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홍길복 목사의 ‘잡기장과 라틴어 인문학’ 중에서
곡선은 하느님이 만드셨고 직선은 인간들이 만들었다 / 스님들이 일러주시는 말씀 / 살아있으니까 / 진지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 짧은 이야기, 긴 여운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111) _ 2021년 2월 22일
“곡선은 하느님이 만드셨고 직선은 인간들이 만들었다”
어제 우리 카톡방엔 최진 선생님이 이준관 시인의 “구부러진 길”을 올리셨고, 몇몇 분들의 잔잔한 감동이 이어져서, 저도 이미 준비했던 오늘의 잡기장은 잠시 뒤로 미루고 “구부러진 길”을 중심하여 곡선과 직선에 대해, 한 2년 반 전에 써놓았던 잡문을 다시 찿아 올려봅니다.
전북 정읍 출신으로 70이 넘으신 이준관 시인은 평생 많은 동시를 써오셨고, 시집들을 내셨으며, 방정환문학상 등을 받으신 원로 문인 중 한분이십니다. 소개해 주신 시 “구부러진 길”은 16줄 짜리 짧은 시이지만, 우리가 읽으면서 느낀대로, 오늘날 온갖 직선도로를, 묻지도 않고 달리며, 일상속에 뭍혀서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잠시나마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며, 삶의 여유와, 그 여유가 가져다주는 구부러진 길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서정시입니다.
“자연을 따라,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직선으로 만들어놓은 저의 아파트 속에서이지만 조금은 마음이 푸근해 집니다. 몇일전 소개해드렸던 타샤 튜더도 다시 생각나게 해 주고요.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다” – The straight line belongs to man, the curve to God. –
곡선의 대표적 건축물인 ‘성 가족 성당’ (Templo Expiatorio de la Sagrada Familia)을 만든 바르셀로나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i)가 한 말로 전해지는 명언입니다.
물론 가우디 외에도 곡선의 예술가들은 적지 않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건축가요, 화가이며, 환경운동가인 훈데르트바서 (Friedensreich Hundertwasser) 같은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모두 건축과 그림에 달팽이 같은 나선형을 끌어드려, 인간의 삶과 죽음, 역사의 흥망과 성쇠를 구부러져서 돌아가는 “영원회귀” (니체가 말했던 Ewing wiederkehren)로 상징화한 분들 입니다.
제 잡기장의 메모는 문화심리학자이며 화가인 김정운 교수가 2018년 8월 조선일보에 쓴 칼럼을 읽고 다듬어 놓은 글입니다.
그에 의하면, 원래 자연 속에는 직선이란 없습니다. 모든 자연은 꾸불꾸불하고, 삐쭉삐쭉하고, 휘어지고, 오르내리고, 뱅글뱅글 합니다. 산도, 나무도, 풀도, 길도, 다 곡선입니다. 구부러져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하느님이 만들어 놓으신 곡선, 구부러져 있던 세상을 현대화 (Modernization)라는 이름으로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고속도로를 만들고, 도시를 계획하고, 직선적 고층 건물들을 세웠습니다. 훈데르트바서의 말대로 이는 “인간이 신이 되어 보려는 시도” 였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직선은 무신론적이고 비도덕적이다” (Die gerade Linie ist gottlos und unmoralisch)
모든 직선은 위험합니다. 곡선은 안전합니다. 병든 인간들은 그것을 꺼꾸로 생각하여 곡선은 위험하고 직선은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직선은 사탄의 유혹입니다.
빨리빨리 해 치우고, 빨리 빨리 먹어치우고, 빨리빨리 만들어 가면, 빨리빨리 죽을 수도 있습니다.
직선은 항상 “않되는 일이 어디 있어!” “우린 할 수 있어!” “할 수 없으면 할 수 있게 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약간 늦기는 했지만,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이준관 시인 같은 분들 때문에, 가우디나 훈데르트바서 같은 건축가들과 화가들이 있어서, “되는 일은 하고” “않되는 일은 그냥 않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젠 구불구불 돌아가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임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길도 돌아가고, 집도 돌아가고, 나라도 돌아가고, 교회도 돌아가고, 행복도 돌아가고, 아 ! 그렇구나! 생각도, 말도, 행동도 천천히 돌아가는 것이 생명과 기쁨으로 가는 가장 좋은 길임을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큰 산을 만나면 돌아가고, 힘들고 어려운 길을 만나면 쉬어서 가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만날 땐, 그냥 그쯤해서 접어두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구부러진 길”에선 돌아갈 줄도 아는 자세와 태도가, 바로 절대자 앞에서는 겸손이 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인간됨을 바로하는 인격적 표현이 된다고 생각지 않으시나요?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112) _ 2월 23일
“스님들이 일러주시는 말씀”

성철스님이 남기신 법문 중에는 이런 귀절들이 있습니다.
