornat, 꾸미다, 장식하다, 영어로 ornament
Hominem, Homo의 목적격, 사람을.
Homo locum ornat, non Hominem locus.
사람은 장소를 꾸미지만, 장소가 사람을 바꾸지는 못한다.
사람이 장소를 꾸미는 것이지, 장소가 사람을 꾸미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늘 분위기나 상화의 변화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해서 인간 자신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장소나 환경, 여건이나 분위기가 그 사람의 인간됨 자체를 변화 시키지는 못합니다. 집을 크게 짓거나 이사를 하거나 장식을 새롭게 하거나 가구를 새로 들여놓고 이것저것 꾸며보아도 ‘나’라고 하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분위기 전환이 인간을 본질적으로 바꾸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진정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직립보행, 도구를 만들고 사용함, 불을 발견하고 이용함, 이성, 언어, 상상력, 창조성, 영원을 그리워함… 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들이 Homo erectus, Homo habilis, Homo sapiens, Homo politicus, Homo socie, Homo religious, Homo academicus, Homo movens, Homo ludens, Homo ludens 등, 백여 가지도 더 되는 인간에 대한 정의들 입니다.
그런데, 이 많은 인간의 인간됨에 대한 정의들 중에서 진정으로 우리를 사람이 되게 하는 필요충분 조건은 무엇일까요? 우리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별하게 해주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대로 부터 서구의 정신사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꼽아온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리스적 전통에 따른 것으로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는 것이고 둘째는 히브리적 전통에 따라 인간을 ‘종교적 존재’로 보아온 것입니다.
우리 인문학교실은 그 둘 중에서 특히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 사유하는 존재, 반성하고 돌아보고 질문을 던지는 존재로 여기면서, 그 부분에 대해 함께 생각을 나누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무리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고 이성적 존재가 되어야한다’고 몸부림을 쳐도 오늘 우리 시대는 점점 더 비이성적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생각이 밥 먹여 주느냐?’고 하면서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이성을 유기해 버려, 인간이성은 무너져가고, 잃어버려가고, 살아져가는 시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린 집단적이며 총체적 ‘이성 상실의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호모 사피엔스’라고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특히 두고 온 조국의 정치현실이 우릴 더 많이 좌절시키곤 합니다. 이성과 생각, 양식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동물화’ 현상 – Beastialize -이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인간이외의 동물들에게도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하고 느낄줄 압니다. 해와 달과 별, 꽃과 바람과 하늘을 보고 짖기도 하고 끙끙거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눈물도 흘릴 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 이외의 동물들은 자아에 대해서는 생각할 줄을 모릅니다. 아무리 똑똑한 강아지나 침팬지라 할지라도 그들은 ‘아 강아지란 무엇인가? 강아지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아 침팬지인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런 질문을 하지 못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인간 삶의 목표와 방법’을 질문하고 고민하고 생각하는 이성적 존재입니다.
분위기 치장과 분위기 반전을 통하여 인간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Homo locum ornat, non Hominem locus.
사람은 장소를 꾸미지만, 장소가 사람을 꾸며주는 것은 아닙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65) _ 9월 23일
Mr. Historian
1894년 호남지역에서 일어났던 ‘그 사건’은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습니다.
처음엔 동학난이라고 하더니 그 후엔 갑오농민봉기, 농민전쟁, 동학운동을 거쳐,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동학혁명이라고 합니다. ‘난이다. 운동이다. 봉기다. 전쟁이다. 혁명이다’ 한 가지 역사적 사건이지만 여러가지로 해석하고 다양하게 기술합니다. 우리 중학생 때는 ‘동학난’이라고 가르치고 배웠지만 지금 교과서에는 거의가 ‘동학혁명’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4.3도, 4.16도, 4.19도, 5.16이나 5.18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건은 하나이지만 해석은 여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팩트’ (fact)는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안에서 본 사실 – 흔히 내재적 접근법이라고 하지요 – 과 밖에서 보는 사실 – 흔히 객관적 접근법이라고 하잖아요 – 이, 똑같이 일치하지는 않지요. 하나의 사건도 동서남북 같은 보는 자리와 낮과 밤, 아침과 저녁 같은 보는 시간에 따라 차이가 생겨난다는 이론 때문에 ‘모든 역사는 보는 시간과 보는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지요. ‘우리는 마치 팩트는 하나인양 생각하지만 팩트는 여럿이다’라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역사이해는 이런 데서 연유하게 됩니다.
누가 오늘의 정치권력을 잡고 또 대중적 지지를 받느냐에 따라 역사해석도 다른 춤을 추게 됩니다. 예전 우리는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위대한 개척자로 배웠지만, 지금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식민지지배에 앞장서온 침략자라고 가르칩니다. 팩트는 하나지만 그 팩트에 대한 해석은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훨씬 다양화되어 왔습니다.
‘역사란 객관적 사실을 서술하는 작업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에 대한 현재적 해석이고 현재적 평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역사가일 수 있습니다. 칼 벡카 (Carl L. Becker)는 일찍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Everyone is his own Historian. Everyman is Mr. Historian. 지난 세기 초엽 미국 역사학회 회장이었고 코넬대학 교수였던 그는 역사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모두들 ‘역사해석의 주체자’가 되고 있나요? 안타깝게도 오늘날 역사해석의 키와 권위는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모든 역사적 팩트와 그에 대한 해석들은 – 그것이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심지어는 종교적이든 간에 – 오직 권력과 금력을 장악한 사람들과 그 그룹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서 해석될 뿐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그 무서운 틀을 벗어나질 못합니다. 역사는 승자의 현재적 해석이고 그 해석의 권위는 슬프게도 더 많은 돈과 더 강한 힘을 지닌 사람들이 좌우합니다. 진 사람, 없는 사람에게는 입이 천개라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몇 십년 전에는 총과 땡크를 지닌 군인들이 역사를 만들더니 이제는 돈과 여론과 선동으로 무장한 정치인들이 Mr. Historian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언제나 진정 우리 같은 민초들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시대, 나도 Mr. Historian이 되는 날이 올까요?
좋은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라틴어 인문학 (44) _ 9월 24일
A fronte praecipitium, A tergo lupi.
(아 프론테 프라에키피티움, 아 테르고 루피)
A fronte praecipitium, a tergo lupi.
fronte, 앞, 전면, 이마, 영어로 front, fore, ahead
praecipitium, 낭떨어지, 절벽, 벼랑, 위기, 동사는 praecipito 떨어지다. 영어 cliff, precipice
tergo, 등, 뒤, 원형은 tergum 영어 back, rear, behind
lupi, 늑대, lupus, 영어 lupine
A fronte praecipitium, a tergo lupi.
앞에는 벼랑, 뒤에는 늑대.
도망가는 사슴에게 앞에는 강, 뒤에는 호랑이가 있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이르는 말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사람에게도 어떤 곤란한 입장이나 처지가 닥쳐와서 선택이나 결정이 난감한 상황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앞에는 낭떠러지가 있고 뒤에는 늑대가 버티고 있다’
비슷한 말로는 ‘진퇴양난’이 있습니다. 나아갈 진, 물러날 퇴, 두 양, 어려울 난 이지요. 사면초가, 진퇴유곡, 진퇴무로 역시 비슷한 뜻으로 쓰이지요. 영어로는 보통 dilemma라고 하고, 더 적극적으로는 perfect storm이라고도 합니다.
하여튼 작게는, 약속 시간은 다 되었는데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상황에서 앞으로도 갈 수 없고, 뒤로도 갈 수 없는 처지나, 크게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이러기도 어렵고 저러기도 어렵게 힘든 한반도의 상황 같은 경우, 우리는 진퇴양난, 진퇴유곡, A fronte praecipitium, a tergo lupi. ‘앞에는 절벽이요, 뒤는 늑대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A fronte praecipitium, a tergo lupi라는 이 라틴어는 단순히 어떤 어려운 상황이나 처지를 염두에 두고 쓰는 격언이 아니라, 실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본질 중 하나를 이르는 말입니다.
‘인간은 매 순간 선택을 강요받는 존재이며 인간의 결정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라는 것을 깨우치는 말이 바로, 진퇴양난, 사면초가, 진퇴유곡이며 A fronte praecipitium, a tergo lupi. 앞에는 절벽이요, 뒤에는 늑대라는 것입니다.
선택해야하는 인간, 결정해야하는 인간, 그러면서도 망설이는 인간 –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이는 단순히 ‘밥을 먹을 것이냐 국수를 먹을 것이냐’ 같은 선택이나 결정이 아니지요. 우리는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정말 중대한 ‘결정의 순간’ ‘The hour of Decision’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진퇴양난 앞에서, 낭떠러지와 늑대 사이에서는 묘수를 찾지 말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새우는 아무리 작아도 그 큰 바다에서 헤엄을 잘 하나니 그 이유는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음이라’
자, 이제 선생님께서는 정말 선택하고 결정하기가 난감한 상황에서는 어떤 원칙, 어떤 자세로 최종적 결심을 하십니까? 저 부터 한번 점검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느 것이 나에게 좀 더 유리하고 덜 손해가 될까?