* 수행이란, 안으로는 가난을 배우고, 밖으로는 존경을 배우는 것입니다.
* 세상에 어려운 일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일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일이고,
용기 중에서도 가장 큰 용기는, 내가 옳았는데도 지는 것이며,
공부 중에서도 제일 귀한 공부는, 남의 허물을 내가 뒤집어쓰는 것입니다.
*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이 없는 법입니다.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 인생사는 동안 3가지 병에 걸리지 않토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름병, 재물병, 여색병 입니다.
*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려는 자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하는 자와 같습니다.
* 도의 길은 날마다 덜어내는 것입니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더 덜어낼 것이 없으면, 참된 자유를 얻습니다.
* 모든 사람을 부처님 처럼 섬기십시오. 그것이 참 불공 입니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하려면 딱 두 가지만 걱정하십시오.
지금 아픈가? 안 아픈가?
안아프면 걱정할 것 없고, 아프면 두 가지만 걱정하십시오.
나을 병인가? 안 나을 병인가?
나을 병이면 걱정할 것 없고, 안 나을 병이면 두 가지만 걱정하세요.
죽을 병인가? 안죽을 병인가?
안죽을 병이면 걱정할 것 없고, 죽을 병이면 딱 두가지만 걱정하세요.

천당 갈 것 같은가? 지옥 갈 것 같은가?
천당 갈것 같으면 걱정할 것 없고, 지옥 갈것 같으면 걱정해도 별수 없습니다. 그냥 가야지요.
법정스님의 명언들입니다.
*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라. 묻고 묻고 또 물어보아라. 해답은 질문 속에 있다.
*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 무소유다.
* 버리고, 비우지 않으면, 새것이 들어설 수가 없다.
* 빈마음이란 무심이다. 무심이란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다. 마음이 없어져야 마음이 비워진다.
*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있는 존재다. 홀로 있어야 자유로워진다.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만해평화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 2020년에는 태국의 ‘아속'(Asoke) 공동체와 그 아속의 설립자 포티락스님에게 이 상이 주어졌습니다. ‘아속’이란 태국어로 ‘환희’ ‘기쁨’ 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희망을 위해서 일한다는 목표를 지닌 스님들의 모임입니다. 아속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 잃는 것이 얻는 것입니다.
* 버린 것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 내려가는 것이 오르는 길입니다.
* 그리고 죽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금새 덮거나 반응하지 마시고 다시 한번 더 천천히 읽으시면 참 좋겠습니다)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113) _ 2월 24일
“살아있으니까”
“살아있으니까 힘든거야 !”
“살아있으니까 아픈거야 !”
“살아있으니까 미운거야 !”
반대로 말해볼 수도 있습니다.
“살아있으니까 기쁜거야 !”
“살아있으니까 행복한거야 !”
“살아있으니까 사랑하는거야!”
다 맞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살아있기에” 생기는 현상들입니다. “죽고 나면”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미움도, 행복도 아픔도 다 살아지고 말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
죽고 나면 이런 것들은 모두 살아지고 없어질까요?
기독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서구 종교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죽음 후에도, 제각기 천당과 지옥으로 가게되어, 천당에 가면, 기쁨과 행복, 사랑과 생명이 이어지고, 반대로 지옥으로 가면, 슬픔과 고통, 아픔과 미움 또한 끊이지 아니하고 계속된다고 말합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천국과 지옥으로 이어지는 사후 세상으로 교리화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구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은 후에 가는 내세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현세와 역설적 연속성을 지닙니다.
그런데 동양사상과 동양종교는 서구 기독교와는 생각을 같이하지 않습니다. 노장철학을 비롯한 인도나 중국의 철학사상은 인간의 사후 세계에 대하여 기독교와는 그 견해를 달리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죽음은 현세의 모든 것을 무화 (Nothing) 시키며,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입장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인간들이 지닌 육체적 오욕과 칠정이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오욕 – 5가지 욕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물욕, 명예욕, 식욕, 성욕, 그리고 놀고싶어 하는 휴식욕이 포함됩니다.
칠정 – 7가지 감정은 무엇입니까?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
그리고 이것저것 욕심을 부리는 희로애락애오욕이 그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 인간은, 그 누구든 예외없이 욕심의 노예로 슬프게 살아갑니다.
오욕과 칠정은, 우리 모두 “살아있음”으로 생겨나고, “살아있는 동안”은 꺽을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요, 인간존재의 근원이며 실존입니다.
그런데 노자와 장자는, 우리가 죽고나면, 인간은 마침내 이 오욕과 칠정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얻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래된 동양의 “무사상”과 “무위론”을 생각하다가 “살아있음”이란 무엇일까 하는 데 까지 생각이 조금 넓혀졌습니다.
“살아있음”이란 꼭 이 육신의 생명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그 알량한 지식, 생각, 주장, 신념, 고집을 포함하여, 소위 말하는 “자아” – “자아의 살아있음” 까지 모두 내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데 까지 생각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살아있음으로” 생겨나는 희로애락과 오욕칠정은,
“나 하나 죽음으로” 벗어버릴 수 있을텐데…
“나 하나만 죽으면” 우리 공동체에는 평화가 오고,
“나 하나만 죽으면” 나도 참된 자유를 얻어 참된 진리에 이를텐데…
죽어야만 없어지는 것,
죽어야만 이겨낼 수 있는 것,
아직도 살아 있기에,
아직도 내가 살아 있기에,
아프고, 괴롭고, 슬퍼하는 내 몸과 영혼의 자화상을 쳐다보면서,
오늘의 살아있음을 넘어서서,
내일의 죽음이 안겨줄 축복을 그려볼 때가 요즘들어 좀 더 자주옵니다.
아마 조금씩 철이 드는가 봅니다.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114) _ 2월 25일
“진지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요즘 한국에서는 지난해 6월, 정의당의 장혜원 의원 등 여러 국회의원들이 공동으로 발의한 “차별금지법” (Anti-Discrimination Act) 제정 문제를 놓고 적지 않게 논란이 일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법안의 내용을 좀 찾아보았습니다.
지금 발의되어 심의하려고 하는 한국국회에서의 “차별금지법”은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평등하고, 차별을 받아서는 않된다”는 선언과 함께 시작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민과 이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1) 그들의 출신 국가
2) 인종이나 피부의 색깔
3) 남자냐 여자냐 하는 성별
4) 나이
5) 혼자 사느냐 둘 이상이 사느냐하는 가족의 형태
6) 장애가 있느냐 없느냐
7) 성적지향, 즉 동성애자냐 아니냐 하는 7가지 분야에 있어서 차별을 하거나 차별을 받아서는 않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에서는 국적, 언어, 인종, 피부색, 성별, 건강, 성적지향성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법안은 구체적으로 이 법이 적용되는 범위를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1) 고용과 취직, 즉 직장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
2) 상품의 판매와 구매, 즉 물건을 사고 팔 때나 서비스를 제공할 때.
3) 교육, 즉 교육기관을 통해 교육이나 직업훈련을 제공하거나 받을 때.
4) 정부의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고 받을 때.
이상의 4가지 상황에서는 그 누구든지 위에서 열거한 7가지로 사람을 차별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 “차별금지법”의 구체적 윤곽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차별금지법”은 한국의 보수적 개신교회와 그 교회의 지도자들이 거세게 반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특히 한국의 많은 개신교회가 문제 삼는 것은 동성애자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이들의 주장과 기도에 의하면, 이 법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따른 남성과 여성 이라는 성적인 차이(차별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다름)를 무너트리고, 동성애를 합법화하고, 더 나아가서는 동성애를 조장함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거역하고, 우리 사회의 윤리와 도덕을 무너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법이 실제로 만들어져서 시행되게 되면, 교회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설교나, 반대운동을 하게 되면 법적 처벌을 받게 됨으로, 이는 명확한 종교의 자유와, 언론,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게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국가 인권위원회나 이 법을 대표 발의한 장혜원 의원측의 설명에 의하면, 이 “차별금지법”은 결코 성적지향이나 성적 정체성, 즉 동성애자를 포함한 LGBT (레스비안,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들의 행위가 정당하다든가, 잘하는 것이라든가, 그들의 행동을 장려하는 법이 아니라, 다만 그런 성적지향성을 지닌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직업이나 교육, 서비스나 정부의 정책에서, 동등한 권리를 받게 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양측의 입장을 읽고 들어보니, 여기에는 피차 다른 위치에 따른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도 있어 보입니다.