어느 것이 내 양심의 소리일까?
어느 것이 보다 더 보편성을 지닌 상식과 교양일까?
어느 것이 내가 지닌 종교적 가르침이나 신앙에 더 가까운가?
A fronte praecipitium, a tergo lupi.
인생이란 늘 낭떠러지 앞에서 서성거리는 존재이며, 선택과 결정을 요청받으며 살아갑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되세요.
오늘도 지혜로운 선택자들이 되시길 빕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66) _ 9월 25일
“여행자 수칙”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같은 책들은 신학이나 철학에서만이 아니라 인류의 정신사에 미친 영향이 대단히 큽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랫동안 아껴오던 그런 종류의 고전들을 몇달 전 서제를 정리하면서 모두 인문학친구들에게 1, 2불에 나누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오히려 저는 로버트 풀검의 ‘내가 정망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나 쑤쑤의 ‘멈추어야 할 때 나아가야 할 때 돌아봐야 할 때’ 같은 작은 책들 몇 권은 꿍쳐두고 자주 들여다 보곤 합니다. 고전 축에도 들지 못하는 그런 글들이 오히려 하루하루의 삶에서는 더 실제적 가르침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미적분을 포함하는 고등수학이 모든 자연계의 근본을 뒷받침하는 이론이 되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1, 2, 3부터 시작하여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같은 산수가 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쉬운 가르침에는 어려운 실천이 따라옵니다’ ‘다 아는 이야기가 제일 어려운 이야기 입니다’
‘거짓말하지 말아라’
‘정직하게 살아라’
‘참아라’
‘화를 내지 말아라’
‘규칙을 지켜라’
‘사랑해라. 베풀어라. 나누어라’
이런 것을 위해서 굳이 ‘순수이성비판’이나 ‘기독교강요’를 펼치거나 부처님, 공자님, 소크라테스, 예수님에게 물어 볼 필요는 없습니다.
쑤쑤의 책을 다시 읽었습니다.
주제는 단순합니다. ‘인생은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Visitor parking에다는 차를 오래 세워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는 않됩니다. 모든 사람은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잠시 여행을 온 나그네들입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항성에서 여행 중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여인숙입니다. 우리는 지구 여인숙의 숙박객들 입니다. 여행자의 짐은 적고, 작고, 가벼울수록 좋습니다. 어리석은 여행자들은 이것저것 많이 챙기고 낄낄거리면서 힘들게 끌고 다닙니다. 그저 꼭 필요한 것 몇 가지만 가지고 다니는 것이 여행의 지혜입니다. 지구여행은 아무리 좋아도 두 번 다시 올 일이 없으니 미련일랑 갖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러니 몸도 가벼워야 하지만 마음이 더 가벼워야 합니다. 사실 우린 인생살이가 피곤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피곤한 사람들입니다. 체면치례, 허영심, 이기심, 경쟁의식, 독점욕, 완벽주의 같은 것들이 우릴 많이 지치게 만듭니다. 여행중이라는 사실을 잊기 때문에 자꾸 이런 사고가 발생하는 겁니다.
타인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완전한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 천천히 걸으십시요.
빨리 자라는 나무가 꼭 쓸모있는 목재는 아닙니다.
소유하는 것에게는 꼭 소유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가지가 많으면 열매가 적고, 가지가 적으면 열매가 많습니다.
많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줄 때나 베풀 때는 언젠가 다시 받으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건 베푸는 게 아니라 장사하는 것입니다.
혼자서 시간을 방법을 연구하십시요. 혼자서 심심한 사람은 여럿이서도 심심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하지 마십시요. 특히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리 친한 사이에서도 모르는 것이 좀 있는 것이 좋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일 때가 많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십시요. 이건 사실 굉장한 기술과 지혜를 요구하는 겁니다.
인생이란 기다림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위의 글들은 쑤쑤의 책 “멈추어야 할 때, 나아가야 할 때, 돌아봐야 할 때” (쑤쑤 저, 김정자 옮김, 다연, 2025) 에서 밑줄 친 글들입니다.
그런데 쑤쑤는 지구여행자인 우리들에게 이런 질문도 던집니다.
이 인생 여행길에,
당산은 가끔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가끔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싶은 갈동무가 있으십니까?
진정 당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 한둘은 있으십니까?
그리고 진정 당신이 믿고, 존경하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다시 읽으면서 제가 저에게 묻는 질문들입니다.
오늘도 주어진 인생의 여행길이 안전하시고 보람있으시길 빌며,
Carpe diem !
Bonam fortunam !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3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