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럴 때는, 시간이 좀 걸린다 하더라도, 서두루지 말고, 피차 다른 입장에서서, 견해를 달리하는 개인들과 단체들이 함께 모여, 생각과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며 피차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종교인들은 기도나 설교로만 반대의견을 표시하지 말고, 입법자들은 힘이나 숫자로 밀어붙칠 생각을 하지 말고, 기독교 윤리학자들을 포함하는 신학자들과 전문적 법안 입법자들이 함께 모여,우리 사회의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면서,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열어, 진지하게 서로의 생각을 경청하면서, 오해는 좁히고, 이해는 넓혀 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호주에 있는 기독교 계통의 학자나 미디어들도 우리 사회가 앞서 경험했던 것을 중심 삼아 이런 문제가 어렵다고해서 그냥 회피만 하지 말고, 좀 진지하게 공론화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경험하여 잘 알고 있는 대로, ‘다름’이나 ‘다양성’은 잘못이나 단점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폭넓게 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좋은 자양분이 됩니다.
우리처럼 다양한 문화와 언어, 다양한 인종과 전통을 하나의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게 해주는 “다문화 사회” “복합문화 사회” – Multicultural society인 호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차별금지법”이 얼마나 의미 있는 법임을 이미 체감한 사람들 입니다.
세상은 넓고, 인종은 다양하고, 생각은 서로 다릅니다.
종교적 신앙에 따라 동성애자를 ‘종교적으로는 죄인’이라고 말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종교적으로만 보자면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죄인이지요.
하지만 국가적으로는 그 누구도 차별을 하거나 차별을 받아서는 않된다는 현실과 상식이 우리 앞이 놓여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겐 그 다음 생각이 이어집니다.
그것은 ‘법의 한계’ 문제입니다. 인간의 삶은 모두 다 법으로 규제되거나 장려되지는 못합니다. 법이란 오직 인간들의 나타난 말과 행위만을 대상으로 삼을 뿐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나 생각이나 양심 까지도 법으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차별금지법”도 차별하는 사람이나 단체의 사회적 행위를 문제 삼을 뿐이지, 인간성 속에 도사리고 있는 “차별성” – “차별하려는 심리현상” 까지 금지시킬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약간씩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 밑바닥에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심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차별하는 마음 금지법”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속 거짓 금지법”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정법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곧 “도덕과 종교” 입니다.
윤리 도덕적 훈련과, 종교적 깨우침을 통하여, 인간성 내부에 근본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차별하는 마음”을 덜어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육과 훈련과 종교적 신앙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한번 더 가다듬습니다.
차별하는 마음 때문에, 차별하는 행위가 나타납니다. 차별하는 행위는 “차별금지법”을 통하여 어느 정도는 막아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문제는 “차별하는 인간의 심성과 이기심과 자기중심주의” 입니다. 이는 도덕과 양심과 종교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래서 입법자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종교인들과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세상만사 다 법을 만든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종교인들도 기도나 설교를 넘어서서, 입법자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종교인들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이란 존재는 그 누구도 결코 도덕적 원칙과 종교적 신앙에 따라 진실하고 정직하게만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115) _ 2월 26일
“짧은 이야기, 긴 여운”

1) 지난 2월 초에 우리 인문학 교실 카톡방에 올라왔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전 스웨던 총리 타게 엘란데르 (Tage Erlander)와 그의 부인이 살아온 이야기였습니다.
엘란데르는 스웨덴에서 20년 이상이나 총리를 하면서도 한결같이 오래된 낡은 외투를 입고 다녔고, 심지어는 구두도 밑창을 갈아가면서 신었다고 합니다. 그이는 총리 재직중에도 정부의 관용차가 아닌 개인 자가용을 타고 늘 직접 운전을 하면서 출퇴근을 했다고 합니다.
집도 총리공관 대신에, 그전부터 살아오던 임대주택에 월세를 내가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총리 재임 중에도 이전에 일하던 대로, 고등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남편이 퇴임 후에는, 그가 총리 재임 중에 사용했던 정부부처의 이름이 새겨진 볼펜 까지도 모두 총리실에 되돌려 드렸다고 합니다.
2) “세계에서 가장 검소한 대통령”이라 불리웠던 전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카 (Jose Mujica) 이야기입니다.
호세 무히카는 대통령 취임 후, 수도 몬테비데오에 있는 대통령 관저는 노인들의 쉼터로 개조, 개방하고, 자신은 교외에 있던 자신의 농가에서 살면서 아침, 저녁, 직접 낡은 폴크스바겐을 몰고 시내에 있는 정부청사로 출퇴근을 했습니다. 그의 시골집이라는 것도 거실 1, 침실 1, 부엌 1의 허름한 농가였다고 합니다. 취임 당시 그의 재산신고 액수는 1800불 이었다고 합니다.
6-70년대, 우루과이에서 군사 독재정부와 싸우다가 14년 동안이나 수감생활을 했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평범하게 산다고 놀라워하는 세상은, 사실 정상적인 세상은 아니지요”
2015년 그의 대통령 퇴임식 후, 영국 BBC는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정직했던 호세 무히카는, 이 세계에서 정치인도 잘만하면, 존경받을수 있는 직업임을 일깨워준 사람이었다”
3) 최근 미국에 이민가서 오래 살고있는 친구가 보내온 카톡에는, 자기가 미국을 좋아하는 이유중 하나를 이렇게 전했습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많은이들이 앞다투어 코로나 백신을 맞고 있는 중인데, 마침 그 백신을 개발한 화이자 제약회사 미국 본사 사장의 부인이 아직 백신을 맞지 않았다는 소식이 알려져서, 무슨 안전성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건가, 이상하게 생각한 신문기자가 물었답니다. “아니 아직도 왜 백신을 않맞으셨습니까?”
그러자 그 부인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는 아직 해당자가 못된다네요. 전 아직 40대 후반이잖아요? 별수 없지요 뭐! 좀더 기다려야지요”
그 친구는 평소 미국이란 참 싫은 것이 많은 나라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런 작은 이야기가 큰 위로와 희망을 준다고 썼습니다.
마음에 잔잔한 여운을 남겨주는 이런 스토리를 읽고, 쓰다보면 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물론 저도 처음에는 왜 우리 나라엔 이런 대통령이나 사회 저명인사들이 그렇게도 없을까, 투정섞인 말을 내뱃다가도, 결국은 왜, 왜 나는 그런 분들의 100분지 1에도 미치지 못할까, 생각하면서 저 자신을 슬퍼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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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시드니 인문학교실’이 함께 자리하지 못한지가 꼭 1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사람이 인문학 친구들에게 ‘잡기장’이란 이름으로 모두 115번, ‘라틴어 인문학’이란 이름을 붙여 60번, 그래서 모두 175회의 길고, 짧은 잡문들을 써서 나누어 왔습니다.
이제 코로나 펜데믹이 조금씩 완화되고, 또 백신도 맞기 시작하여, 우리 인문학교실도 다음주 목요일 (3월 4일) 부터, 약간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모이게 되어, 오늘로 이 잡기장을 마감하려고 합니다.
그 동안 생각도 짧고, 글쓰기에도 많이 모자란 사람의 잡기장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격려해 주시면서,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을, 한분, 한분씩 이름을 불러가며 기억하며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강지영님, 김동률님, 김동숙님, 김명철님, 김신영님, 김영님, 김용강님, 김재길님, 박혜경님, 박인성님, 백문경님, 손종란님, 양지연님, 이기영님, 이길남님, 이성열님, 임기호님, 임성훈님, 임운규님, 주경식님, 최부옥님, 최정식님, 최진님, 최혜순님, 한남인님, 한종춘님, 한준수님, 현명님, 임보영님, 강병조님, 클라라님, 계응준님, 이길선님, 김혜옥님, 김성광님, 김마리아님, Paul Jun님, 유영식님. 김군자님, 김기완님, 김석호님, 김정연님, 김정희님, 남숙자님, 손동식님, 천보영님, 최재호님, 최정복님. 권영덕님, 김남걸님, 무공님, 손종렴님, 오인수님, 유태근님, 이정무님, 전상연님, 김효진님, 김선희님. 재임스 강님, 죤 리님, 김삼오님, 안항걸님, 김상선님, 김영곤님, 김충석님, 김봉주님, 김희경님, 김병근님, 김환기님.
이 아침, 잡기장을 통하여, 그동안 함께, 생각과 마음을 나누어왔던 여러 선후배 선생님들과 친구분들의 성함을 일일히 불러보기도 하고, 굵은 손가락으로 쳐보기도 하면서, 깊은 존경과 사랑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여기에, 위에 성함을 불러보신 분들을 통하여, 다시 전달 받으신, 제가 알지 못하는 선생님들도 기억하며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언젠가 다른 기회에 얼굴을 뵐수있을 때가 오면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다음 카페나 기타 다른 SNS를 통하여 이를 같이 공유해 주신 선생님들도 계셔서, 같은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하잘 것 없는 잡문 까지도 매일 매일 정성을 다하여 가다듬고 보충, 보완하여 온 라인 신문을 통해 그날 그날 수 많은 독자들에게 전송해 주셔서, 한 시대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공유하게 해 주신 호주 크리스천 라이프와 임운규 목사님께 머리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늘 몸은 강건하시고,
마음은 평안하시옵소서.
시드니에서
여름을 보내는
마지막 금요일 아침에
홍길복 드림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